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 정안
고라니와 눈이 마주친다. 그 녀석은 하천 수풀 속에서, 나는 하천 제방에서 서로를 확인한다. 나는 북쪽으로 일정한 보폭을 유지하는 데 그 녀석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한다. 그래도 1시에서 4시의 시야각 안이다. 사람이 무섭지는 않은 걸까. 아니면 안전거리가 충분히 확보되었다고 생각하는 걸까. 1시 방향쯤 앞서가면 멈춰서 나를 바라보고, 4시 방향쯤 뒤쳐지면 총총거리며 시간을 거슬러 이동한다. 그 녀석은 애써 몸을 숨기지 않는다. 이곳이 정히 안전한 곳(正安) 임을 아는 것이다. 나도 그 녀석도 안온함을 느끼기에 서로를 해칠 일이 없다. 정안은 그런 곳이다.
살아있는 고라니는 오랜만이다. 이맘때 인간이 고라니를 만나는, 아니 접하는 곳은 혈관처럼 얽혀있는 지방도 위다. 고라니가 온전한 형체로 누워있는 경우는 거의 없다. 사건이다. 사건의 원인은 명확하다. 기아와 현대의 충돌이다. 번식을 위한 배고픔과 문명의 이기가 불안전하게 만날 때 생의 욕구는 너무도 쉽게 꺼지고 만다. 배고픔은 또 다른 배고픔과 연결된다. 사건 피해자는 배고픔의 주체에서 객체가 된다. 이제 새로운 주체가 나타난다. 잽싼 날갯짓이 강점이지만 그들 역시 문명의 이기와 처절한 승부를 벌여야 한다. 먹잇감을 쉴 새 없이 스쳐 지나가는 방해꾼들의 틈새를 제대로 파고들지 못한다면 그들 역시 배고픔의 객체가 될 것이다. 하지만 시간은 그들 편이다. 인간들은 원활한 혈류를 위해 피해자를 노견으로 옮길 것이고, 약간의 방치 시간 동안 그들의 안전한 먹이활동이 가능해질 것이다.
광정장터길은 완전히 사라졌다. 방앗간과 슈퍼마켓 간판이 이곳이 장터였음을 소리 없이 외칠뿐이다. 6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쇠전으로 유명했고, 게걸음으로 걷지 않으면 싸움이 날 정도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는 마을 어르신. 이제 그 기억마저 희미해지시는지 해설이 오락가락이다. 두 자리 숫자들이 널뛰고, 사람과 장소가 개명된다. 하지만 오락가락이면 어떤가. 또한 사실이 아니면 어떤가. 그냥 정안에 관심 갖는 정체모를 외지인을 빌어 옛 일을 추억할 수 있으면 그만이다. 그 어르신은 댁으로 돌아가 점심식사를 하는 와중에 “아차” 하실지도 모르겠다.
“60년 전이 아닌가.. 70년도 더 된 거 같기도 허네.. 아까 그 양반한티 제대로 알려줬어야 하는디..”
숫자가 무에 그리 중요한가. 어차피 아득히 먼 옛날인 것을....
장터길은 이름만 남았다. 아랫마을은 장터의 기능을 윗마을에 넘겨줬다. 신작로를 대적할 방법은 없었다. 상인은 손님이 되었다. 정안을 이끌어가는 주체에서 객체가 되었다. 중심상가가 눈에 보이지나 않으면 좋으련만. 하지만 눈에 보이는 곳이라 감사해야 한다. 촌에서는 도보로 생활서비스를 이용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 과거 상점들로 채워졌던 장터길은 이제 신상 주택들로 채워지고 있다. 정히 안전한 곳임을 고라니만 알 리 없지 않은가. 정안천을 끼고 형성된 이 마을은 아늑하고 포근하다. 고속도로와 지방도가 관통하는 곳이지만 산세가 좋고 물이 맑다. 윗마을 중심상가에 공인중개사 간판들이 눈에 띈다. 부동산 거래가 많기 때문이겠지. 정안은 세종시와의 접근성이 좋아지면서 땅값이 들썩거리는 곳이다. 정안의 젊은 사람들은 주요 생활권으로 공주시내보다 세종시내를 선호한다. 세종시는 공주시보다 생활 인프라가 잘 갖춰진 도시인 데다가 좋은 일자리를 찾아 세종시로 출퇴근하는 젊은 사람들이 늘고 있기 때문이다. 세종시는 앞으로 몸집을 더 키울 것이고, 정안의 중심상가는 공인중개사 간판으로 더 채워질지도 모르겠다. 공주시는 정안의 전입인구를 늘릴 수는 있겠으나 세종시와의 생활권 경쟁에서는 점점 힘이 부칠 것이다. 공주시 주민들은 세종시 출범 이후 많은 것들을 내어주기만 하고 있다는 넋두리를 멈추지 않을 것이다.
장터길이 유발하는 궁금증 중 하나는 바로 문패에 표기된 이름이다. 세월의 풍화를 견뎌낸 문패나 제작 온기가 아직 남아있는 문패나 한 사람의 이름만 표기되어 있다. 대략적으로 그 사람은 남성으로 추측된다. 부부가 같이 거주하는지 홀로 거주하는지, 홀로 거주하는 사람이 남성인지 여성인지 알 수 없다. 최근 농어촌 지역도 새로 문패를 하는 경우 남녀 이름을 병기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어떤 마을은 여성의 이름을 먼저 표기하기도 한다. 근데 이곳은 새 문패도 남성의 이름뿐이다. 마을 어르신께 물었다. 대답은 간단했다.
“마을 문패는 호주 이름으로 되어있지. 호주가 죽어도 문패 이름은 남는겨”
남성은 사후에도 문패에 이름을 남길 수 있으나, 여성은 문패에 이름이 없으니 생을 다하더라도 그냥 무의 상태가 유지될 뿐이다. 하물며 광정장터길은 이정표라도 남아 과거를 추억하지만 여성은 문자로서 실체가 없으니 추억도 요원하다. 내가 만난 어르신은 문패의 이름으로 집주인은 잘 기억해냈지만 여성들은 집주인의 이름으로 유추할 뿐이었다. 평생 누구의 아내, 누구의 엄마로 살아온 여성의 이름이 문패의 작은 공간에라도 남겨졌으면 하는 생각이다. 누군가가 그 이름을 직접적으로 되뇔 수 있기를 바란다. 광정장터길처럼 오랫동안 기억되기를 바란다.
온갖 산을 물들였던 아까시나무 꽃이 지더니 정안을 상징하는 밤꽃이 피기 시작한다. 산세가 아름다운 정안의 푸른 숲에서 밤나무가 입체적으로 보이는 시기가 다가온 것이다. 축 늘어진 하얀 밤꽃은 곧 산을 덮고 장관을 이룰 것이다. 우리는 뜨거운 여름을 본격적으로 맞이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