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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인과 촌장 Jul 11. 2021

귀농 결심, 그때 우리는 용감했다

    

우리만큼 용감한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 그래

흔히 귀농이라고 하고, 때로 귀촌이라고도 하지요. 귀농이라고 하면 농사를 업으로 하기 위해 시골살이를 시작하는 것이고요, 귀촌이라고 하면 시골에서 살기는 살되 농사를 업으로 하지 않는 경우를 말해요.     

많은 도시 사람들이 꿈꾸는 귀농은 귀촌에 가까울 거예요. 공기 좋고 경치 좋은 시골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텃밭에 채소를 키우고 마당에서 자란 과일나무 열매를 따 먹으며 잔디밭에 내놓은 야외 의자에 앉아 커피 한잔하려는 그런 작은 소망 말이지요.     

우리 가족은 농사로 돈을 벌어 생활하고, ‘농부’를 직업으로 삼으려고 십 년 전에 귀농을 했어요. 시골에서 농사짓고 살아야겠다는 생각은 저와 남편이 결혼할 때부터 했었지요. 우리 둘 다 시골살이에 대해 대단한 환상을 가지고 있던 건 아니에요.

그럼에도 농사를 업으로 삼겠다고 생각할 수 있었던 건……, 아이러니하게도 둘 다 농사를 지어 보지 않았기 때문일 거예요. 둘 다 도시에서 나서 자랐고 부모님들도 젊은 시절 도시로 나와 일을 했기 때문에 농사를 짓지 않았어요. 물론 부모님의 부모님들은 시골에서 농사를 짓고 살았으니 어릴 적 할머니 집에 놀러 가서 보고 들은 시골에 대한 얕은 기억은 있지만요.     

아마 그래서 가능했을 거예요.

농사일이 얼마나 힘든지, 농사지어 돈을 번다는 건 또 얼마나 더 힘든지를 잘 몰랐던 거지요.

그래서 둘은 용감하게 시골살이할 생각을 할 수 있었어요.

하지만 우리가 시골살이를 정말로 결심하게 된 데에는 다른 더 중요한 이유가 있답니다.    



       

이렇게 살고 싶지는 않아!

우리 부부는 둘 다 젊은 시절 서울에서 직장 생활을 했어요. 결혼하기 전에 저는 서울 연신내 지하철역에서 걸어서 20분 거리에 있는 낡은 빌라 반지하 방에 살았고, 남편은 지하철역에서 걸어서 25분 거리에 있는 옥탑방에 살았어요. 아직도 저는 반지하 방에서 나던 눅눅한 곰팡이 냄새가 잊히지 않아요. 남편은, 여름엔 녹아내릴 듯하고 겨울엔 얼어 터질 듯한 옥탑방 공기를 기억하고 있겠지요.

그러다 둘이 결혼해서 빌라 1층에 전세를 얻었는데, 정말로 ‘여기가 천국이구나.’ 싶었답니다.

뭐 그렇게 그렇게 지방에서 상경한 가난한 직장 초년생들은 다른 직장인들처럼 열심히 일하고 돈을 벌었지요.

결혼하고 2년쯤 지나 아이를 낳았고 3개월 육아휴직이 끝난 뒤 회사에 다시 출근하면서, 돌도 지나지 않은 갓난쟁이를 동네 아줌마한테 출근할 때 맡기고 퇴근할 때 데려오는 생활을 몇 달 하게 됐어요. 둘이 돌아가면서 당번을 정해 오늘은 내가, 오늘은 당신이 일찍 퇴근해서 아이를 보는 걸로 했는데, 직장 일이란 게 그렇게 되나요?

매번 둘 다 퇴근이 늦어지니 우리는 우리대로 애가 타고, 애를 봐주는 아줌마는 아줌마대로 안 되겠다 싶었는지 애를 못 봐주겠다 하더라고요. 결국 6개월이 갓 지난 아이를 대구에 있는 친정에 데려다 놓고 한 달에 한두 번 주말에 아이를 보러 가게 됐어요.

한번은 몇 주 만에 아이를 보러 갔더니 아이가 우리를 보고 멀뚱멀뚱 쳐다보는 거예요. ‘이 사람들은 누구야?’ 하는 표정으로요.

그날, 서울로 올라가는 기차 안에서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행복해지려고 돈을 버는 거잖아. 그런데 지금 이게 뭐지?’

