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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불량 아빠 Dec 22. 2019

ever after, 제자리로 돌아간 육아휴직 아빠

- 4개월 동유럽 여행을 마치고, 다시 싸우고 우울한 가족 이야기

어쩌면 우리는 모두 무언가를 참아내고 있는 사람들 인지도 모른다. 지금 참아내고 있는 그 무엇으로 우리는 우리의 존재를 증명할 수도 있을 것이다. 고독을 참아내는 사람들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 죄의식을 참아내는 사람들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 거절을 참아내는 사람들과 망상을 참아내는 사람들. 당연한 말이지만 그 사람들 모두가 같을 수는 없다. 거기에 더해,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참아내기도 한다. 누가 어떤 괴물 같은 짓을 하더라도, 그것을 누가 참아내고 있는가, 누가 그것을 견뎌내지 못하는가. 그것이 우리의 현재를 말해주는, 숨겨진, 또 하나의 눈금일 것이다.                (화라지송침 中 에서/ 이기호)

그 후로 그들은 모두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 해피 엔딩, 끝! 공주가 등장하는 수많은 동화들의 결말처럼, 우리 가족도 긴 유럽여행을 마치고 돌아와서 모든 상처가 치유되고 질문에 대한 실마리는 모두 찾고 다 같이 행복하게 잘 살았다로 끝났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집으로 가는 길은, 걱정보단 쉬이 지나갔다. 짐은 생각보다 적었고, 떠나는 날 바람 불고 춥던 프라하 날씨는 공항 출입문에 들어갈 때까지만 잠시 우릴 괴롭혔다. 여유 있게 도착하진 않았는데 그간 어떤 공항 수속과 비교해도 여유 있었다. 클라라 Klára 엄마 마르케타 Markéta와 메신저로 작별인사를 하고 비행 편 경유를 위해 바르샤바 공항에 도착했다. 바르샤바 공항 내에 쉥겐, 비쉥겐 구역이 나뉘어 있어서, 귀국행 비행기를 기다리기 위해 비쉥겐 구역에 들어서자, 6월 7일 한국에서 10시간 넘는 비행시간을 견디고 잠시 내렸던 그 자리에 다시 들어섰다. 그때 둘째 아이의 사진과 비교하니 정말 4개월 동안 아이가 훌쩍 컸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갈 때가 되자, 드디어 사진 촬영 때 포즈를 취하기 시작했다.

길에서 자란 둘째는 14개월에서 18개월까지 훌쩍 자랐다

귀국이 섭섭한 건 나뿐인가? 공항도 그저 새로운 실내 놀이터 같은 둘째의 모험, 그리고 귀국행 비행기라 다수의 한국 관광객을 마주하자 그새 또래 친구를 찾아서 함께 뛰어노는 큰아이, 이 여정도 모두 우리의 긴 동유럽 여행의 일부라고 생각하니 그 마무리를 잘해야겠다는 마음, 그리고 큰 사고도 없이, 다치지도 않고, 일상 속 작은 시행착오만 겪어가며 무사히 여행을 함께 해준 가족들이 대견스럽고 고마웠다.

다시 10시간을 타고 한국으로 돌아가는 폴란드 항공 LOT 비행기, 비협조적인 통로 쪽 아저씨 승객 덕에 움직이는데 꽤나 불편했고, 4개월 전에 베이비박스에서 잠시 단잠을 잘 수 있었던 둘째는 훌쩍 커버린 덕에 베이비박스를 설치할 수 없었다. 그래서 승무원이 가져다준 이불을 바닥에 깔아서 춥지 않게 담요를 둘러서 짧게나마 둘째를 재웠고, 큰아이도 그럭저럭 토막잠을 자며 한국으로 돌아갔다. 비행 중에 컵라면을 너무 많이 먹은 탓에(내 꺼 챙기고, 아내와 큰 아이가 남긴 것까지 흡입하느라) 멀미 아닌 멀미를 잠시 했지만 그조차도 견딜만했다. 어쨌든 이제 진짜 한식을 먹을 수 있는 것 아닌가?

