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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현정 Jan 30. 2023

버리지 못하는 신발들 1

“모름지기 겨울은 날이 차가워야 제맛이지.”


달뜬 목소리와 함께 쏟아져 들어오는 환한 불빛 그리고 코끝이 시큰해지는 찬 바람. 그리고 번쩍 들어 올려진 나는 바닥 타일 위에 사뿐히 놓였다. 너무나도 갑작스러워 마음껏 환호성을 지르지도 못했다. 아, 이게 얼마만의 외출인가. 기억조차 가물가물하다.


내 자리는 신발장 맨 위 칸이다. 가끔 문이 열리면 멀리 안방까지 훤히 내다보이는 나름 명당이다. 이 집으로 이사 온 날, 그녀는 잠시 나를 바라보며 한숨을 쉬더니 닿지 않는 높이의 선반에 깨금발로 용을 쓰며 굳이 나를 올려놓았다. 첫 한 해는 문이 열릴 때마다 기대를 품었다. 하지만 그 기대가 낙담으로 그리고 포기로 옮겨가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가끔 문이 오랫동안 열려있어 온 집안을 둘러보는 기쁨을 얻는 날이면 곧 계절이 바뀌리라는 것을 알아차리곤 했다. 털이 복슬복슬한 신들이 다시 선반 한자리를 차지하고 날렵한 선을 자랑하는 샌들이 눈빛을 반짝이며 현관 바닥으로 진출했으니까. 그러다 또 쏟아지는 전등불과 함께 지친 샌들이 들어오고 도톰한 운동화들이 팽팽하게 부푼 마음으로 신발장을 나가곤 했다. 하지만 맨 위 선반을 차지한 나는, 언제나 그 자리에 4년째 놓여있다. 그동안 내 옆자리에는 회색 그리고 보라색 운동화가 새로 들어와 자리를 잡았다. 사실 우리는 버리는 편이 더 어울릴지도 모르는 낡디 낡은 운동화 들이다.


나도 한때 여자의 딸이 쏟아붓는 사랑을 듬뿍 받으며 빳빳한 자태를 뽐내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채 일 년의 시간도 지나지 않아 이곳저곳 천은 얇아지고 새하얗게 빛나던 날렵한 로고는 벗겨지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후줄근한 몰골. 아마 그즈음이었을 것이다. 나는 여자의 운동화가 되었다. 여자는 날이면 날마다 나를 신고 집을 나섰다. 다른 신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나는 새로운 여자의 사랑을 받고 있음에 마음이 한껏 부풀었으나, 현관 바닥에 질펀하게 풀려나는 수다들은 금방 진실을 알게 해 주었다.


“착각하지 마. 그냥 아무도 안 신고 구석에 밀려나 있으면 그때부터 엄마 신발이 되는 거야!”

“맞아. 내가 여기 현관에 입성한 지 벌써 2년이잖아? 엄마가 신발을 새로 사는 건 한 번도 못 봤어.

”게다가 엄마가 현관에 나올 때 봐. 아무 고민도 없어. 그냥 어제 벗어둔 신발을 그대로 다시 신는다니까. 아마 현관에 무슨 신이 있는지도 모를걸?”

“그래도 예전엔 결혼식도 가고 해서 가끔 신발장 안에 있는 구두랑 만나기도 했는데, 얼굴 본 지 일 년도 더 된 것 같아. 그치?”

“맞아. 너 전에 신었던 보라색 운동화 기억 안 나? 걔는 정말 6개월이 다 되어가도록 한 번도 빨지도 않고 혹사당하다가 실밥이 터지더니 겨우 쉬러 갔잖아.”

나도 모르게 작아진 목소리로 물었다.

“그래도 버리지도 않고 나를 다시 신는 것 보면, 내가 무척 마음에 드는 것 아닐까?”

“그런 것 없다니까. 엄마는 안.버.려!”

“……”


4년 만에 나를 꺼내 눈앞에 올려두고서 여자는 계속 고개를 갸웃거린다.

‘버리지 마요.’

애타는 내 마음의 소리를 들었을까. 그녀는 나를 바닥에 놓고 신더니 거울에 앞뒤 모습을 비춰보곤, 현관을 나선다. 겨울에 신기엔 내가 좀 얇지 않을까 잠시 마음이 쓰였지만, 그래도 기분이 좋았다. 아파트 안을 한 바퀴 돌고 올라온 잠깐의 외출이었지만 녹지 않은 눈이 차갑게 스며드는 것마저도 썩 좋았다. 가만히 올려다보니 여자도 기분이 좋다. 그런데 집에 돌아온 그녀는 신발장을 열고선 구석구석 들여다본다.


‘무얼 찾는 걸까?’

“아, 여기 있다.”

‘세상에. 저 신은 도대체 뭐지?’


여자는 뒤축이 다 빠진 구두를 한 켤레 꺼내 든다. 세상에 나온 지 십 년도 훨씬 더 되어 보이는 구두를 들여다본다. 그러더니 구두 뒤축을 바닥에 탁탁 두드리더니 오른쪽만 신어 본다. 이리저리 맞춤해 보는 걸 보니 아무래도 신을 다시 고칠 수 있나 가늠해 보는 모양이다. 한참을 혼자 서성이다 가지런히 구석에 세워두고 집으로 들어간다.


"버려도 아무도 안 주워 갈 것 같은데. 참, 어지간히 못 버린다니까."

“아무것도 모르면서 말 함부로 하는 것 아니다.”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리니 구두가 나를 바라보고 있다.

“속으로 생각한다는 게 그만, 죄송해요.”

“됐다. 내가 낡긴 했지. 엄마는 아마 날 쉽게 버리지 못할 게야. 그날 제법 오래 힘들어했거든.”

“네? 그날이요? 무슨 일이 있었어요?”

“그게, 벌써 15년쯤 되었지, 아마.”

어느새 현관에 있던 신발들은 모두 구두 할머니의 이야기에 쫑긋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2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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