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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ecilia de brunch May 14. 2020

[제주일기 35] 안녕 나의 제주 이웃들

Ⅴ. 다시 서울로

제주 살이 6개월 결산

 유배라며 징징거리고 제주에 온 지 6개월, 회사에서 서울 발령을 내주어 다시 서울에 갈 수 있게 됐다. 제주에 사는 짧다면 짧은 6개월간 인생에 굵직한 선택과 사건들이 많았다. 우선 결혼을 했다. 제주에 살면 장거리 연애가 힘들어 싸우다 헤어지거나, 남자 친구가 제주 도민은 안 되겠다며 도망을 갈 줄 알았는데 우리는 결합을 선택했다. 법적으로 공고화된 관계가 되어 섬녀와(썸녀 아님) 육지남의 사랑을 지키기로 했다면 조금 거창하고, 법적인 안전망으로 서로를 묶어두기로 했다 정도가 맞겠다. 제주에 간다는 위기가 결혼이라는 전환점이 되도록 유턴 신호쯤은 돼주었다. ‘제주에 내려가기 전에’를 계기로 양가 부보님을 뵙고, 식 날짜는 ‘날이 좋은 때’라는 전제 하에 일사천리로 가속페달을 밝은 페라리처럼 인생의 서킷을 빠르게 주파했다. 


 지난 7월에 제주 도민이자 서귀포 시민이 되고, 10월에 결혼식을 올리고 신혼여행을 다녀온 뒤 주말부부로 살았다. 함께 살지 않으니 여전히 연애하는 기분이었고, 결혼을 하긴 했으니 공개연애를 하는 느낌으로 제주와 서울을 오가며 살았다. 아마도 결혼생활에서 가장 찬란한 시절이 신혼이라 여겨 나를 서울로 발령을 내준 것 같았다. 그렇게 7개월을 살고 해를 넘긴 1월 말, 나의 제주 살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떠나려고 돌이켜보면 서울 타령을 했던 게 무색하게도 나는 제주에서 꽤 잘 지냈다. 아침에 일어나서 블라인드를 걷고 한라산과 꼭대기에 걸린 구름을 볼 수 있다는 특권의식에 사로잡혀 행복하게 살았다(?). 새소리와 앞집 강아지가 씩씩하게 짖는 소리는 도시에서 그리울 터였다. 연고 없는 제주에 민들레 홀씨처럼 혈혈단신으로 부임했을 때 뿌리를 내리고 살 수 있게 해 준 많은 것들이 있었다. 출근하러 현관문을 열면 복도 너머로 보이는 바다 한 접시, 차도 없는 나를 오며 가며 태워준 회사 선배들, 20분이면 막힘없이 도착하는 세상 가장 쾌적한 출퇴근길, 셀 수 없었다. 어딜 가든 널찍해서 슬쩍 갖다 대면 대세에 지장이 없는 주차 공간, 회사 울타리와 입구에 심어진 큼지막한 관상용 귤과 야자수, 회사 테라스에서 조망할 수 있는 수평선, 점심에는 차로 슝 달러 바람을 가슴에 품고 돌아올 수 있는 법환포구 나들이도 그리울 터였다. 퇴근하면 회사 동료들과 삼삼오오 모여 저녁식사를 하고 반주로 한라산 소주를 쨍쨍 부딪혀가며 먹던 날들도. 애정 하는 돼지 생갈비 구이집, 이자카야, 보말 칼국수 가게와 돼지고기 육수가 개운한 짬뽕 집도. 여름이면 서둘러 저녁을 먹고 나간 중문의 산책코스에는 바다와 하늘과 나무가 어우러져 제주의 아름다움에 매료된 저녁들까지, 떠나려니 언제 내가 이렇게 제주에서 (혼자) 살아볼 수 있었을까 아련했다. 


 서울로 보낼 짐을 또 한가득 싸고, 휑해진 집에서 마지막 밤을 보내며 생각했다. 여기에 있는 동안 나는 결혼도 하고, 승진도 했으니 실로 많은 축복할 일들이 생긴 좋은 추억이 깃든 집이었다. 풍수지리는 문외한이지만 집 뒷산이 한라산이라는 건 꽤나 든든한 지리적 구조였다. 사람에게도 에너지가 발산되듯이, 한라산에서 밀어주는 기운 덕에 인생의 가장 중요한 선택 중 하나라는 결혼을 좋은 시기에 할 수 있지 않았나 싶었다. 


