지금과는 다른 나로 살고 싶다면

조정래 대하소설 3편 이어읽기

by 유쾌한 주용씨

책은 얼어붙은 바다를 깨부수는 도끼 같아야 한다는 말에 크게 공감하게 된 책이 저에게는 조정래의 대하소설이었습니다. 일을 그만두고 조정래 작가의 대하소설 3편을 7개월 동안 이어 읽으면서 그동안은 전혀 느껴보지 못했던 감정으로 행복했고 아팠습니다. 내가 알고 있던 세계가 무너지고 내가 옳다고 믿었던 것들이 허물어지는 경험이었습니다. 안전하기만 한 세상은 아니지만, 겁이 나지는 않았습니다. 32권의 책을 읽기 전과 후, 나는 확실히 다른 사람이 되었습니다. 전에는 하찮게 여겨졌던 것들이 중요해졌고, 감히 하지 못했던 것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항상 부족하다고 느꼈던 내가 이제부터 꽤 괜찮은 사람이 될 수 있을 거라는, 충만한 감정으로 뿌듯했습니다. 책과 영화로 조금씩 변해가는 나를 지켜보는 일이 흥미롭습니다.


-『태백산맥』을 시작으로


『태백산맥』의 시대적 배경은 1945년 해방부터 1953년 휴전까지 8년 동안입니다. 이 시대를 연구한 역사학자들이 거의 없어서 1980년대 후반 무렵이 되어서야 이 시기를 '해방 공간'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작가는 치열한 역사의식으로 8·15 이후의 민족분단 과정과 6·25를 중심으로 하는 분단고착 과정을 밝혔습니다. 『태백산맥』은 1994년 4월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고발당해서 2005년 5월에 무혐의 판정을 받았습니다. 만 11년 간의 진실을 위한 싸움이었고 작가적 양심의 승리였습니다. 조정래 작가는 빨치산이 된 사람들은 무지해서 이념이 무엇인지 몰라서 감정에 휩쓸린 것이 아니라 잘못된 지주 소작제와 실패한 토지개혁으로 입산하게 된 불쌍한 농민이 대부분이었다고 말합니다. 국민의 80퍼센트가 농민, 그중의 80펴센트가 소작인인 나라에 해방이 왔고 소작인이 원한 것은 소작인의 신세를 면하는 것, 농토의 무상몰수 무상분배였습니다. 그 요구가 실현되지 않았으니 미·소가 아니더라도 내란이 일어났을 것이라는 게 조정래 작가의 분석입니다.


빨치산들의 겨울나기를 읽으며 춥다고 엄살을 떠는 게 미안해졌습니다. 동상이 걸린 손과 발로 총을 쏘고, 이불은커녕 낡은 옷으로 영하 20도의 추위를 겪어내는 그들을 생각하면 겨울 저녁 바람에 고개를 돌리지 않고 걷게 됩니다. 절박하고 절실하고 간절하면 견뎌낼 수 있습니다. 목숨을 내놓고 싸우자고 들면 어떤 강적도 두렵지 않을 것 같습니다. 빨치산에게서 죽어도 이기는 자의 모습을 봤습니다. 1권에서 10권까지 외우고 싶을 정도로 좋은 문장이 너무 많아서 감히 적어 놓으려는 엄두를 내지 못했습니다. 조정래 선생님은 아들과 며느리에게 태백산맥을 원고지에 필사하도록 시켰다고 합니다. 4년여에 걸친 필사를 통해 무엇보다 꾸준한 성실성을 가르치고 싶었다고 하셨습니다. 제가 좀 더 어린 나이였다면 도전해 볼 만한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만큼 한 문장 한 문장이 주옥같습니다. 소설이 끝나가는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 10권에서 읽은 손승호의 말을 옮겨 봅니다. 죽음에 대해, 역사에 대해, 민중에 대해 이토록 진정성을 담아 설득력 있게 표현할 수 있는 작가의 역량이 놀라울 뿐입니다.


