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쾌한 주용씨 Jan 06. 2024

제주도에서 걷고 읽고 쓰는 사람으로...

2월 둘째아들과 제주도 3박 4일 여행!

작년 2월에 스무 살 둘째아들과 3박 4일 제주도 여행을 다녀왔다. 제주도에서도 걷고 읽고 쓰는 사람으로 살았다. 새벽에야 잠이 드는 아들은 새벽에 잠이 깨는 엄마에게 혼자만의 오전 시간을 선물했다. 아들의 단잠을 방해하지 않으려고 소리를 죽여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었다. 곤히 잠든 아들의 편안한 얼굴을 보고 미소지으며 까치발을 하고 숙소를 나왔다. 파도 소리와 시원한 바람이 함께하는 제주도의 아침은 걷기 좋아하는 나에게 최고의 시간이었다.


제주도 여행 둘째 날은 숙소 근처 올레길 7코스를 걸었다. 유명한 올레길이라고 하기엔 너무 한적해서 살짝 무서운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금세 제주도의 매력에 빠져 다리 아픈 줄 모르고 걸었다. 뻔한 관광지가 아니라 제주도의 한적한 마을 곳곳을 거니는 걸 좋아한다. 감귤 농장, 작은 초등학교, 인적 드문 조용한 동네, 낮은 건물들 사이로 보이는 바다, 많지 않은 차들... 이 모두가 걷는 사람에게 어울린다. 오후엔 천지연 폭포, 세연교, 주상절리, 약천사 등을 관광하며 아들과 함께 걸었다. 나보다 20cm나 더 큰 아들이 곁에 있어 든든하고 편안했다.


제주도 여행 셋째 날은 숙소에서 이중섭 거리까지 1시간 가까이 걸어 책방에 다녀왔다. 유화당인문학 책을 파는 독립서점이다. 다른 제주도 서점에 비해 일찍 문을 열고 늦게 문을 닫는다. 특히 책방지기 사장님의 독서 내공이 깊다는 말을 듣고 찾아간 곳이다. 인문학 책방은 처음이기도 하고 사장님께 좋은 책을 추천받을 수 있을 거라는 기대로 힘차게 걸었다. 책이 있는 곳을 목적으로 하니 발걸음은 전날보다 더 가벼웠다. 둘째 날 걸었던 방향과 반대 방향이라 새로운 풍경이 친구가 되니 지루하지도 않았다. 두 발로 곳곳을 거닐 수 있는 건강만 허락된다면 더 바랄 게 없을 것 같았다.


유화당은 작년 제주도 여행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장소가 되었다. 아직 인문학 내공이 없는 내게는 좀 어려워 보이는 책이었지만 사장님의 친절한 안내와 설명으로 시간 가는 줄 몰랐다. 10시 오픈 시간에 맞춰 간 덕분에 서점은 한가했고 유일한 손님인 내게 1시간 30분 동안 사장님은 독서 친구가 되어주었다. 작은 공간에서 책들이 뿜어내는 에너지에 힘을 얻고 사장님이 정성스레 내려준 커피에 마음을 녹였다. 서울에서 직장 다니다 퇴직하고 서귀포에 서점을 연 지 4년이 됐다고 하셨다. 사장님의 삶이 부러웠다. 나는 언제 이런 공간, 이런 시간을 갖게 될까.



유화당에서의 가장 큰 수확은 사장님이 내게 권해준 책들이다. 한 가지 일에 미쳐 최고가 된 사람들이라는 부제가 궁금했던 책 『벽광나치오』를 통해 안대회라는 작가를 처음 알게 되었다. 내가 알고 있는 정민 작가 못지않게 우리나라 고전 분야의 대단한 고수란다. 페터 비에리의 『자기 결정』이라는 책의 표지와 티지 문구가 눈에 띄어 이 책 어떠냐고 여쭈니 작년에 판매 순위가 매우 놓았던 좋은 책이라고 권해 주신다(신기한 일! 그때 내가 북토크를 했던 북두칠성 독서 모임 회장님과 통화했는데 3월에 독서 모임에서 읽을 책 중 한 권이 이 책이라고 하셨다). 아무래도 조만간 이 책을 읽게 될 것 같다.