그때 “안 되겠다!” 하고 다짐했어요.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되겠다, 그런 다짐요. 

행복보다 돈이 먼저가 되어 버리는 삶, 거대한 도시에서 내가 왜 무엇을 위해 일하는지도 모르는 채 남들과 같은 삶을 향해 달려가는 삶, 계속 경쟁하고 남을 이기거나 눈에 보이는 성과를 내야 하는 삶을 살아서는 안 되겠다, 그런 다짐을 하면서 시골살이에 대한 소망을 더 굳히게 된 것이죠.

그 소망을 현실로 얼른 옮겨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좀 더 서두르게 된 건 아이가 자라면서 또 다른 이유가 생겼기 때문이에요.          




이렇게 키우고 싶진 않아!

아이와 떨어져서 서울에서 직장에 다니던 우리 부부는 마침내 아이와 함께 살기로 결심했어요. 한꺼번에 둘 다 사표를 냈고 고향인 대구로 내려왔지요. 대구로 내려올 때는 얼른 서둘러서 귀농할 생각이었어요. 

하지만 마음만 가득했지, 귀농할 땅을 알아본다거나 어떤 농사를 지어 보겠다거나 하는 준비를 하진 못했어요. 대신 프리랜서로 하던 일을 하거나 지역 운동을 했어요. 당장 귀농에 덤벼들 간절한 이유나 아주 강렬한 계기가 없었던 것 같아요. 

그러는 사이 어영부영 아이는 자랐고, 둘째가 태어났으며 큰아이가 학교에 입학할 나이가 되었어요. 

그런데 말이에요. 도시에서 아이를 키우는 일이 우리 부부에게는 큰 고민으로 다가왔어요. 대한민국 사회를 관통하는 단어들, 능력주의, 성과주의, 경쟁과 차별, 빈익빈 부익부, 양극화 같은 것들이 아무런 의심이나 비판 없이 적용되는 분야가 바로 ‘교육’이었어요. 더 좋은 세상을 만들겠다며 뛰어다니던 사람들도 학부모만 되면 ‘내 아이가 공부를 잘해서 성공했으면 좋겠다’는 욕심으로 이것도 가르치고 저것도 가르치고, 이 상도 받아 오고 저 상도 받아 오게 하고, 옆집 아이보다 더 잘 나가길, 윗집 아랫집 아이보다 더 뛰어나길 바라며 1등과 명문대를 바라보며 달려가더라고요. 

아파트 상가 안 학원 복도에서, 복작복작한 학교 교문 앞에서, 누군가의 아파트 안방 안에서

엄마들이 모여서 하는 이야기를 몇 번 듣고 나서는 ‘산이는 영어 학원 보내지 않는데 괜찮을까? 수학 학원은 내일 한 번 알아봐?’ 하고 고민하는 내 모습을 보고는 깜짝 놀랐습니다.

다행히 우리가 사는 동네에는 많은 시민단체와 관련 활동가들이 활발하게 일하고 있었어요. 덕분에 산이는 문자 교육보다 자연 속에서 뛰어노는 걸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어린이집에 보낼 수 있었고, 초등학교도 학부모들끼리 작은 학교 살리기 운동을 벌였던, 동네에서 20분 거리에 있는 시골 작은 학교에 보낼 수 있었어요. 

학교 공부에 시달리지 않고 마음껏 놀기, 학원 엘리베이터보다 학교 운동장 땅을 더 많이 밟기, 친구들과 경쟁하지 않고 함께 놀기.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더 늦추지 말고 시골로 가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시골의 학교가 모두 그럴 것이라고 생각하진 않았지만 아파트보다는 논밭이, 학원보다는 학교 운동장이, 수천 명의 전교생보다는 전교생 이름을 모두 욀 수 있는 작은 학교가 좋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러니까 마음속으로 꿈꾸던 귀농을 몸으로 실행하게 한 결정적인 동기는 ‘교육’ 문제였어요.

그리하여 2011년부터 남편은 아는 분 소개로 대구 바로 옆에 있는 경북 고령이라는 곳에서 농사를 배우러 다니기 시작했어요. 일 년 후 2012년 겨울에 온 가족이 이사를 하게 되었고, 그렇게 우리 가족은 시골살이를 시작했어요. 그렇게 우리 부부는 십 년 전 어느 날, 농부가 되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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