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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ecilia de brunch Apr 27. 2020

[제주일기 15] 여기는 박물관 천국인가요?

 제주를 찾는 관광객들도 느꼈겠지만, 제주공항에 도착해 인포메이션 데스크에 서있다 보면 이곳은 박물관의 천국인가 싶을 정도로 각종 개성 넘치는 박물관이 곳곳에 자리 잡고 있다. 엊그제 제주공항에서 버스를 타고 집에 가는 길이었다. 아무 생각 없이 이정표를 보고 있는데 난데없이 ‘그리스 로마 신화 박물관’이 눈에 띄었다. 아니, 여긴 그리스도 로마도 아닌데? 그리스와 로마에 가까운 유럽도 아닌데 도대체 여기에 왜? 의문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조금 더 가다 보면, 헬로키티 박물관이 나온다. 피규어 박물관도 이에 질세라 등장한다. 여기는 일본인가? 어느새 유럽에서 일본까지 이동한 거지? 잠시 헷갈린다.


 오설록 녹차박물관은 제주 녹차로 차와 아이스크림을 만드니까, 이해가 간다. 감귤은 제주도 특산품이니까 감귤박물관도 설득력 있다. SOS 박물관-실제로 구조신호를 보내는 그 SOS-부터는 갸우뚱 기울어진 고개가 좀처럼 제 자리를 찾을 생각을 못한다. 제주는 구조신호를 많이 보내는 곳인가? 믿거나 말거나 박물관은 왜 중문 관광단지에 있으며, 사랑과 성 박물관과 이웃 아닌 이웃인 세계 성문화 박물관, 세계 술 박물관, 테디베어 박물관, 초콜릿 박물관, 갓전시관, 레고의 본고장도 아닌데 레고 박물관, 항공우주박물관까지. 도대체 이 섬의 정체는 무엇인가? 


 내가 처음 기대한 가설은 이렇다. 사실 범인에게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제주도는 성공한 덕후들이 노후를 보내는 성지인 것이다. 헬로키티를 너무나 사랑하는 사람이 그/그녀의 일생에 걸쳐 전 재산을 바쳐 다양한 굿즈를 수집한다. 서울은 땅값도 비싸니, 제주에서 보다 넓은 면적에 박물관을 세우고 지역주민과 관광객들에게 사랑하는 키티의 모습을 공유하며 성덕으로서 여생을 마무리한다. 그런데 입장료는 14,000원이다. 아, 이건 쫌 아닌 것 같다. 


 아니면 제주는 사실 알고 보니 성(性)과 사랑에 도가 튼 전문가들을 두루 배출한 유서 깊은 동네였던 것이다. 카마수트라는 기본이고, 민간에 전해지는 어마 무시한 비기와 기술을 터득한 고수들이 사랑의 기술을 널리 퍼트리는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육지에서는 그들을 박해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비기가 후대에 전해지지 않고 끊길 것을 두려워하여, 사랑과 성 박물관을 지어 명맥을 유지하려는 깊은 뜻을 남긴 것이다. 건강한 후손들의 행복한 밤을 위하여. 아, 이것도 아닌 것 같다.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나만 제주도 박물관이 의아하게 많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나 보다. 기사에 따르면 박물관은 등록의 의무가 없고, 박물관 사업자에게 취득세와 부동산 재산세, 지역자원, 시설세 면제 등의 혜택이 있다 보니 사업자들이 세금을 덜기 위해 ‘박물관’이라는 이름의 관광시설을 짓고 있다고 한다. 제주에는 등록한 박물관만 100개, 도민 8,000명 당 1개꼴로 박물관이 자리한다. 등록하지 않은 것까지 합치면 100여 개가 훨씬 넘고, 도 차원에서도 정확한 숫자는 파악되지 않았다고 한다. (뉴스제주, 2016.) 


 에잇, 좀 실망스럽다. 성공한 덕후들이 곳곳에 포진해 있는 제주도는 좀 더 재야의 고수들이 숨어있는 매력적인 느낌인데, 아쉽다. 아쉬운 마음은 건강과 성 박물관에서 후끈한 기분으로 조금 달래 봐야겠다.


*참고기사

제주도내 박물관 수는 도민 8,000명 당 1개소 꼴인데, 이를 OECD 기준으로 보면 제주도가 얼마나 심한지 알 수 있다. OECD 국가 평균으로 계산하면 5만 명 당 1개소이며, 제주 이외 국내 기준으로 봤을 땐 5만 3000명 당 1개 소다. 특히 사립박물관과 미술관이 전체 비율 중 80% 이상을 차지하고 있고, 앞으로도 계속 증가할 것으로 예측되고 있다.


출처 : 뉴스제주(http://www.newsjej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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