이 세상 그 누구의 목숨이 죽음으로 이어져 있지 않은 목숨이 있는가. 그러나 이 보편적 명제 앞에서 두려움이 없는 건 죽음을 종교적으로 초월해서가 아니었다. 구체적인 자각으로 죽음을 끌어안았기 때문이었다. 죽음이 추상적일 때 두려움은 생기고, 현실의 안위에 집착할 때 그것은 증폭되는 것이었다. 자각한 자의 죽음은 그것 자체가 행동이었다. 역사 또한 마찬가지였다. 자각하지 못한 자에게 역사는 존재하지 않으며, 자각을 기피하는 자에게 역사는 과거일 뿐이며, 자각하는 자에게 비로소 역사는 시간의 단위 구분이 필요 없는 생명체인 것이다. 역사는 시간도, 사건도, 기록도 아닌 것이다. 그것은 저 먼 옛날로부터 저 먼 뒷날에 걸쳐져 살아서 꿈틀거리는 생명체인 것이다. 올바른 쪽에 서고자 한 무수한 사람들의 목숨으로 엮어진 생명체. 그래서 역사는 관념도, 추상도, 과거도 아닌 것이다. 그것은 오로지 뚜렷한 실체인 것이다. 그러므로 역사는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크는 것이다. 사람의 힘과 의지로 역사는 크는 것이다.

『태백산맥』 10권, p.294


빨치산들이 죽어갈 때마다 가슴이 아팠습니다. 산 밑에 있는 가족에 대한 걱정보다 태어나 처음으로 차별 없이 인간답게, 자신들이 선택한 시간을 살았다는 만족으로 그들은 당당히 죽었습니다. 염상진의 의연한 죽음에 마침내 눈물이 터져 버렸습니다. 책을 읽으며 정말 오랜만에 오랫동안 통곡하듯 울었습니다. 그들의 굳은 신념과 깊고도 깊은 한을 도저히 가늠할 수가 없었습니다. 『태백산맥』은 염상진의 무덤 앞에서 하대치가 끝까지 용맹스럽게 싸우겠다는 결의를 다지며 별을 바라보는 장면으로 끝이 납니다. 작가 조정래는 이 마지막 장면을 인간의 아침을 표현하고 상징하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우리의 역사 속에서 인간다운 세상을 위한 투쟁은 계속될 것이고 그래서 인간의 아침도 밝아올 거라는 희망의 메시지라고 이해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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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백산맥』인물 관계도


『아리랑』에 이어 『한강』까지 이어 읽어갈 계획입니다. 조정래 작가는 『태백산맥』 『아리랑』 『한강』 세 작품을 관통하는 세 가지 공통점을 역사의 주인이고 원동력인 민중의 발견, 민족의 비극인 분단과 민족의 비원인 통일의 자각, 민족의 현실을 망치고 미래를 어둡게 한 친일파 문제라고 말했습니다. 역사의 진실을 알아가는 의미 있는 독서 시간입니다. 무엇보다 재미있습니다. 많은 분량이 부담되기보다는 한 권을 읽어갈 때마다 아쉽고, 다음 편에 대한 기대로 설렜습니다. 한국 근현대사의 3부작이라고 불리는 세 편의 소설을 다 읽고 나면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어떻게 변해 있을지 기대가 됩니다. 좋은 소설의 힘을 몸으로 마음으로 느끼는 소중한 경험입니다. 분명 도끼 같은 책입니다.


-『아리랑』을 이어서


대하소설 『태백산맥』 10권을 읽고 에세이 『황홀한 글감옥』을 읽으면서 조정래 선생님을 제 롤모델로 삼았습니다. 글과 역사에 대한 사명감을 갖고, 오랜 세월 한결같은 노력을 다하며, 그에 따르는 고통을 감내하는 진정한 작가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일제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아리랑』은 조정래 작가의 대하소설 3부작 중 권수가 제일 많은 만큼 인물도 가장 많이 나온다고 합니다. 그래서 노트에 시간에 따라, 스토리를 따라, 인물 관계를 메모하며 꼼꼼하게 읽었습니다. 역사 공부가 되는 건 물론이고 많은 인물을 놓치지 않는 효과가 있습니다. 허투루 읽을 수 없는 책입니다. 빼어난 문장이나 표현은 걸러낼 수가 없을 정도로 많습니다. 당연히 재미있습니다. 길어서 부담스럽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한 권 한 권 아껴가며 읽었습니다. 학생 시절 조정래 선생님의 소설로 역사 공부를 했다면 우리나라 근현대사는 꽉 잡았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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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랑』독서 노트


대하소설 『아리랑』은 일제시대를 살아간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양반이면서 의병 대장으로 앞장선 송수익, 머슴이면서 동학과 의병 활동에 서슴없이 나선 지삼출, 땡중을 자처하며 사람들을 다독여 의병의 부활을 모색하는 공허 스님. 그들은 나라를 되찾기 위해 나섰습니다. 차별 없는 세상을 꿈꿨습니다. 그들에게 용기와 신념을 배웁니다. 나라를 빼앗긴 힘없는 백성의 설움이 고스란히 전해집니다. 지주들에게 당했던 소작인들은 더 악랄한 일본인들에게 굽신거려도 굶는 날들이 계속될 뿐입니다. 부모를 잃고, 남편을 잃고, 자식을 잃은 사람들이 부지기수입니다.


