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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쾌한 주용씨 Dec 04. 2023

여성 공감 소설, 최은영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나는 어떤가?

도서관 예약을 통해 최은영 소설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를 손에 넣었다. 3주에 걸쳐 천천히 감상했다. 장편소설인 줄 알았는데 7편의 단편이 수록된 소설집이다. 최은영 소설은 처음이다. 아직 우리나라 여류 소설가들의 작품을 많이 읽은 편은 아니라 작가들의 문체나 분위기가 확연히 구분되지 않는다. 꼼꼼히 기록해두지 않으면 그동안 읽었던 소설들이 마구 섞일 것 같아 한편 한편 마음에 남았던 부분을 적고 짧게나마 그에 대한 내 감상을 적어보았다.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어쩌면 그때의 나는 막연하게나마 그녀를 따라가고 싶었던 것 같다. 나와 닮은 누군가가 등불을 들고 내 앞에서 걸어주고, 내가 발을 디딜 곳이 허공이 아니라는 사실만이라도 알려주기를 바랐는지 모른다. 어디로 가는지 모르지만, 적어도 사라지지않고 계속 나아갈 수 있다는 걸 알려주는 빛, 그런 빛을 좇고 싶었는지 모른다. 그리고 나는 그 빛을 다른 사람이 아닌 그녀에게서 보고 싶었다. 그 빛이 사라진 후, 나는 아직 더듬거리며 내가 어디까지 왔는지 어림해보곤 한다. 그리고 어디로 가게 될 것인지도. 나는 그녀가 갔던 곳까지는 온 걸까. 아직 다다르지 않았나.
p.44


나는 살면서 등불을 들고 내 앞에서 걸어주는, 나와 닮은 누군가를 만나지 못했다. 아니, 어쩌면 만났는데도 내가 알아보지 못한 일 수도 있다. 나는 꽤 오랫동안 주변을 제대로 살피지 못한 채 나만 생각하며 살았다. 이제와 생각해보면 나 자신도 살피지 못한 채 그냥 산 기간도 적지 않다. 그래서 떠올리기 싫은 과거도 있고, 지우고 다시 새기고 싶은 기억도 있고, '이번 생은 글렀어'라며 체념하기도 한다. 만약 나에게 옳은 길이 되어주는,  아주 희미한 빛이라도 발견했다면 후회와 아쉬움이 좀 덜하지 않았을까.


나이가 들수록 사람에게 마음 여는 일이 더 어렵다. 어렸을 때부터 습관이 되지 않은 탓일 것이다. 사람과의 관계에서 천천히 나의 진심을 보여주고 상대방을 애정어린 눈으로 오래오래 지켜보는 일이 나에게는 힘든 일이 돼버렸다. 남들 앞에서 쿨한 척, 씩씩한 척 하지만 내 부족한 점을 보이지 않으려는 얕은 수인 것 같다. 타인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지도 않는다. 사람에게 뿌리 내리지 못하고 떠도는 나의 마음이 가끔은 안쓰럽고 애틋하다.


다른 사람을 칭찬하는 건 어색하고 비판하는 건 오지랖 같고 그러다보니 모든 사람과 데면데면 적당한 거리를 두고 산다.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그런 관계는 언제 끝나도 이상하지 않은 편리한 사이일 지 모르지만 여간해서는 확 친해지지도 않으니 서로에게 절실함이 없다. 굳이 그런 관계를 이어가야 하나 하다가 어느새 그와의 연결 고리는 느슨해지고 결국 몰랐던 사람처럼 각자 살아가게 된다.


「몫」


당신은 그런 글을 쓰고 싶었다. 한번 읽고 나면 읽기 전의 자신으로는 되돌아갈 수 없는 글을, 그 누구도 논리로 반박할 수 없는 단단하고 강한 글을, 첫번째 문장이라는 벽을 부수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글을, 그래서 이미 쓴 문장이 앞으로 올 문장의 벽이 될 수 없는 글을, 언제나 마음 깊은 곳에 잠겨 있는 당신의 느낌과 생각을 언어로 변화시켜 누군가와 이어질 수 있는 글을.
p.52


글쓰는 일이 쉬웠다면, 타고난 재주가 있어 공들이지 않고도 잘 할 수 있는 일이었다면 당신은 쉽게 흥미를 잃어버렸을지도 모른다. 어렵고, 괴롭고, 지치고, 부끄러워 때때로 스스로에 대한 모멸감밖에 느낄 수 없는 일, 그러나 그것을 극복하게 하는 것 또한 글쓰기라는 사실에 당신은 마음을 빼았겼다. 글쓰기로 자기 한계를 인지하면서도 다시 글을 써 그 한계를 조금이나마 넘을 수 있다는 행복, 당신은 그것을 알기 전의 사람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p.75