집을 4개월이나 비웠다. 그새 한국은 무척 더운 여름을 보냈고, 폭우도 있었고, 태풍도 지나갔다. 혹여나 집에 물이 새거나 어딘지 모를 곳이 썩고 있거나 바퀴벌레라도 서식할까 봐 겁이 났다. 집을 비운 걸 안 부랑자가 몰래 들어와서 살고 있다가 화들짝 놀라는 건 아닐지도 걱정했는데, 우리 집은 너무나 깔끔하고 멀쩡했다. 빈집에서 날 수 있는 특유의 냄새도 없었다. 이건 다 이전에 제주 한달살기를 마치고 집에 와서 겪은 시행착오 덕분이다. 당시 쌀벌레가 가득 알을 까서 한 달을 고생한 경험이 있었다.

아내는 새삼 우리가 돌아갈 집이 있고, 국적이 있어서 고맙다고 느꼈다. 나도 십수 년 전 중동 여행을 하며, 시리아 곳곳에 팔레스타인 난민들이 사는 캠프를 본 기억이 있다. 디지털 노마드건, 유랑하는 여행자든 내 나라 여권이 있고, 거점이 될 국가가 있을 때 가능한 이야기다. 이제 시리아 사람들마저 그런 입장에 처해서 안타깝다.

그렇게 돌아온 내 나라에서, 근 열흘을 시차 적응으로 고생을 했다. 7시간 시차니까, 처음 크로아티아 자그레브에 갔을 당시엔 새벽에 깨서 남보다 이른 하루를 시작했다면, 그쪽 시계에 맞춰진 우리 몸이 점심나절에나 아침처럼 몸이 반응하고, 자정이 넘어서도 잠이 쉬이 들지 않는 상태를 겪어야 했다. 특히 둘째가 낮밤 균형감이 깨져서 걱정이었는데, 해 있을 때 되도록 밖에서 뛰어놀고 억지로 아침에 깨우고 했더니 결국 다시 한국 시계에 맞출 수 있었다. 

그렇게 동네 놀이터를, 남산 아래 백범광장을 매일 같이 찾았다. 500일간 세계여행을 다녀온 친구 부부가, 4월 초 인천공항에 들어서며 미세먼지로 뒤덮인 한국 하늘을 보며 '여기는 무슨 외계 행성인가?' 싶어 유쾌하지 않았다 했다. 나도 걱정이 많았다. 돌아와서 나쁜 공기질에 질려버릴까 봐, 아이들이 콧물을 줄줄 흘릴까 봐, 한국에 왔는데 집에만 틀어박혀 있을까 봐...... 그런데 이건 웬걸? 9월 말 한국의 하늘은 청명하고, 기온은 동유럽보다 높고 햇살은 따스했다. 우리가 비행기표를 사게 만든 그 지독한 공기질이 가을 동풍으로 물러나고, 쾌적한 모습으로 환영하는 게 감사했다.

실은 그 날씨와 공기질만으로도 우린 유럽에 보다 오래 체류할 이유와 근거를 찾고 싶었을지 모른다. 많은 유럽 엄마 아빠들과 늘 하는 얘기도 그거였다. "한국에 돌아가기 싫어. 대기오염이 최악이거든. 중국 탓이야. 여기 어디 일자리 구할 수만 있다면 아이들 키우기 위해 여기로 이주하고 싶어. 근데 내 영어 실력이 그 정도가 안돼" 나의 긴 투정이 쑥스러워지는 순간이다.

궁에 가자. 가까운 덕수궁 어때?

귀국했으니 궁에 가야지. 유럽에서 부지런히 궁전과 광장을 나들이했던 것처럼, 한국에 돌아가도 귀찮아하지 않고 여기저기 시간 나면 산책 가자고 약속을 했다. 그렇게 귀국한 이후 외출을 게을리한 적이 없다. 예전에는 나가지 않을 이유를 찾는데 급급했다면, 지금은 이 좋은 햇살을 누릴 수 있을 때 하루 한시라도 더 누리자며 외출을 재촉했다. 겨울의 문턱에 들어서면 이조차도 어렵다며, 가까이 갈 수 있는 어디든 유모차를 밀며 떠났다. 그렇게 아직 몸이 무거운 세 여자를 끌고 대중교통을 타가며 덕수궁에 이르렀다.

