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하기 싫은 날
귀농 삼 년째 겨울에 애호박 농사를 처음으로 시작했어요. 무화과 농사를 끝내고 하느라 그해 11월 즈음에 다른 하우스보다 늦게 애호박 모종을 심었지요. 무릎 꿇고 조심조심 애호박 모종을 어르고 달래듯 키웠고, 모종이 여린 줄기로 자라고 작은 꽃을 피우고 나서야 유인줄에 매달 만큼 애호박들이 자라났어요.
그리고 몇 달 동안 꽃은 노랗게 피고 지고 열매가 달리고 자라고 커졌어요. 날마다 애호박이 자라는 동안 줄기에 달리는 집게발도 떼 주고, 유인줄도 내려주고 인큐 봉지도 끼워 주고, 수정도 해 주어야 했지요. 그렇게 날마다 시간은 지나고 애호박들은 잘 영근다고 끝맺고 싶지만, 실은 그렇지 않을 때가 더 많았어요.
날마다 반복하는 작업을 하면서 멀쩡한 새끼 애호박을 손끝으로 날려 버리기도 하고, 유인줄 내리는 작업이 늦어져서 줄기가 휙 꺾이기도 하고, 인큐 봉지 속에서 빵빵하게 잘 자란다 싶었던 애호박들이 쩍쩍 갈라져 나오기도 했어요. 하지만 이런 일들은 그냥 큰일이라 할 수도 없는 일상적인 것들이에요.
겨울 끝 무렵부터 애호박 엉덩이 부분이 둥글게 잘 크지 않고 뾰족하게 자라다 성장을 멈추는열매들이 하나씩 생기기 시작하더니 3월 중순 무렵에는 결국 애호박 출하량이 반으로 뚝 줄어들어 버렸어요.
남편은 일하다 말고 장갑을 벗어 던지고 아무 말 없이 트럭을 타고 나가 버렸어요.
저녁때가 돼서야 집에 들어온 남편한테 ‘농사일 참 쉽지 않네.’ 하고 위로인 듯 푸념인 듯 한마디 해 주는 것 말고 해 줄 말이 없었어요. 농사일이 늘 잘 될 수 없고 늘 좋을 수만은 없는 거라는 걸 잘 알고 있지만 그래도 힘이 죽죽 빠지는 날이 있어요.
애호박이 이상하게 자라는 원인은 책 찾아보고 인터넷 뒤져 보고 애호박 농사 선배들한테 물어보고 해서 겨우겨우 원인을 찾아 냈지만 제대로 열매 맺기까지 시간이 걸렸어요.
속상할 때도 있고 일하기 싫은 날도 많지만 그렇게 시간이 흘러 호박도 자라고 사람도 자란다다고 생각하며 그 시간들을 그럭저럭 견뎠던 것 같아요. 그 시간들도 지금 와서 다시 보니 제법 촘촘했네요.
2015년 6월 어느 날 일기 _ 그저 자라는 건 하나도 없지
파이프만 꽂혀 있는 빈 하우스에는
꺾꽂이한 무화과 가지들이 촘촘히 들어차 있다.
목마르지 않을까 물도 주고
어린싹이 제대로 나오려나 들여다봐 줘야 한다.
하우스 속 무화과들은 벌써 쑥쑥 자라나 있다.
지난해 댕강댕강 잘라둔 가지에서
새순이 나서 뻗은 가지들이 아이 키만큼 자랐다.
날마다 키가 크고
줄기가 굵어지고
빛깔도 짙어진다.
아직 작고 단단한 연둣빛 무화과 열매가
한두 달 뒤면 빨갛게 익을 것이다.
햇빛을 보고 바람을 맞고 물을 먹으며
무화과들이 그렇게 쑥쑥 자라는 것 같지만
그저 그렇게 되지는 않는다.
