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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인과 촌장 Jul 11. 2021

귀농 일 년, 맨땅에 맨몸으로

농사도 모르는 것들이 땅 한 평 없이 무슨 농사를 짓겠다고

우리가 귀농한다고 했을 때 다들, 원래 고향이 거기냐고, 부모님들이 농사짓고 있는 곳에 들어갔냐고 물어봐요. 하지만 우리는 시골이나 농사와 관련된 게 하나도 없었어요.

지금 생각하면 정말 겁도 없었구나 싶지만, 그때만 해도 ‘그런 게 뭐 중요해? 농사짓겠다는 마음이 중요한 거지!’ 하고 생각했답니다. 열정만 차고 넘쳤던 거지요.      

부모님 농사를 물려받았냐고요? 아니오, 시댁과 친정 부모님 모두 젊을 때 돈 벌러 도시로 나와서 도시에서 쭉 살아온 분들이니 물려받을 땅이며 농사는 아예 없었어요.

그럼, 고향으로 들어간 거냐고요? 그것도 아니에요. 남편이나 저나 모두 도시 변두리에서 태어나 자랐고요. 양가 부모님 고향이 시골이긴 하지만 집 한 채 남아 있는 게 없었어요. 

귀농할 곳으로 선택한 고령에 아는 사람이라도 있었냐고요? 남편이 생협 활동을 하다가 알게 된 분 소개로 대구에서 가까운 고령에 땅을 알아보게 된 것일 뿐, 거기에 친척이든 친구든 아는 사람도 한 명 없었어요.

그렇다면, 예전에 농사와 관련된 일이라도 했냐고요? 전혀요. 남편과 제가 젊어서 해 온 일은 책상에 앉아서 머리 굴리는 일이었으니 농사뿐만 아니라 몸을 움직여 뭔가를 길러내거나 돌보는 일하고는 아주 거리가 멀었지요.

그러니 우리에게는 귀농이 ‘歸(돌아갈 귀) 農(농사 농)’이 아니었어요. 돌아가야 할 땅이나 고향 같은 것도 없었고, 시골에서 사는 것과 농사를 짓는 것도 태어나서 처음으로 해 보는 일이었으니까요. 그야말로 맨땅에 들어가서 맨몸으로 농사짓기! 그것이 우리의 귀농이었어요.       



 

  

농사가 세상에서 가장 착한 일이라는 생각

믿을 만한 구석 하나 없으면서 그렇게 생뚱맞게 귀농이란 걸 해 버렸어요. 우리 부부는 둘 다 그리 용감한 편이 아닌데,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귀농에 있어서만큼은 참으로 용감했던 것 같아요.

누가 시켜서 하는 일 말고 내가 신나서 하는 일, 

하면 할수록 마음과 몸이 지쳐가는 일 말고 마음이 채워지고 몸이 건강해지는 일, 

일과 놀이와 삶이 동떨어져 있지 않은 일, 

내게 스트레스가 되고 남에게 해가 되는 일 말고 내게도 보람되고 남에게도 이로운 일, 

가족이 함께 할 수 있는 일, 

나이 들어서도 할 수 있고 앞으로도 없어지지 않을 일, 

우리 가족이 먹고살 수 있을 만큼 돈을 벌 수 있는 일. 

바로 그 일이 ‘농사’라고 생각했어요. 

세상에서 가장 착한 일이 농사라고 생각했고, 그 일을 하며 잘 살아가겠다 결심한 거지요.

그렇게 해서 연고도 없는 곳에 땅도 빌리고 집도 빌려서 온 가족이 이사를 했지 뭐예요.     



땅도 빌리고 집도 빌리고

물려받은 땅이며 집이며 아무것도 없으니 우리는 모두 다 빌려야 했어요.

먼저, 땅 900평을 아는 분 소개로 빌려서 처음에는 남편 혼자 왔다 갔다 하면서 농사 준비를 시작했어요. 그러다가 동네 이장님께 빈집이 있으면 좀 소개해 달라고 했더니 마침 이장님이 살고 있는 집을 세 놓으려고 한다고 해서 운 좋게 이사를 들어갈 수 있게 되었어요. 그때가 2012년 11월이었어요.

