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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ecilia de brunch May 14. 2020

[제주일기 36] 빈 마요네즈 병을 기억하세요

인생이 힘들 땐 빈 마요네즈 병을 기억하세요



 미국 어느 대학 강의에서 한 교수가 빈 마요네즈 병을 책상에서 꺼냈다. 골프공을 가득 담고 “병이 꽉 차 보이나요?”라고 물어보자 학생들은 그렇다고 대답했다. 교수는 책상에서 조약돌을 꺼내 부었다. “이제 가득 차 보이 나요?” 또 학생들은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는 또 모래를 꺼내서 부었다. “이제 진짜 가득 차 보이 나요?” 학생들은 그렇다고 대답하고, 그는 커피 한잔을 꺼내서 부었다. 그 교수는, 이 병이 학생들의 인생과 같음을 알았으면 한다고 설명을 시작했다. 골프공은 인생에 있어 가장 중요한 가족, 자녀, 믿음, 건강, 열정, 친구 같은 것들이다. 인생에서 다른 모든 것들이 모두 사라지고 이것들만 남는다고 해도 인생은 여전히 꽉 차있을 거라고. 조약돌이나 모래는 그 외의 모든 작은 것들이라고. 하지만 모래와 조약돌을 먼저 넣는다면 중요한 것이 들어갈 자리가 없을 것이니까 우리 인생은 우선순위로 먼저 채워야 한다는 교훈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처음에는 이 이야기를 듣고 인생에 고비가 찾아오면 가장 중요한 가치들을 가장 먼저 생각해야지-라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나는 요즘 서울에서 만원 지하철을 탈 때 빈 마요네즈 병이 떠올랐다. 얼핏 골프공으로 가득 차 보이지만 조약돌을 또 부은 것처럼, 다음 정거장에서 사람이 더 들어간다. 정말로 만원이라 발 디딜 틈 없는 것 같지만 또 발 하나 밀어 넣고 모래알처럼 들이미는 승객들이 있다. 진짜 턱 끝까지 다 차서 허공에 발이 뜰 것 같을 때에도 포기를 모르는 한 명은 또 탄다. 문 앞까지 꽉꽉 사람들이 찬 지하철에 내 몸 하나 밀어 넣을 엄두가 안 나서 다음 차를 타려고 마음먹었을 때에도, 옆에 서 있던 아저씨는 발바닥 아니 엄지발가락 하나 걸칠 수 있는 공간이 보이면 바로 가방을 먼저 들이 밀고 “같이 좀 갑시다”하며 몸을 구겨 넣으시던데, 나는.... 제주에서 자동차로 쾌적하게 회사를 오고 가며 서울에서의 서바이벌 정신을 잃고 말았다. 눈 뜨고 코 베이는 도시 서울에서 정신을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도태될 것만 같았다. 서울 출근길은 모두에게 빈 마요네즈 병인가 보다. 


커피 한잔을 마요네즈 병에

 마요네즈 병에 골프공과 조약돌과 모래를 다 넣고도 커피가 들어간다는 건 아무리 바빠도 친구와 커피 한잔 할 여유는 있다는 뜻이라고 한다. 아침도 못 먹고 허둥지둥 서두르는 출근길이라도 커피 한 잔 테이크 아웃할 시간은 낼 수 있다. 여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바쁜 직장인들을 불쌍히 여긴 커피 전문점 바리스타들의 손놀림이 그만큼 빠르기 때문이다. 결제와 동시에 에스프레소가 추출되어 순식간에 내 손에 한 잔이 들린다. 지하철역에서 회사 건물로 이어지는 통로에만 커피 전문점이 족히 5~6개는 된다. 아침식사 대용으로 먹을 수 있는 빵이나 샐러드, 요거트를 파는 가게들도 줄지어 있다. 편리하다. 서울에 다시 오고 요리학원도 등록하고, 운동도 등록했다. 제주에 살 때는 6개월 동안 헬스장에 다섯 번도 안 갔는데 이제는 일주일에 두세 번은 가려고 노력한다.


