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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ecilia de brunch May 14. 2020

[제주일기 28] 제주도 웨딩 스냅

흐리면 흐린 대로, 맑으면 맑은 대로

 제주에 가면 장거리 연애가 걱정이긴 했지만, 위기를 계기로 그를 유심히 지켜볼 심산이었다. 몸이 멀어졌다고 마음이 멀어지는 사이라면, 어차피 오래가지 못할 테니. 남자 친구가 제주에 오는 날마다 ‘참 잘했어요’ 스티커를 붙여 주고 적립여부로 미래 신랑 됨을 평가해보겠다는 허무맹랑한 계획이 나름 있었달까. 그런데 제주에 가게 되는 7월, 제주 이주를 계기로 서로의 부모님께 인사를 드리고 나니 얼떨결에 결혼식장을 예약하고 있었다. 제주도에 가면 장거리 연애를 하다 토라지고 싸우고 헤어지게 될 줄 알았는데, 전화위복이라고 해야 하나.


 사진기 앞에만 서면 표정이 엿보다 굳어지고 어깨가 굽어지는 탓에 스튜디오 웨딩 촬영은 싫었지만 그래도 하고 싶은 게 딱 하나 있었는데, 바로 제주도 웨딩 스냅이었다. 스튜디오에서 찍은 내 어색한 모습은 시간이 지나면 예쁜 척하는 내 모습을 스스로 봐주기가 어려울 것 같았지만, 그래도 제주도 자연을 배경으로 찍힌 사진은 대자연을 봐서라도 오래 봐줄만할 것 같았다. 나는 내 하얀색 원피스를 입고, 신랑은 신랑의 양복을 입고 찍으면 시간이 지나면 시간이 바랜 대로 추억으로 보기 좋을 것 같았다. 돈을 많이 들일 생각도 없어서 내가 고른 두 장소에서 두 시간 동안 촬영하는 곳을 30만 원 정도에 골랐다. 


 우리가 정한 촬영지는 백약이 오름과 김녕 해변. 아침에 일어나 얼굴에 대충 찍어 바르고 남은 건 신랑 얼굴에도 토닥토닥해주고 이른 아침부터 맥모닝 세트를 입에 밀어 넣어가며 제주도 스냅 촬영을 하러 갔다. 오름에서는 파란 하늘과 초록 오름이 어우러져서 대충 찍어도 꽤 근사한 사진이 나온다. 군데군데 퍼질러진 소똥 지뢰도 많고, 인기 오름에는 관광객들도 많지만 우리 사진작가 선생님이 능숙한 포토샵 스킬로 모든 장애물을 없애주신다. 


 촬영 예약을 한 날부터 가장 큰 걱정은 날씨였다. 날씨가 쾌청해야 파란 하늘과 오름이 어우러져 기대했던 멋진 사진이 나올 텐데, 기원하고 바란다고 될 일이 아니었다. 사진작가님께 혹시 촬영 당일에 흐리거나 비가 오면 어뜩하냐고 물어보니, 제주 날씨는 워낙 변덕스러워서 폭우가 쏟아지지 않는 이상 날씨 때문에 날씨 때문에 당일에 촬영 날짜를 바꾸긴 어렵다고 했다. 또 흐리거나 비가 오면 우산을 쓰고 찍는 사진도 나름의 운치가 있다며 걱정을 애써 달래주셨다.


 아니나 다를까, 촬영 날 아침 하늘이 희끄무레했다. 비가 안 오는 게 어디냐며 신랑이랑 위로를 했다. 작가님께 하늘을 파란색으로 포토샵을 해달라고 하자며 정신승리를 하고 하하 호호 웃으며 사진을 찍었다. 처음이지만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 모르므로. 거짓말같이 김녕 해변에 도착했을 땐 잠시 하늘이 해가 비추며 하늘도 바다도 본연의 푸름을 보여줬다. 메이크업도 셀프로 하고, 옷도 몇 년씩 입던 원피스라 하늘이라도 쨍하고 파랗길 바랐던 건데 다행이다 싶었다. 즐겁게 촬영을 마치고 돌아오면서 날씨 운이 좋았다고 말하다가, 문득 날씨 욕심을 부린 건 아닌가 생각이 미쳤다. 하늘이야 내가 결혼식을 올리든 웨딩 사진을 찍든 나체로 백약이 오름에 올라 망치 춤을 추든 알바인가. 햇볕에 그 날 기분이 정해지는 것이야 일상다반사지만, 날씨에 대해서만큼은 욕심 없이 흐리면 흐린 대로 맑으면 맑은 대로 또 그날의 분위기를 맞이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주에 살며 배운 것 중 하나가 오락가락하는 제주 날씨 장단에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아침에 비가 오고 점심밥 숟가락 뜨기 전에 맑아지고 다시 바람이 부는 날씨에 기분을 맞추면, 장단을 따라갈 수가 없다. 하늘을 자주 시야에 담을수록, 바다를 오래 지켜볼수록 날씨가 기대대로 되길 바라는 것만큼 헛된 욕심이 없다는 걸 배운다. 아쉬울 것 없이 흐린 날의 운치나 비 오는 날의 풀 냄새와 쨍한 햇볕을 쏘이며 사는 법을 배운다. 


 제일 기억에 남는 건 촬영 중에 지나가는 관광객들이 전혀 모르는 우리에게 건네준 “예뻐요” “행복하세요.” “잘 사세요”, 하는 응원의 말들과 따뜻한 시선이다. 당신들의 풋풋하고 아름다운 신혼을 떠올리며, 그 기억 속에서 따뜻함 한 스푼을 나눠주시는 듯했다. 예비 신랑도 나도, 이렇게 모르는 사람들도 응원해 주는 우리의 미래는 밝게 빛날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손을 더 꼭 잡았다. 우리도 나중에 웨딩촬영을 하는 커플들을 보면 산들바람에 응원을 실어 주기로 다짐했다.


 제주도에서 두 시간 동안 촬영한 사진으로 거의 결혼식을 했다고 봐도 무방했다. 사진은 개인 소장용으로만 간직하려고 했지만 결국 모바일 청첩장에도 넣었고, 급히 인화해서 포토 테이블에도 쓰고, 식전 영상에도 썼다. 제주가, 특히 백약이 오름과 김녕 해변은 우리의 시작점과 같은 상징으로 오래 기억될 것 같았다. 결혼생활에 흐린 날이 와도, 맑은 날이 찾아와도 푸르른 오름과 파랗게 빛날 해변처럼 살아야겠다는 결심도 오래 기억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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