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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ecilia de brunch May 14. 2020

[제주일기 29] 겨울: 귤 못 얻어먹는 자, 헛살았다

 12월의 어느 날, 제주에 산지 10년이 넘은 회사 선배가 부서원들에게 귤을 한 움큼씩 나눠주며 말했다. “제주에 살면서 귤 못 얻어먹으면 나가 죽어야 해요.” 


 제주에 내려오기 전에 제주 탐방 프로그램으로 서귀포 시청을 방문했을 때 큼지막한 한라봉을 하나씩 나눠주셨던 일이 있다. 주먹보다 큰 한라봉을 손님에게 선뜻 나눠주는 모습이 여간 부티 나는 게 아니었다. 서울에서는 비싼 과일이라 한 개 사 먹을 때에도 귤이냐 한라봉이냐 저울질을 몇 번이나 했었는데, 처음 보는 손님에게 이 귀한 한라봉을 내어주다니. 그때 들었던 말이 “제주에 살면서 귤 사 먹으면 헛살았다는 이야기를 듣는다”였다. 아무래도 제주의 주 수입원이 귤이고, 귤 농사를 짓는 농가가 워낙 많으니 겨울이 되면 귤이 흔하다. 귤은 천지인데 사람이 없어서 귤 수확을 못한다는 말이 들릴 정도다. 귤이 넘쳐나서 여기저기 서로 나눠먹는 것이 겨울의 일상이다 보니, 귤 한번 선물 받지 못한 사람은 어지간히 인색하게 살았겠나 싶다.


 편의점에서 우유를 사도 아주머니가 귤을 한 개 손에 쥐어 주시고, 카페나 식당에서도 커피를 사도 입구에서 ‘유기농 귤-맛보세요’라고 한 상자씩 놓여있다. 귤을 얻어먹으면 나도 도민이 된 것 같아서 기분이 달았다. 반대로 선물 받은 귤을 다 먹고, 새콤한 게 먹고 싶어 마트나 시장에서 돈을 주고 귤을 사 먹으려면 그렇게 혀끝이 씁쓸했다. 귤 파시는 분이 나를 얼마나 쪼렙 도민으로 볼까, 인색하고 정 없이 헛산 도민으로 보일까 싶은 자격지심이 들어 장바구니에 담기 전에 자꾸 주저하게 됐다.


 반가운 소식은, 제주로 이전하니 회사에 귤 농장을 가업으로 하는 신입직원이 입사했다는 거다. 그녀는 농장에서 가져온 귤을 회사에 층마다 한 상자씩 나눠주었다. 맛보니 나도 좋아서 서울에 지인들에게 쉼 없이 한 상자씩 보냈다. 월급 받은 족족 귤을 사서 부모님, 친구들, 할아버지 할머니, 친척들에게까지 보냈다. 제주에 있는 사람이 줄 수 있는 가장 풍족하고 달콤한 선물인 것 같았다. 제주에 매년 믿고 주문할 수 있는 단골 귤밭이 생겼다는 것만으로도 기분은 1만 헥타르 귤 농장 주인이 부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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