'흠... 여기가 코리아의 모래란 말이지? 유럽 거랑 질감이 다른데?'

늘 이방인이 되어 영어를 쓸 준비를 하다가, 느슨하고 익숙한 한국인들 틈에서 산책하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겉옷은 여럿 챙겨서 바람 불 때 햇살 좋을 때 그때그때 맞춰서 옷을 바꿔 입혀가며 이젠 집보다 외출이 익숙한 아이들과 세상 걸음마를 함께 했다.

동유럽에 있으며, 아이들이 적응 못하면 한 보름 안에라도 돌아오자, 그러나 좋으면 일정을 더 늘리자, 이런 모토로 떠났고, 아이들은 적응을 잘했다. 그러자 욕심이 생겼다. 혹여나, 혹시라도 이곳 유럽에 더 있거나 장기 체류할 수 있는 어떠한 루트가 생기면 겁내지 말고 실천에 옮기자, 이참에 우리 인생의 궤도를 바꾸는 모험에도 우리의 더듬이를 열어두자...... 물론 그런 우연이나 기적은 쉬이 일어나지 않았다. EU 국가에 발을 딛고 영주권을 따고자 목숨 걸고 지중해를 건너는 난민도 있거늘, 여행하는 마음으로 떠나서 어떻게 턱 하니 "그냥 여기 너희 가족 살아볼래?" 할 기회가 생길까...... 그래도 잠시지만 그런 가능성을 상상하고 꿈꾼걸로도 즐겁다 치자. 몇몇 도시를 우리 동네 마냥 살며 현지인처럼 지냈던 시간도 여하튼 삶이고 일상이다.

큰아이는 다시 어린이집에 복귀했다. 4개월의 공백에도 친구들은 반갑게 큰아이를 맡아주었다. 어린이집에서도 많은 배려를 해줬고, 나 역시 자연스럽게 돌아갈 수 있도록, 엽서 우편 송부, 영상편지 등등 각별히 신경을 썼다. 새삼 큰아이는 또래 친구의 소중함을 다시 한번 일깨워줬다. 자다르에서도 류블랴나에서도 바르샤바에서도 프라하에서도, "내일 다시 만나~" 하며 헤어진 현지 친구들을 다시 못 보는 일이 허다했고, 그게 꽤나 미안했다. 지금 큰아이는 친구들과 더욱 돈독해졌다. 어떤 면에선 흔하게 가보지 못하는 유럽여행을 다녀온, 부러움이 생기는 인기인이 되었다. 낯선 유럽인에게도 두려움 없이 함께 놀자 했던 자신감 덕분에 큰아이는 이전보다 더 일상에 잘 스며들게 되었다.

그리고 동네 문화센터에서 발레를 시작했다. 덕분에 어린이집 친구들과의 관계가 더 친밀해졌다. 미술수업까지 해서 어린이집 등원부터 평일 일정이 빡빡하다. 아내는 바르샤바에 있을 때부터 신청하고 준비한 각종 워크숍과 교육일정을 소화하고 준비하느라 바쁘고, 내가 두 아이 육아를 전담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육아하는 아빠가 엉겁결에 아이 친구 엄마들 틈에서 함께 수다를 떠는 모양새가 되었다. 다행히도 큰아이 친구 엄마들이 이 어색한 육아 아빠에게 친절하게 대해줬다. 둘째 아이도 유모차로 함께 다니며 지 언니 친구들, 언니 친구의 동생들과 그럭저럭 잘 어울렸다. 

나는 용기 있는, 혹은 부러운 여행을 다녀온 아빠로 통했다. 우리의 여행이 만약 조금 특별했다면 그건 모두 아이들 덕분이다. 특히 14개월에 시작해서 17개월에 귀국한 둘째 아이는 우리가 꽤나 으쓱해도 될만한 선택을 한 이유가 되어 주었다. 그렇게 긴 여행은 그저 그렇게 평범한 우리 가족을 조금 특별한 기분이 들게 해주는 마법을 갖고 있다. 그리고 그런 특별함은 비단 우리 것만이 아니다. 아이들이 까르르 웃으며 뛰노는 모습을 보노라면 누구 하나 특별하지 않은 아이가 없다. 저들 중 누구라도 우리처럼 동유럽의 현지인들이 일상을 보내는 곳에 섞여서 뛰논다면 우리와 다를 바 없이 환대받고 유쾌한 추억을 만들 수 있었을 것이다. 


