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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ecilia de brunch May 07. 2020

[제주일기 20] 제주 살이 한 달 정산

죽을 만큼 아픈 게 아니면 병원에 안 가는 요즘


 바다를 곁에 끼고 오가는 출퇴근길, 마트에서 조금씩 장을 봐서 해 먹는 저녁, 답답하면 회사 테라스에서 보는 하늘과 바다, 좋은 점들에도 익숙해질 무렵, 일상의 불편함이 바늘처럼 찾아왔다.


 처음에 제주 내려가기 전만 해도 도로연수를 받고, 차를 알아보러 다녔다. 중고차 시장도 두 군데 가보고 인터넷 중고차도 수시로 알아보고, 신차 매장도 세 군데쯤 다니고 주변 사람들에게 하도 물어봐서 다들 내가 차를 곧 사거나 사는 줄 알았다. 그만큼 입을 나불거리고 다녔다. 마음만은 차 소유주였달까. 차를 사는 비용도 만만치 않았지만, 다시 서울에 가면 운전을 할 것 같지 않았다. 택시, 지하철, 버스 옵션이 많은 서울에서 교통량도 많은데 굳이 운전을 할 리가 없었다. 망설여지다가 또 내 차를 끌고 음악을 들으며 해안도로를 달리는 내 자신을 상상하면 그건 또 멋지니 사고 싶었다가, 100만 원도 아니고 2천 3천만 원씩 하는 제품을 사보는 건 또 처음이라 다시 주저하길 반복했다. 차가 없으니, 움직이는 반경에 제약이 컸다.  


 물건이야 어떻게든 사도 되고, 없어도 이 대신 잇몸으로 버티는 식이 가능했지만 몸이 아픈 건 그렇지 않았다. 어느 날인가 뒷목이 너무 아파서 머리까지 저려왔다. 담이 온 것 같았는데, 버스를 타고 돌아 돌아 정형외과를 가자니 여간 귀찮은 게 아니었다. 결국 저절로 나을 때까지 셀프 요양을 하며 쉬었다. 죽을 만큼 아프면 가겠지만, 견딜만하다 싶으면 참게 됐다. 병원이란 게 또 다니던 곳을 가야 지금껏 치료했던 진료 기록을 확인할 수 있다 보니 휴가를 내고 서울에 가서 치료를 받았던 적도 있다. 자연도 좋고, 공기 맑은 청정 제주이지만 문명의 편리를 떠나 아플 때는 ‘이기로움’의 반경이 절실했음을 느꼈다.  


생각보다 잦은 비행기 결항과 지연

 서울로 향하는 저녁 출발 비행기는 체감 상 지연되지 않은 비행기가 드물 정도다. 앞 비행기가 지연되면, 다음 비행기도 출발이 조금씩 늦어지고, 탑승객 누군가 면세쇼핑을 하다 늦으면 또 지연되고, 탑승구는 제한되어 있다 보니 지연된 시간이 고스란히 축적돼 저녁 비행기가 뜰 때 즈음이면 30-40분은 예사로 지연된다. 


 여름엔 태풍 소식이 들리면 2~3일 전부터 조마조마했다. 강풍이나 태풍이 예정되어 있어도, 전날이나 당일까지도 항공편이 취소될지 여부가 확정되기 전에는 쉽사리 예측을 할 수가 없었다. 금요일 아침에는 캐리어를 끌고 출근하는 직원들이 많았다. 제주에 오고 ‘윈드시어’라는 말도 처음 배웠다. 


경조사는 어쩌나

 예전에 서울에서 근무할 때는 회사 직원이 결혼하면 결혼식장에도 가고, 가족이 상을 당하면 장례식장에도 갔다. 제주에 오고 나니 경조사 참석도 큰 일이었다. 결혼식장이나 장례식장이 지방이어도 주말을 이용하거나 퇴근하고 KTX를 타면 무리해서라도 갈 수 있었다. 하지만 서귀포에서 육지로 가는 일은 요원 그 자체였다. 섬에 오니 이동 시간보다도 바다 때문에 단절된 심리적, 물리적 거리감이 상당했다. 


 경조사에는 회사 사람들이 시끌벅적하게 와 주어야 그래도 북적거리고 보기가 좋은데, 회사 사람들이 가기 어려워지면서 허전해질 것을 우려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확실히 그랬다. 제주에 있는 동안 친한 동료의 할머니가 돌아가셨는데, 찾아갈 엄두를 낼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말은 서울에서, 주중은 제주에서 보내는 한 달이 지났다. 막상 살아보니, 제주도 사람 사는 곳인데 걱정이 과했고 우려가 심했다. 사람 사는 곳인데 다 살아진다. 불편함의 종류가 다르고 대신 누릴 수 있는 다른 대안의 즐거움이 있다. 차가 없지만 차가 있는 선배에게 의지해서 출퇴근하고 있다. 퇴근 후에는 동네 선후배님들과 저녁식사를 가장한 반주 타임을 종종 갖고, 기분 좋게 걸어서 집에 들어간다. 가끔은 바다를 마주하러 걸어 나간다. 내방은 한 칸이지만 그래도 창문을 열면 한라산에 얹힌 구름 한 조각과 하늘을 보는 즐거움이 있다. 아직 한 달 차 정산이라, 재무제표처럼 계산기를 두드리고 즐거움과 불편함의 합산 결과 값을 말할 수 있는 정도는 아니다. 걱정보다는 잘 적응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새로운 풍경을 마주하고 그곳을 지나가는 삶의 속도가 환경에 맞춰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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