어떤 책에서든 글쓰기에 대한 내용이 나오면 오래 머물게 된다. 잘하지 못하는 글쓰기에 대한 욕심, 꾸준히 쓰지 못하는 글에 대한 미련, 그럼에도 매일 써야지 라고 다짐하면서 항상 글쓰기 주변에서 어슬렁거리고 있기 때문이다. 얼떨결에 생애 첫 책을 출간하고 꽤 오랫동안 나의 글쓰기는 방황 중이다. 어떤 글을 쓰고 싶은지, 왜 써야 하는지, 누가 내 글을 읽게 될 것이지, 나다운 글이란 무엇인지 등 답하지 못하는 글에 대한 질문들로 머릿속이 시끄럽다. '한번 읽고 나면 읽기 전의 자신으로는 되돌아갈 수 없는 글을' 나도 쓰고 싶다. '글쓰기로 자기 한계를 인지하면서도 다시 글을 써 그 한계를 조금이나마 넘을 수 있다는 행복', 나도 그것을 알기 전의 사람으로 돌아갈 수 없을 것 같다.


「일 년」


다희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의 팔에 가만히 자기 손을 올려놓았다. 그런 다희를 보며, 그녀는 왜 자신이 팔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때의 일들을 떠올리곤 하는지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었다. 다희와 주고받던 이야기들 속에서만 제 모습을 드러내던 마음이 있었으니까. 아무리 누추한 마음이라 하더라도 서로를 마주볼 때면 더는 누추한 채로만 남지 않으니까. 그때, 둘의 이야기들은 서로를 비췄다. 다희에게도 그 시간이 조금이나마 빛이 되어주었기를 그녀는 잠잠히 바랐다.
p.123


누추한 마음도 나눌 수 있는 관계. 가족처럼 가까운 사람에게는 오히려 그것이 더 힘든 것 같다. 그래서 친구가 필요한 지도 모르겠다. 유안진의 「지란지교를 꿈꾸며」에 나오는, '밤늦도록 공허한 마음도 마음 놓고 보일 수 있고 악의 없이 남의 얘기를 주고 받고 나서도 말이 날까 걱정되지 않은 친구가' 곁에 있으면 좋을 것 같긴 하다. 그런 친구 한 명 없는 내가 한심하고 안쓰럽다가도 그런 친구가 되어주는 남편이라도 있어 다행이라며 스스로를 위로한다.


「답신」


내 안에서는 언니에게 상처를 주고 싶어서 어쩔 줄 모르는 나와 언니를 잃을까봐 두려워하는 또다른 내가 싸우고 있었지.
p.164


네 살 무렵에 엄마와 헤어지고, 언니와 함께 아빠의 무관심한 책임감 아래에서 자란 아이. 언니의 희생을 고마워했고 언니를 사랑했지만 언니가 선택한 남자를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여자. 결국 언니의 남자를 폭행한 죄로 감옥에 갔고, 뒤늦게 어릴 때 헤어졌던 조카에게 언니에 대한 마음을 편지로 전하는 그 여자의 마음을 가늠해본다.


그때는 상대방이 잘못했고 내가 옳았다고 확신했는데 세월이 지나면서 그 분명했던 마음이 흐릿해지는 순간을 나도 안다. 나쁜 놈, 죽일 년이었던 사람들이 이해될 때 나의 오해가 두렵고 내 어리석음이 한심하다. 그래서 나이를 먹는다고 마음이 편해지지만은 않는다. 나이를 먹어서 알게되는 것들이 마음을 불편하게 할 때가 가끔 있다. 어떤 관계에서든 '나'를 잃지 않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야 훗날 어떤 감정이든 책임을 질 수 있으니까.


「파종」


그가 언제나 자신에게 져주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서, 자신이 아무리 잔인하게 대해도 참고 견뎌줄 사람이라고 생각해서, 그를 그토록 애틋하게 여겼으면서도 동시에 그렇게 대했다. 이제와 후회해도 소용없는 일이었다. 이제는 어떤 식으로도 지난 일을 만회할 수 없으니까.
p.195


자연스레 남편이 떠올랐다. 내 남편도 항상 나에게 져주는 사람이다. 생각해보면 남편은 살면서 과연 이긴 사람이 있었을까 싶다. 연애 4년, 결혼 생활 25년이 다 되도록 누군가에게 큰소리를 치거나 뒤에서 악담을 하는 것도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있는데 기억을 못 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그만큼 내 남편은 웬만해선 화를 내지 않는, 착하고 무던한 사람이다. 그래서 나에게 많이 당하고 살았다. 그래도 다행이다. 나는 남편에 대한 미안함과 고마움을 보답할 시간이 아직 있으니 말이다.