『아리랑』의 감골댁은 동학운동 때 동학농민군이었던 남편을 잃었습니다. 집안의 기둥인 장남 방영근은 빚 때문에 하와이 역부로 팔려 갔어요. 공식적으로 한일합방이 되기 전인 1904년, 하와이와 멕시코로 노예 수출을 하는 대륙 신민 회사의 농간이었습니다. 그 후로 영근은 10년이 넘도록 머나먼 타지에서 가족들에게 소식도 전하지 못한 채 노동자로 살고 있습니다. 남은 가족들은 이미 큰아들이 돌아올 거라는 희망을 버렸고요. 큰딸 보름이는 시집을 갔으나 남편은 일찌감치 죽고 홀시아버지 밑에서 어린 아들 삼봉이를 키우며 살았습니다. 그러다 땅을 빼앗기지 않으려던 시아버지마저 총살당하고 맙니다. 여기서 끝이 아니예요. 아들과 함께 열심히 살아보려는 보름이는 반반한 인물 탓에 친일을 하는 놈들의 표적이 됩니다. 결국 억지로 시작된 첩살이로 일본 순사의 아이까지 갖게 되었죠. 둘째 딸 정분이는 그나마 표나지 않는 인물 덕분에 시집가서 아무 소식 없이 살고 있습니다. 셋째 수국이는 이름만큼이나 꽃처럼 예쁜 딸입니다. 일제가 지배하는 땅에서는 인물 좋은 것도 독이 되는가 봅니다. 친일 집안 아들에게 겁탈을 당합니다. 동생 대근이가 그놈에게 복수를 합니다. 결국 감골댁, 수국이, 대근이는 만주로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감골댁의 엄마로서의 삶을 생각해봅니다. 순탄치 않은 자식들의 삶을 보면서 엄마의 마음은 열두 번도 더 무너졌을 겁니다. 말도 안 되는 감골댁 집안의 수난이 바로 일본 제국주의에 짓밟힌 우리 민족의 모습입니다. 읽는 것만으로 아픕니다. 억울함과 분노로 이가 갈립니다. 그들은 그 기나긴 시간을 어떻게 견뎌낸 것일까요. 36년의 식민지 생활이라고 하지만 가난한 사람들의 수난은 훨씬 뿌리가 깊습니다. 혼자였다면 감당할 수 없었을 일을 함께하는 사람들이 있어 한고비 한고비를 견뎌내며 살아갑니다. 가족의 소중함, 함께 하는 삶의 가치를 배웁니다.


우체국장 하야가와, 영사관에서부터 실권을 휘두르는 쓰지무라, 조선 땅을 긁어 모으는데 혈안이 된 하시모토, 소작료 인상으로 농민들의 고혈을 짜내는 요시다 등 일본의 횡포에 이가 갈립니다. 때리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는 말이 있죠. 면장이면서 정미소까지 운영하는 백종두, 헌병이 되어 권력을 휘두르는 백종두의 아들 백남일, 소작농에게 높은 이자까지 받아 챙기는 이동만, 오로지 집안의 부에만 관심이 있는 장덕풍과 그의 아들 장칠문 등 일본의 앞잡이로 나선 조선인들의 행태는 같은 민족으로 더욱 용서가 안 됩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부끄럽지 않은 삶을 다짐합니다. 돈과 권력이 아닌 올바른 가치관을 물려주는 부모가 되어야겠다고 결심합니다.