 30년 넘게 도시에 살면서 도시는 단순한 생활환경이 아니라 하나의 습관이 되었기에 서울을 떠날 당시에는 불안감이 증폭됐던 것 같다. 서울에 대한 애착인 줄 알았던 감정은 갑자기 바뀔 환경 속에 낙오될 것만 같은 초조함의 다른 얼굴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바 선생님을 조우한 어느 날

 동네 주민 K양과 퇴근 후 쓰레기를 버리러 가기로 한 어느 여름날 저녁이 생각난다. 한 손에 쓰레기를 들고 현관문을 열었는데, 맙소사! 복도에 내 주먹만 한 바퀴벌레가 떡하니 버티고 있었다. “꺄아!!!!!!” 바 선생의 뒤꽁무니를 보는 순간 잽싸게 현관문을 닫았고, 그녀에게 계획이 어긋났음을 바로 알렸다. “나는 틀렸어. 부디 날 두고 가오…….” 나보다 아래층에 사는 그녀는 메시지를 받고 에프킬라를 가지고 올라왔으나, 바 선생의 위엄은 화학 액체 따위로 어찌할 수 없음을 직감했다. 바 선생은 제주의 속도에 맞춰 느릿느릿 천천히 복도를 산보하고 계셨고, 나는 오늘도 내일도 문밖을 나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공포에 떨고 있을 때, 우리 오피스텔의 홍 반장이자 유일한 남자 선배가 멋지게 나타나 종이 뭉태기로 바 선생을 가격했다. 나중에 듣기로 바 선생 몸집이 어찌나 큰지, 일격에도 쓰러지지 않아 줘 패고 뚜드려 패고 시체를 창밖으로 던진 이후에야 나는 눈물이 그렁그렁하며 밖에 나올 수 있었다. 그날은 정말이지 인간의 나약함과 지역 공동체의 위대함을 뼈저리게 깨닫고, 이웃의 정과 실천하는 정의(?), 윗물이 맑은 선배님의 따뜻한 마음씨를 역대급으로 느낀 날이었다. 나에겐 이렇게 사려 깊고 몸소 정의를 실천하는 멋진 이웃들이 있었다. 


 이제와 생각해보면 그날 바 선생님의 걸음 속도로 보건대, 그분은 외래종이 아니었나 싶다. 보통 샤샤샤샥하는 눈보다 빠른 바 선생의 발재간이 아니라 슬금슬금 양반의 걸음걸이와 같은 풍채가 돋보였달까. 보통 바 선생이었다면 복도 한쪽 끝에서 끝까지 순식간에 왕복을 하고도 남을 텐데, 그 분은 5층에서 홍 반장님이 몽둥이로 때리러 올 때까지도 그 자리에 계셨다. 후일담이지만 얼핏 날개 같은 것도 보였다고 했다. 마지막 날이 되니 우스운 에피소드들이 자꾸 떠올랐다. 인생이란 게 이런 에피소드 꾸러미를 사탕처럼 만들어 사람들과 까먹으며 사는 것이 아니던가.


 처음엔 어떻게 회사 사람들과 옆집 옆 옆집에 모여 사느냐며 인권과 프라이버시를 운운했는데, 나중에는 또 이게 은근한 안정감을 줬다. CCTV도 없는 제주 오피스텔에서 (CCTV가 있다 한 들, 감시나 관리를 해 줄 사람이 없음...) 행여 무서운 사람을 만나면 복도에서 꺄아 소리를 치면 누군가 한 명은 문을 열고 나를 도와줄 거라는 막연한 기대감이 있었다. 


 제주를 떠나려니 아쉬운 수 십 가지 이유 중에 청정 공기와 마음이 트이는 수평선, 달큰한 삼다수, 여름이면 마이애미를 방불케 하는 야자수와 보랏빛 석양, 하늘이 가득 보이는 낮은 건물들 같은 아름다운 환경적인 요인들도 있지만 가장 즐거운 기억은 이웃들 덕분이었다.  주변에 좋은 선후배들과 동료가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감사하며 살았던 6개월이었다. 차도 없는 나를 매일 회장님처럼 출퇴근길에 태워주시고, 저녁도 함께 챙겨 먹고 안부를 건네며 따뜻한 보살핌 속에 신나고 즐거웠다. 친구 없는 처지야 마찬가지라 누군가의 집에서 2차 3차 와인파티를 하던 날들, 서로의 귀가를 챙기며 안부를 묻던 이웃들이 나에겐 제주에 정착하게 해 준 뿌리고 땅이었다. 독립적인 여성으로 살고자 하는 나지만, 누군가에게 의지한다는 말이 제주에 살 때만큼 와 닿았던 적이 없었다. 좋은 사람들이 곁에 있어 무연고 섬에서 엉덩이 한 짝이라도 비비며 살 수 있었다. 사람들 때문에 제주를 떠나기 아쉬운 것과 같은 이유로 내 사람이 생겼으니 서울에서도 잘 살아봐야겠다.  



 안녕, 나의 제주. 

 안녕, 나의 제주 이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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