「이모에게」


옛날 사람들은 하늘 위에 하늘나라가 있다고 생각했다. 밤하늘의 별빛들을 보고 하늘에 구멍을 뚫어 지상의 인간들을 바라보는 저 너머 누군가의 눈빛이라고 믿기도 했다. 그들에게 별빛은 신의 눈빛이거나 더는 만날 수 없는 사랑하는 존재들의 시선이었다.
밤 비행을 할 때면, 검은 하늘을 날아가고 있을 때면 나는 종종 멀리서 나를 바라보는 이모를 느낀다.
p.265


돌아가신 시어머니와 시아버님, 그리고 우리 아빠와 엄마가 하늘나라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다고 생각하면 나는 무척이나 불편하다. 살아계실 때 잘해드리지 못한 죄책감과 지금까지도 자식 걱정에 편안하지 못하시면 어쩌나 하는 죄송함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사는 모습이 탐탁지 않을 수도 있고, 가끔 내 부끄러운 모습까지 보고 계신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면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어진다. 그래도 납골당에 갈 때면 그분들에게 빈다. 우리 모두 행복하게 살게 해 달라고, 손자들 굽어살펴달라고. 자식은 이렇게 끝까지 이기적이다.


「사라지는, 사라지지 않는」

부끄러움. 마이클의 말이 맞았다. 기남은 부끄러웠다. 우경의 눈에 비칠 자신의 모습이, 그애가 오래전 자신을 멀리 떠난 일이, 진경의 알코올중독이, 두 아이가 결국 화해하지 못하고 지금에 이른 사실이…… 기남은 부끄러웠다. 남편에게 단 한 번도 맞서지 못하고 살았던 시간이, 그런 모습을 아이들이 보고 자란 것이…… 기남은 부끄러웠다. 부모에게 단 한 순간도 사랑받지 못했던 자신의 존재가, 하지만 그 사랑을 끝내 희망했던 마음이…… 기남은 이 모든 이야기를 누구에게도 할 수 없었다. 부끄러워서. 기남은 죽고 싶을 만큼 부끄러웠다.
p.318


사람에게는 여러 감정이 있지만 부끄러움이야말로 자신을 가장 작고 초라하게 만드는 것이 아닐까 싶다. 이 부분을 읽으며 돌아가신 엄마를 생각했고, 노년으로 한 발씩 옮겨가는 나를 생각했다. 나는 딸로서 이 소설의 우경이처럼 기남이와 같은 우리 엄마에게 살아온 세월을 부끄럽게 만든 적은 없었나 되돌아보았다. 힘들게 살아온 엄마의 삶을 너무 쉽게 여기진 않았는지, 나이든 엄마를 더 충분히 위로하고 더 많이 살펴야 했던 건 아닌지, 병든 엄마의 몸과 마음에 제대로 공감하지 못해서 엄마를 너무 외롭게 한 건 아닌지, 이제 와 쓸데없는 후회와 자책을 하고 있다.


그렇다면 나는 부끄럽지 않게 살고 있나? 자신있게 대답할 수 없다. 우선 이미 부끄럽게 여기고 있는 과거의 시간들이 있다. 시간을 되돌릴 수 없고 인생을 다시 살 순 없으니 부끄러움 없는 삶은 이미 글렀다. 어려서, 미성숙해서, 잘못 산 건 어쩔 수 없다쳐도 적지 않은 나이를 먹은 지금은 어떤가? 그닥… 애쓰며 살고는 있지만 나 자신에게 떳떳한 삶인지는 잘 모르겠다.


최은영의 여성은 '읽는 행위'를 통해 개인의 불운으로 여기기 쉬운 일들을 사회구조의 맥락에서 이해하는 시야를 얻음으로써 삶을 쉽게 등지지 않는 힘을 기르는 것이다.
해설 p.326


최은영 소설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의 마지막장을 덮으며 나도 비슷한 생각을 했다. 요즘 활동하는 여류 작가들의 여성에 관한 이야기는 내가 겪은 일들, 생각한 것들이 나만의 것이 아니었다는 공감과 연대 의식을 갖게 한다. 그리고 거기에서 위안을 얻고 더 잘 살아봐야겠다는, 그리고 나와 같은 여성들에게 어떤 방법으로든 나도 힘을 보태야겠다는 생각도 하게 된다. 나는 그 방법이 내 글이 되었으면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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