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f everybody had an Ocean-비치보이즈 ♬
1960년대 미국 밴드인 비치보이즈 노래 중에 <Surfing USA>가 있다. 제목에서도 느껴지지만 미국 웨스트코스트 해변에서 수영복을 입고 파도를 타는 젊은이들의 낙천적인 감성을 담은 서프 뮤직을 소재로 삼았다-고 평론가들은 설명한다. 아무튼, 노래가 만들어진 시대만 생각하면 요즘 말로 탑골 오브 탑골, 아주 고인 물 중에도 상급 고인물이라고 놀림받겠지만 가사만큼은 밀레니얼들에게도 어필할 거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영화 OST로도 많이 삽입되어 어딘지 익숙한 멜로디다.
내가 좋아하는 가사는 첫 도입부에 나오는, ‘모두가 각자의 바다를 가졌다면’이라는 부분이다. 물론 전문 번역은 아니다. 뚱띠딩 뚜기디 딩딩딩-하는 기타 솔로 전주와 함께 노래는 이렇게 시작한다. 모든 사람들에게 미국 전역의 바다가 있다면, 캘리포니아처럼 다들 서핑을 할 텐데. 배기바지에 샌들을 신고, 부스스한 금발머리를 하고 미국 전역에서 서핑을 할 거예요.
If everybody had an Ocean Across the u.s.a.
Then everybody' d be surfin' Like californi-a
You'd seem 'em wearing their baggies Huarachi sandals too
A bushy bushy blonde hairdo Surfin' U.S.A
비치보이즈 노래를 들으면 하얀 백사장의 하와이나 말리부 같은 해변이 떠오른다. 가 본 적이 없어 단언하긴 어렵지만, 이 곳에서 젊은이들은 거의 홀딱 벗다 싶은 수영복을 입고 건강함을 과시하며 매일매일 서핑보드를 옆구리에 끼고 파도로 달려 나갈 것 같다. 바에는 은퇴 후 연금을 칵테일로 소진하는 노년의 할머니 할아버지가 나른하게 자리 잡고 있을 것 같다. 알록달록 야자수 티셔츠를 입고 칵테일과 맥주를 번갈아 마시며 서퍼들과 수평선을 바라보는 하루키 같은 아재가 바 마다 포진해 있을 것 같은 느낌이다. 걱정이 없어 걱정인 사람들이, 휴가 같은 일상에서 각자의 템포로 한껏 늘어져 있는 그런 해변이 자꾸만 생각나는 노래다.
제주에 있으면서도 비치보이즈 노래가 종종 떠올랐다. 걱정과 근심은 있고, 과시할 만큼의 젊음이나 하와이안 티셔츠도, 연금도 없지만 눈을 돌리면 바다가 있었다. 회사에서는 칸막이로 막힌 내 자리에서도 고개만 90도로 돌리면 창밖에 바다가 보이고, 테라스에 나가도 바다를 마주 볼 수 있었다. 오피스텔 방에서는 안보였지만 문을 열면 복도 밖으로 먼바다가 눈에 들어왔다. 점심 먹으러 회사 인근을 돌아다니다가도 문득 어디에든 있는 바다가 시야의 모서리 끝에 걸렸다. 그랬다. 제주에는 내 몫의 바다가 있었다. 여름에는 햇살이 반사되어 비늘이 반짝이고, 겨울에는 파도가 들썩이는 매일매일 매 순간 다른 바다였다. 서핑을 하며 파도를 타지 않아도, 도처에서 바다를 소비하고 향유할 수 있었다.
처음 제주에 내려갈 때, 머리에는 숲을 마음에는 바다를 품고 살자고 생각했다. 낯선 환경에 대한 스스로의 다짐이자 위안이었다. 다행히 바다를 향한 갈망과 목마름은 지치지 않았다. 생각해보면 나는 서핑 보드가 무서워서 한 번 파도를 타 본 이후에는 서핑을 접었다. 바다 수영을 하고 나면 몸아 짠내에 절여져서 바다가 보이는 수영장을 선호한다. 그럼에도 바다 타령을 하는 걸 보면, 내가 사랑하는 바다는 하늘과 바다가 맞닿는 수평선이었던 것 같다. 하늘이 없는 바다는 글쎄, 바다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바닷물을 손으로 한 움큼 뜨면 소금물이고, 바닷물을 떠서 큰 공간에 담아도 그곳은 수영장이지, 바다는 아니다. 수평선은 아무리 바라봐도 닿을 수가 없다. 그곳이 어디든, 무한대로 뻗어나가 미지의 영역으로 시선을 확장한다. 내가 닿을 수 없는 곳, 시야 너머의 어딘가. 바다를 볼 때면 늘 바다 건너 다른 세상이 상기됐다. 물론 그럴 일은 없겠지만, 뗏목이든 나룻배든 노를 저어 바다를 타고 이대로 직진하면 그레이트 베리어 리프를 지나 호주에 도착하고, 그전에 방향키를 돌리면 비치 보이즈의 웨스트코스트에도 닿을 수 있으니. 바다 건너 일본에도 호주에도 보라보라 섬에서도, 각자의 일상과 삶은 계속되고 있다고 생각하면 내 몫의 하루와 내 몫의 바다면 족하다는 안도감이 든다. 언젠가 다른 삶을 찾아 바다를 건너갈 수도 있다. 바다는 모두 이어져 있으니, 작은 섬에서의 하루와 먼 미래를 그리는 동경이 수평선처럼 교차한다.
비치보이즈 노래 가사 ‘have an ocean’를 직역하면 ‘바다를 가지다’고 정확한 의미로 풀자면 ‘미국 바다 가까이에 산다면(If everybody had an Ocean Across the u.s.a.)’일 것이다. 바다는 소유의 대상이 아니고 가질 수도 없으니 말이다. 철학자 에리히 프롬이 들었다면 현대 소비사회에서 ‘가지다(have)’라는 동사를 여기저기 갖다 붙인다고 분노할 일이다. 내 몫의 바다라고는 했지만, 바다는 내 몫을 준 적도 없고 누구의 몫이라고 할당되는 대상도 아니다. 출근하는 길에 좁은 집을 나와 복도에서 바다를 흘끗, 일 하다 답답하면 고개를 돌려 바다를 한 번, 점심 먹고 커피 한잔 마시며 설탕 대신 바다 한 조각, 그거면 족하다. 내 것이라고 깃발을 쳐서 소유권을 주장하지 않아도 늘 내 것으로 눈에 담을 수 있는 광활함이 제주에는 있다. 내가 갖는 바다는 그랬다. 마지막 문장은 바다를 사랑한 작가 까뮈의 산문집으로 대신하려고 한다.
나는 언제나 난바다에서, 위협을 받으며, 당당한 행복의 한 복판에 살고 있는 기분이었다.
<가장 가까운 바다-항해일지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