 서울에 다시 올라오니, 제주와 서울 중에 어디가 더 좋냐는 질문을 많이 받는다. 지금은 선뜻 말하기가 어렵다. 편리한 서울과 청정 자연의 제주는 더 좋고 말고 가 아니라 인생의 어느 시점에서 누구와 어떤 이유로 사느냐에 따라 대답이 달라질 것 같다. 출산을 하고 남편은 프리랜서로 일 하고, 귤나무가 있는 집에 산다는 어떤 직원은 제주가 지금은 살기 좋다고 했다. 서울에서는 강아지들이 뛰어 놀 공간이 없었는데 제주에 가니 세 마리 강아지들이 방을 하나씩 차지할 수 있다는 직원도 있다. 처음에는 여기저기 구경 다니고 적응하는 재미가 있었는데 친구들도 못 만나고 우울감을 호소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각자의 사정이 있고 변수가 있으니 하나의 정답은 없었다. 지금 나는 새로 시작된 나의 가족과 함께 살 수 있는 곳이 서울이라 행복하다. 발달된 인프라와 배달 서비스, 상점들은 편리하긴 하지만 없이 살아보니 또 인생에 꼭 필요한 것은 아님을 이제는 안다. 쇼핑몰을 하도 들락날락거렸더니 내 마요네즈 병에 조약돌은 될 줄 알았는데 모래 정도 된다는 걸 체감했다. 


 제주에 다녀오고 내 마요네즈 병은 조금 달라지긴 한 것 같다. 큼지막한 골프공으로 신랑이 추가됐다. 신랑과 함께 보내는 시간이 조약돌이 됐다. 같이 집에서 지어먹는 밥과 어설프게 흉내 낸 된장국, 신랑이 아침에 싸주는 과일 도시락이나 눈 떠서 5분 정도 나른하게 꽁냥 거리는 시간들이 우선순위 리스트에 점프해서 혜성처럼 등장했다. 싱글이었다면 제주에 조금 더 살면서 1년을 채웠어도 괜찮았을 거라는 의미 없는 가정을 해보기도 한다. 골프공인 줄 알았는데 제주에서 보니 조약돌인 것들도 있었다. 나의 소중한 취미생활, 힙 플레이스, 맛집과 친구들과의 만남, 쇼핑 같은 것들이 그랬다. 사는 곳이 바뀌었다고 마요네즈 병이 완전히 달라진 것은 아니었지만, 제주 살이 6개월은 마요네즈 병을 비우고 다시 채우는 시간이었다. 힙플레이스는 바다로, 친구들은 이웃으로, 편리함은 느슨한 산 공기로, 소고기에 대한 굶주림은 신선한 돼지 생갈비로, 대체재는 어떻게든 환경에 맞게 구할 수 있었다. 어떤 경험들은 티가 나지 않는 모습으로 인생을 재배열하는데 제주 살이가 내겐 그랬던 것 같다. 


 1/2 칼로리 마요네즈가 발명된 이유는 마요네즈를 두 배로 먹을 수 있기 위해서라는 농을 들은 적이 있다. 처음엔 웃었는데 곱씹을수록 합리적이다. 마요네즈는 기본적으로 계란 노른자에 기름을 많이, 정확한 계량을 알고 싶지 않을 만큼 많이 넣어 만든다. 샐러드에도 어울리고 밥에도, 구운 오징어에도 생 야채에도 뿌리면 다 잘 어울리는 만능 소스다. 제주 살이가 내 인생에 만능 장비처럼 인생이 송두리째 바꾸거나, 갑자기 서울병이 완치되어 나는 자연인이라며 외치게 되지는 않았다. 다만 마요네즈를 실컷 먹고 빈 마요네즈 병을 채우고, 또 뒤집어보고 다시 채우면 된다는 생각은 하게 됐다. 도시에서는 도시에 맞게 제주에서는 제주에 어울리게 마요네즈를 먹을 수 있는 사람이 된 것 같다. 그거면 됐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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