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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ecilia de brunch Apr 27. 2020

[제주 일기 12] 제주 살이 2주 차, 바다의 위로

바다는 2주면 질린다는데

 물이 안 내려가던 회사 화장실 공사도 새로 하고, 사무실에 놓을 쓰레기통도 도착했다. 여러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일주일이 지나고 나니, 얼추 서울에서의 모습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 한 사무환경이 갖춰졌다. 사무실로 전화가 오면, “저희 제주로 이전한 거 아시죠? 앞으로 전화번호는요 064-800-0000입니다.”라고 말하는 순간들이 아니고는 가끔 이곳이 서울인지 제주인지 잘 구분이 안 간다. 평소와 다름없이 일하고, 이메일을 보내고, 전화를 하고, 모니터를 보며 타자를 두드리고, 회의를 하고 퇴근한다. 걱정이 과했는지, 생각보다 이곳은 지낼 만했다.


 제주는 어딜 가든 탁 트인 시야에서 하늘을 볼 수 있다. 제주에 내려온 지 일주일쯤 됐을 때, 퇴근하고 석양도 볼 겸 바닷가로 산책을 나갔다. 중문 집에서 15분쯤 걸어 중문관광로에 진입하면 멀리 바다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10여분을 더 걸으면 호텔들이 모여 있는 관광단지에 도착하는데, 천제 2교를 건너면서부터는 오른쪽에는 제주올레길 8코스가 왼쪽에는 바다가 보인다. 특히 퇴근하고 부지런히 걸어 나오면, 해가 지기 전 타이밍을 맞춰 석양과 물드는 분홍빛 하늘을 볼 수 있다. 바다는 파랗고 하늘은 분홍빛이고, 주변은 초록으로 물들어 있노라니 제주에 온 게 실감 났다. LA에 여행 갔던 친구가 언덕에서 석양으로 물들기 전 하늘이 너무 아름다웠다며 알려준 말이 그대로 생각났다. 바로 ‘핑크 모멘트’ 


 즐겨가는 산책코스는 집에서 걸어 나와 중문 관광로를 따라 걷고, 제주 컨벤션 센터가 나오면 관광단지와 천제 2교를 지나, 색달 해변에서 모래 한번 밟고 별 내린 전망대를 찍고 집에 돌아오는 코스다. 별 내린 전망대는 중문천을 끼고 주변에 빛이 나는 건물이나 높은 빌딩이 없어서 해가지면 별을 관찰하기 꽤 좋은 장소다. 물론 길 건너에 리조트도 있고, 버스도 다녀서 쏟아지는 별을 볼 수 있을 정도는 아니지만 서울에 비하면 감지덕지였다. 


 서울에선 시내에서 시내로 이사를 해도 마음이 싱숭생숭한데, 비행기를 타고 또 차를 타고 반나절이 걸려야만 하는 곳으로 이사를 하니 잘 정착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진작 회사를 그만뒀어야 하는 건지, 왜 나는 이직을 하지 못해서 제주까지 온 것인지 한심하고, 또 남자 친구를 두고 온 건 속상하고, 뭍에 있는 도심생활의 편리들을 잊고 살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는데 유일한 위로가 있다면 하늘과 바다였다. 집에서 20분 씩씩하게 걸어 나가면 바다를 언제든지 마주할 수 있다니. 해변에 갔다가 오늘 보고 아쉬우면 내일 또 오면 된다. 실컷 바다를 보고 해변가 카페에서 파도 한잔 나 한잔 노을을 안주삼아 맥주 한 병 마신 날에는, 버스를 타고 집에 와도 된다. 휴일이면 낮에 가도 되고, 그다음 날도 언제든지 또 갈 수 있다. 아쉬움 없이 바다를 마주할 수 있다는 것도 특권이다. 바다가 보이는 집을 구한다고 했을 때, 사람들이 “바다는 2주면 질려”라고 뜯어말렸다. 밤바다는 그럴 수 있겠다 싶어서, 마음을 접었는데 나는 질릴 것 같지 않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게다가 회사 테라스만 나가도 눈에 하늘을 가득 담을 수 있었다. 높은 건물이 없어 방해물 없이, 시야에 하늘을 가득 담을 수 있다는 건 사실 축복이다. 강남에서 오피스텔을 알아볼 때 볕이 잘 들지 않는 매물을 보러 간 적이 있다. 창문을 열면 하늘이 아니라 바로 옆 건물이 보였다. 내 팔이 조금만 더 길었다면 건물 창문을 열 수 있을 것 같은 정도로 건물들이 서로 다닥다닥 붙어있었다. 햇빛은 건물 틈새로 반사광처럼 들어왔다. 나는 여배우가 아니라 반사광이 아닌 직접광을 원했다. 그래도 강남이라고, 신축이라는 이유로 7평도 안 되는 공간이 보증금 1,000만 원에 월세 70만 원이었다. 한숨을 쉬며 마음을 못 정하고 있으니 중개업자 분이 팩폭을 날렸다. “어차피 회사원 아니에요? 해 들어올 시간에 집에 없지 않나요?” 그래서 더 잘 안다. 햇살과 하늘과 구름은 공짜인데 집에서 햇볕 한 줌, 하늘 한 조각이라도 보려면 치러야 하는 비용이 얼마인지.


 제주에 내려온 2018년, 한국에는 유례없는 폭염이 찾아왔다. 서울에 있는 남자 친구가 “여긴 거의 뭄바이야”라고 말했다. 39도? 40도?를 우습게 넘기는 더위였다. 어렸을 때 체온이 38도만 넘어가도 엄마가 발을 동동 굴렀던 기억이 났다. 기온을 측정하는 곳이 40도면, 아스팔트는 60-70도였다. 도로에서 계란 프라이도 할 수 있고, 차 안에 두는 계란이 실제로 삶아지기도 하며, 햇빛에 라텍스 방석이 자연 발화하고, 아열대 지방에서만 자라는 바나나가 한반도에서도 자란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내륙에서 망고 재배가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기대감과 함께. 이러다 연교차 60도가 되는 나라에서 사는 사람이 되겠다는 웃기지 않은 우스갯소리와, 농작물과 축산농가의 피해와 온열환자가 늘어난다는 우려스러운 소식까지 매일 들렸다. 다행히, 제주는 최고기온이 32-33도를 넘지 않았다. 쨍하게 덥기도 했지만, 으레 여름이 그랬던 정도였다. 땀이 나면 얼음 음료로 갈증을 잠시 달래고, 해 질 무렵 흐르는 땀을 닦아가며 바다 산책을 감행할 수 있을 정도로 견딜 만했다. 폭염 덕분에, 올해 여름에 제주를 내려왔다는 게 그나마 위안이 됐다. 심술궂고 얄팍한 위로였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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