맨 처음에 토마스 기르스트의 『세상의 모든 시간』이라는 책의 166페이지를 읽어보라고 해서 깜짝 놀랐다. 그 많은 책 중 한 권을 골라 페이지를 딱 집어 좋다고 권해줄 수 있으려면 얼마나 꼼꼼히 책을 읽어야할까 싶었다. 홀린 듯 사장님이 말씀한 그 부분을 읽기 시작했고 나도 모르게 눈물이 고였다. 센스 있게 휴지 몇 장을 옆에 갖다주시며 얀 그루에의 『우리의 사이와 차이』라는 책을 가져다 주셨다. 나의 결을 읽으셨나보다. 얀 그루에의 책은 사장님께서 올해 읽은 책 중에 별 다섯 개를 준 유일한 책이라며 다 읽고난 후 혼자 기립 박수를 치셨단다. 책의 해제 부분만 읽어보라고 하셨는데 결국 고였던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감동이다. 처음으로 가져보는 이상한 기분에 어쩔 줄 몰라하니 사장님의 깊이 있는 설명이 이어졌다. 서점에서 얀 그루에의 『우리의 사이와 차이』와 내게 조금은 익숙한 『에피쿠로스의 네 가지 처방』이라는 얇은 책을 구입했다. 숙소에서의 오후는 이 책들과 함께했다.



그밖에도 우리나라 최고의 여류 소설가라고 추천해주신 김숨과 권여선을 알게 된 것이 또 하나의 큰 수확이었다. 제주도에서 돌아와 집 가까운 도서관에서 김숨의 소설집 『국수』권여선 소설집 『안녕 주정뱅이』를 빌려다놨다. 사장님이 권해준 김숨의 「막차」를 읽었는데 좋다. 읽어야 할 소설책이 늘었다. 글쓰기에 관심이 많다고 하자 이런 책들을 순서대로 읽어보면 자기만의 문체로 글을 쓸 수 있을 거라며 6권의 글쓰기 책을 펼쳐놔주셨다. 세상에... 어디 가서 이런 귀한 조언을 들을 수가 있단 말인가. 마틴 푸그너의 『글이 만든 세계』, 김봉석의 『전방위 글쓰기』, 『제임스 조이스의 아름다운 글들』, 『고종석의 문장』, 안대회의 『문장의 품격』. 꼭꼭꼭 전부 읽고 습득해서내 글에 적용해보리라 결심했다.



유화당에서 숙소로 돌아오는 길, 머리에 너무 많은 생각이 담기고 가슴이 후끈 달아올라 발걸음이 좀 더뎌졌다. 21일 12시 은유 메타포라 10기를 신청하는 시간이었다. 유화당의 사장님은 권해준 글쓰기 책 열심히 읽으면서 매일 글을 쓰면 따로 글쓰기 수업을 들을 필요는 없다고 하셨지만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내가 좋아하는 은유 작가다. 목금토 3일만 일하는 나에게 화요일 오후 서울에서의 글쓰기 수업은 기회였다. 처음으로 글쓰기 수업을 듣는 거라 긴장도 되고 그 유명한 은유 작가를 직접 보고 내 글을 평가받을 수 있다니 무척 떨렸다. 게다가 25명의 글쓰는 사람들이 모이니 좋은 친구도 사귈 수 있을 것 같아 기대되었다. 50 넘도록 마음 터놓고 이야기할 친구 한 명이 없으니 이참에 함께 읽고 글쓰는 친구가 생긴다면 좋을 것 같았다.


 12시 정각 제주도 서귀포 길가에서 은유 메타포라 10기 신청서를 제출했다. 금방 마감되는 수업이라고 알려져있어 혹시라도 신청이 안 될까봐 걱정했는데 다행히 정상적으로 신청됐고 숙소에 돌아와 수강료 납부를 했다. 곧 이후북스 책방지기님의 신청 성공을 축하하는 문자가 도착했다. '바늘 구멍(?)을 뚫고 신청에 성공하신 걸 축하드립니다.' 아들과의 제주도 여행길에 난생 처음 글쓰기 수업을 신청하고 그 어렵다던 바늘 구멍을 뚫었으니 어찌 뜻깊은 일이 아닐까. 12주 동안 읽고 말하고 쓰는 사람으로 최선을 다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작년 2월, 제주도에서도 나는 걷고 읽고 쓰는 사람으로 살았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내가 어떨 때 행복한지 분명히 알 수 있는 시간이었다. 잘 자란 우리 둘째아들과 함께 걸었던 길, 함께 먹었던 음식, 함께 나눴던 말들이 지금도 생생하다. 제주도, 내가 가장 좋아하는 여행지이자 남편과 함께 정착해서 살고 싶은 곳이기도 하다. 그곳에서 내 마음 가는 대로 자유롭게 걸으며, 치열하게 읽고 쓰는 사람으로 살고 싶다. 올해는 남편과 둘이 제주도에 다녀와야겠다. 두 아들과는 제주도 한 달 살기도 해보고 각각 3박 4일 제주도 여행도 다녀왔는데 남편과 단둘이 제주도에 간 적은 없다. 남편과 함께라면 더 많이 걷고 우리 노후를 계획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전 08화 여행지 호텔보다 더 사랑스러운 우리 집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