분단 대립으로 반토막 나고, 또 친일파들에 의해서 의도적으로 차단시키고 망각을 조장한 식민지 시대의 역사를 구체적이며 총체적으로 바로 알고, 우리 모두가 식민지 시대에 대해 가지고 있는 굴복감과 패배감, 수치심을 진실한 역사 사실들을 통해 우리의 식민지 시대는 저항과 투쟁과 승리의 역사였음을 확인시키고, 우리 모두에게 상실되어 있는 민족적 긍지감과 자긍심, 자존심을 회복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p.341


'『아리랑』을 왜 쓰며, 무엇을 쓰고자 하는가?'에 대한 조정래 작가님의 대답입니다. 『아리랑』을 쓰시면서 위궤양과 어깨, 손가락 마비 등을 견뎌가며 '먹고 자고 쓰고 먹고 자고 쓰고의 연속'이었다고 합니다. 조정래 작가님의 대하소설을 읽어가며 깨닫습니다. 역사의 진실을 아는 일은 이미 지나간 과거에 대한 집착이 아니라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의 자존심 회복이며 미래에 대한 바람직한 설계라고요. 『아리랑』 열두 권을 읽는 내내 가슴이 아팠습니다. 36년간의 식민지 시대에 짓밟히고 당한 사람들의 얘기가 그 어떤 공포 영화보다 더 끔찍했습니다. 100년도 되지 않은 이야기입니다. 그냥 잊기엔 너무 긴 시간, 너무 많은 사람들의 아픔이 있었습니다.


- 드디어 『한강』까지


『태백산맥』을 읽으며 시대의 신음 소리를 들었습니다. 투정부리거나 엄살 피우지 말자고 결심했습니다. 죽음에 대해, 역사에 대해, 민중에 대해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나 자신에게 어떻게 살 것인가를 끝없이 질문했습니다. 그리고 조정래 작가님이 제 롤모델이 되었습니다. 『아리랑』 12권은 더 꼼꼼하게 노트에 요약해가며 읽었습니다. 40여 년의 식민지 시대의 고통을 뼈아프게 느끼고 분노로 밤잠을 설치기도 했습니다. 독립운동을 하는 인물들을 통해 용기와 신념을 배웠습니다. 가족의 소중함과 함께 사는 삶의 가치를 깨달았습니다. 올바른 가치관을 물려주는 부모가 되어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역사의 진실을 아는 일이 중요하다는 것을 마음에 새겼습니다.


『한강』 10권으로 한국 현대사를 공부했습니다. 1959년부터 1980년까지 내가 태어난 70년대를 전후해서 우리나라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제야 조금 알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너무 무관심했고 한심할 정도로 무지했으며 그래서 무책임했습니다. 조정래 작가님이 20년에 걸쳐 쓰신 32권, 세 편의 대하소설을 찬바람이 불기 시작한 때부터 읽기 시작해 약 7개월에 걸쳐 읽었습니다.


불면증과 불규칙한 생활로 몸과 마음이 지쳐있던 때에 『한강』을 읽는 시간만이 몰입의 즐거움을 가져다주었습니다. 이 긴 이야기가 단 한 번도 지루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습니다. 다시 한번 조정래 선생님의 기나긴 시간의 노고와 투철한 역사의식과 작가로서의 굳은 사명감에 존경을 표하고 싶습니다. 35페이지에 달하는 요약 노트를 2장의 인물 관계도로 다시 정리했습니다. 흐릿해졌던 인물들이 다시 살아났습니다. 기록의 힘을 새삼 느낍니다. 공들인 만큼 효과가 큽니다. 뿌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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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인물 관계도


『한강』을 다 읽고 나면 어떤 책을 이어 읽을까 생각하던 중에 조정래 작가님의 『천년의 질문』 세 권이 출간되었다는 반가운 소식을 들었습니다. 90년대부터의 이야기라 하니 1904년부터 100년이 넘는 시대를 읽게 되는 셈입니다. 책을 읽는 게 좋습니다. 책만큼 나를 변화시키는 게 없습니다. 책이 곁에 있어 한없이 기쁩니다. 책으로 위안을 받습니다. 앞으로의 삶은 좋은 책을 쓰는 사람으로 살고 싶어졌습니다. 아직은 갈 길이 멀지만 글 쓰는 사람으로 살겠다는 꿈이 지금의 나를 살게 합니다. 조정래 선생님과 같은 대단한 작품을 남길 자신은 없지만, 작가님의 작품과 말씀을 통해 작가로서의 고통, 노력, 사명, 그리고 보람을 배웁니다. 좋은 글을 쓰는 사람으로, 좋은 사람이 되고자 노력하며, 좋은 세상을 만드는 데 조금의 힘이라도 보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조정래 작가님의 대하소설을 읽으며 다른 사람이 되어 50을 맞이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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