900평 밭에는 무화과 묘목을 심었어요. 900평이면 농사짓기에 정말 작은 면적인데, 감자나 양파 같은 일반 밭작물을 심어서는 한 해 몇백만 원 벌기도 힘들다고 하더라고요. 논농사는 몇만 평쯤 돼야 수익이 난다고 했고요. 그래서 당시 농업기술센터에서 딸기를 대체할 고소득 작물로 무화과를 추천해서 심게 됐어요. 무엇보다 친환경 농사를 지을 생각이었는데 무화과가 병충해 피해가 별로 없다고 해서 우리가 하기에 딱 알맞다고 생각했던 거예요. 

고령은 오래전부터 딸기 재배로 유명했는데, 그때만 해도 딸기 농사를 많이 접으려고 하던 때였어요. 왜냐하면 딸기를 딸 때 하우스 안에 깊게 파놓은 골을 따라 쪼그리고 앉아서 딸기를 따야 하는데, 그 일을 할 수 있는 할머니들이 나이가 들거나 돌아가셔서 일할 인력이 없었거든요. 지역의 농업기술센터에서 딸기를 대체할 작물로 무화과를 키우고 있었던 그 찰나에 저희가 귀농을 했던 거였어요. 그런데 웃기게도 지금은 다시 딸기 농사가 대유행이에요. 일이 년 후부터 딸기 고설 재배 방식이 도입되면서 쪼그려 앉지 않고 서서 딸기를 딸 수 있게 되었고 허리 구부러진 할머니들 대신 젊은 외국인 노동자들이 그 일을 대신하게 된 거지요.

하여튼 땅이며 집이며 작물이며 타이밍도 맞아야 하고 운때도 있어야 해요. 그게 운이 좋았던 건지 운이 안 맞았던 건지는 두고 봐야 알 수 있는 일이기도 하고요.     

집만 해도 처음에는, 방이 세 개나 되고 화장실이 안에 있는 집을 운 좋게 잘 얻었다 싶었어요. 집을 구하려고 대여섯 군데 동네 집을 구경했는데, 방이 세 개 있는 집은 아예 없었고, 구경했던 집 중에 반은 화장실이 밖에 있었거든요. 

그런데 이사하자마자 그 집에서 아주 혹독한 겨울을 보내야 했어요. 난방이 잘 안 되어 벽으로 바람이 숭숭 들어오는 건 둘째치고, 난방 방식이 무려 연탄보일러! 그러니까 새벽과 저녁마다 밖에 나가 연탄을 여덟 장씩 갈아주어야 했어요. 연탄보일러 통이 깊어서 연탄 갈다가 연탄가스에 중독되는 것 아닌가 겁도 났고, 패딩점퍼 세 개나 소맷부리를 태워 먹었어요. 뭐, 그 정도는 ‘엄마 아빠 어릴 적에’ 시절을 체험했다 생각하고 나름 견딜 수 있었지만 도저히 견딜 수 없었던 건, 한겨울에 보일러가 두 번이나 터져 버린 일이랍니다. 

전기장판에 열풍기를 있는 대로 틀어 놓고 내복에 패딩을 껴입고 발을 아무리 동동거려 보아도, 집 안이 바깥보다 더 추우니 눈에서 눈물인지 고드름인지가 맺히더라고요. 보일러 터졌을 때 바로 보일러 기사를 부르면 좋겠는데, 집주인인 이장님은 보일러 회사 고객서비스센터를 이용하면 돈만 비싸다고 동네 아는 동생을 부르겠다고 하고, 보일러 수리 전문가도 아닌 그 동생은 자기 바쁜 일 다 끝내고 오겠다고 하니 보일러 두 번 터졌을 때마다 이틀, 삼일은 그냥 얼음동굴이 되어 버린 집에서 와들와들 떨어야 했어요.

그때 열한 살, 다섯 살이었던 두 아이가 “엄마, 너무 추워요!” 하면서도 떼쓰지도 않고 울지도 않고, 시골에서 맞닥뜨린 첫 겨울을 시리게 보냈어요. 

지금 생각하면 초등학생 큰아들, 유치원생 둘째 아들 모두 어린 나이에 갑작스럽게 집도 바뀌고 학교랑 어린이집도 바뀌고 친구랑 헤어지고 하는 과정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싶어요. 그때는 엄마 아빠 마음만 앞선 채, 아니 고집만 앞선 채 아이들이 겪을 혼란과 어려운 적응 과정을 세심하게 살필 겨를도 없었던 것 같아요. 그저 미안하고 고마울 뿐이에요. 

그래도 첫해였으니까요, 모든 게 처음이니까 다 낯설고 그래서 힘든 거라고, 모르고 어색한 농사일도, 춥고 불편한 집도 조금씩 나아질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그 낯선 시간을 견딜 수 있었던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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