동유럽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시점에도, 내 육아휴직은 7개월 정도 남아있었다. 둘째는 아직 한참을 더 커야 하고, 큰 아이는 봄이 오면 초등학교에 입학해야 했다. 추운 겨울이 오면, 큰아이의 어린이집 졸업식과 초등학교 입학식 전에 돌아오는 계획으로 스페인 테네리페 한 달 살기를 계획하기도 했다. 그런데 아내는 조바심이 많았다. 남편이 회사로 돌아가기 전에, 다시 일을 하고 사회생활을 할 수 있는 기반을 닦아놓길 희망했다. 그런 조급함으로 아내는 본인의 체력이 허락하는 범위를 넘어서는 무리를 했다. 결국 귀국 후 한 달이 조금 넘은 11월의 첫날 디스크가 터지는 일이 생기고 일주일 넘게 병원에 입원을 하고 말았다. 

아내가 다치고 병원 신세를 지자, 장모님께서 병간호를 도와주시고 내가 두 아이들 챙기며 집과 병원을 오가는 이중생활을 하게 되었다. 출산 후 아내의 건강을 염려하여 시작한 육아휴직인데, 거동도 못할 정도로 심하게 디스크가 다치니 모든 계획과 의도가 허사로 돌아가는 기분이었다. 동유럽 체류 4개월도 무의미하게 느껴지고 육아휴직은 물론 둘째 아이 출산까지도 잘못된 선택이 아니었는지 곱씹게 되었다. 퇴원 후 아내는 도박판에서 재산을 탕진한 사람처럼 기운이 빠져있었으나 신경은 무척 예민했다. 그 와중에도 건강 회복만큼이나 남편의 복직 전에 본인 삶의 궤도를 원하는 수준으로 올려놓겠다는 의지가 강했다. 원금을 회복하고 싶은 도박꾼처럼 건강이 망가지게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아내를 보며 우리의 삶이 어디서부턴가 그릇된 방향으로 달려가고 있단 걸 감지했다.

그렇게 나의 남은 육아휴직의 대부분은 아내와 의견 차로 생기는 갈등과 싸움으로 얼룩졌다. 모아둔 돈도 얼마 없어 잔고가 드러난 통장 탓에 경제적으로 예민해진 것도 아내와의 갈등에 큰 영향을 주었다. 아내와 10년을 연애하고 결혼 후 7년을 함께 한 시점이었지만, 그 모든 시간 동안 싸웠던 질과 양을 합해도 남은 육아휴직 기간의 전쟁과 비교를 할 수 없었다. 

아내는 원하는 대로 쉽사리 사회에 발을 담글 기회를 얻지 못했다. 프리랜서로 연극, 공연예술에 종사했던 아내에게 긴 공백기를 보상할 만큼 쉽게 열리는 문은 존재하지 않았다. 발버둥 치듯 무리한 계획과 실행이 반복되고 난 비판을 했다. 서로가 서로의 편이 아니고, 반대편에서 서로의 문제점만 눈에 띄었다. 좋을 때는 누구와 함께 해도 좋은데, 힘들 때 서로 힘이 되어야 가족인데, 어느 순간 아내와 나는 함께 하기 어렵다고 느껴질 만큼 힘든 시기를 더욱 힘들게 하는 존재가 되어버렸다.


그러던 어느날 이야기다. 새벽잠을 뒤척이다 눈을 슬그머니 떴다. 분명 깊은 잠을 자는 줄 알았는데, 피로는 둘째치고 모든 어둠이 공간을 무겁게 짓누르는 기분이 들어 불편했다. 대략 새벽 4시쯤 되었겠지. 옆에 휴대폰을 보니 3시 51분이었다. 그리고 직감했다. 잠들지 못하는 사람이 나 하나가 아니란 것을... 아내도 둘째도 모두 그 이상한 어둠의 대기에 휩쓸려 잠을 설치고 있었다. 큰아이만 착하게도 본인의 잠 속에 안착해 있었다.