햇볕이 쨍쨍 내리쫴서 숨이 턱턱 막히는 것 같은 날에도
제 맘대로 올라오는 가지들을 솎아 주려고
하루 온종일 하우스 안에서 일을 해야 하기도 하고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지는 날에도 하우스 안팎을 뛰어다니며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되어
무화과들이 잘 자라게 하기 위한 시설을 돌보아야 하기도 한다.
세상 모든 것이 다 그렇듯
저절로 그렇게 되는 건 하나도 없다.
그만큼의 정성과 보살핌으로 자라고 이루어지는 것.
세상 모든 일 가운데서 남달리 농사일이 더욱 그러한 것.
덧붙인다면,
그 정성과 보살핌은 때로는 지지부진하고 짜증나며 혼자서는 도저히 해결이 안 되는
여러 순간순간을 견디는 일이기도 하다.
오늘 저녁 무화과 하우스의 이중 비닐을 걷어내려고 하는데
파이프에 비닐이 두 방향으로 꼬인 채 감겨서 풀어지지 않는 거다.
남편은 하우스 안에서 “돌려! 반대로!”를 외치며 비닐을 이리 풀었다 저리 풀었다 하고
나는 하우스 안에서 하우스 문 열고 닫는 개폐기를 이리 돌렸다 저리 돌렸다 하다가 한 시간을 훌쩍 넘겼다.
어느덧 해는 지는데 갑자기 바람은 세지고 소나기가 몰아친다.
안 되겠다 싶어 급하게 블루베리 농사짓는 남호 씨를 불러서 비닐을 계속 풀어보다가
결국엔 가위로 비닐을 잘라내야 했다.
어쩔 수 없이 올겨울에 이중 비닐을 또 새로 사야 하게 생긴 거다.
세상 일이 저절로 이루어지고
모든 일이 술술술 잘 풀리면 좋겠지만
늘 그만큼의 수고로움을 감당해야 하는가 보다.
2015년 6월 어느 날 일기 _ 같이 놀아주지 못해 미안해
지난번에 상토에 심었던 땅콩 씨앗이
씨앗을 톡 쪼개고 날개 펴고 솟구쳐 오르듯
어린잎들을 키워 냈다.
웃자라기 전에 얼른얼른 옮겨 심어야지.
마침 비가 촉촉 내렸다 말았다 하던 날,
땅콩 모종을 심는다.
키워서 시장에 내다 팔 것도 아니지만
넉넉히 심어서 여기저기 나눠 주면 좋겠지.
마음은 그러한데 마음만큼 속도는 나지 않는다.
이틀 동안 짬짬이 모종 다 심어 놓으니 마음이 후련하다.
그런데 뒤돌아서니
지난번에 심어 놓은 고구마들 둘레에
잡초들이 소복하구나.
요놈들은 또 언제 다 뽑아 주나.
결국 산이와 솔이까지 동원!
재량휴업일에 학교에서 운영하는 돌봄교실에도 보내지 않고
갖가지 회유와 협박으로 밭으로 데리고 나왔다.
산이는 잡초 뽑고
솔이는 흙 채우고
재보다는 잿밥에 더 마음이 가 있는 산이와 솔이.
산이와 솔이는 노는 게 좋다!
종일 쪼그리고 앉아 일하는 것보다야
집 마당에 달린 오디 따먹으며 놀고 싶고
아빠랑 야구나 실컷 하고 싶은 게 당연하지.
많이 같이 못 놀아줘서 미안해.
그래도 가끔은 산이 솔이 소원을 들어주기도 하잖아.
태어나서 처음으로 야구장에도 가 보고 말이야.
엄마는 이렇게 생각해.
일하는 것, 공부하는 것, 노는 게 따로가 아니라고.
일하는 게 가장 큰 공부이고
일하다가 노는 게 가장 신나는 거라고. 중요한 건 뭐든 즐겁게 하는 것!
엄마도 아빠도 산이도 솔이도 모두 힘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