옆에서 이불을 뒤척이던 아내도 여간 이 밤이 불편해 보이지 않았다. 아이 침대에서 몸을 이리 뒤척 저리 뒤척거리며 선잠 자는 사람의 공허함을 달래는 몸짓이 느껴졌다. 엄마와 딸들이 비슷한 적적함을 표현하고 있었다.

평소 같으면 잠에서 깨면 엎은 후 찡얼거리고 낑낑 소리를 내던 둘째가 무슨 일인지 별소리를 내지 않고 뒤척이기만 계속했다. 잠에서 깬 나도 화장실에 가고 싶었지만, 굳이 움직이는 소리에 큰아이가 깰까 봐 참고 있었는데 세 사람이 각각 수상하게 깨어버린 새벽잠에서 어쩔 줄 몰라하는 것이 공감되었다.

결국 그 어색한 공명을 깨고 둘째가 앙~ 소리를 낸다. 기다렸다는 듯 침대에서 나온 난 아이에게 다가갔다. 난 평소처럼 기저귀를 갈아주는데 웬일인지 새벽 기저귀 치고 그다지 축축하지 않았다. 

갈증이 난 아이가 빨대로 물 한 모금 마시고 잠을 청하기는커녕 웅얼웅얼 수다가 시작되었다. 내 귀에는 '근데~근데~ 인제~ 인제~' 하는 소리로 들려 대단원의 서막을 알리는 소설을 읽어주는 북콘서트에 온 듯한 기분이었다. 결국 디스크 통증으로 지친 아내는 침대로 돌아가 잠을 청하고, 수다쟁이 아이와 난 불도 켜지 않은 어두운 마루 위 매트에 올라 잘 보이지 않는 서로를 더듬고 형체가 헷갈리는 장난감을 번갈아 쥐어가며 새벽의 놀이를 시작했다.

"해 뜨면 언니 어린이집 보내야 해~ 이제 그만 좀 자자~ 엄마도 너무 힘들게 하지 말고~ 알았지?"

아이에게 애원하며 마루에서 정체불명의 놀이를 하다가 아빠 품이 그리웠던지 아이가 내게 손을 뻗기에 안고 서서 재우기를 시작했다. 테라스 바깥으로 어둠 속에 드문드문 저 멀리 건너편 건물들에 들어온 불빛을 감상하며 아이도 가급적 잠을 청해 본다. 그렇게 한 10분쯤 안고 있었던가, 나도 1년 반 넘게 아이를 안느라 고생한 탓에 팔목은 저릿저릿 허리는 찌릿찌릿 못 견디겠다 싶어 방으로 들어갔다. 먼저 잠을 청했지만 쉬이 잠들지 못했던 아내가 여전히 뒤척이고 아이를 자리에 눕힌 나는 달래다 다시 안아주기를 한 두 번 더 반복했다.

그렇게 눕히면 그래도 부모 맘을 아는지 어떻게든 잠들려고 뒤척이는 모습이 짠하고 어찌 보면 미안하기까지 했다. 그럼에도 감이라는 게 생겨서 눕혀놓고도 '아... 안 잘 거야. 한 1~2분 있다가 낑낑거리며 안아달라고 보채겠지' 하며 체념했다.

그렇게 그 수상했던 공명이, 대기를 무겁게 잡아끌던 어둠이 우리 안방을 가득 채우던 그 밤이 잠깐 깜빡 졸고 눈을 뜨자 소스라치게 사라져 있었다. 뒤척이던 아내도 잠들었고, 아이도 허전함을 이겨내고 다시 꿈나라로 떠나 있었다. 시계를 보니, 대략 1시간 후엔 슬슬 큰아이의 아침밥 준비를 시작해야 할 터, 깊은 잠이 두려웠던 나는 마루로 나갔다. 아이와 수상한 장난감 놀이를 하던 매트에 누워 모두가 지쳐있던 무중력의 새벽을 떠올렸다. 아이가 태어나고 아이를 키우며 새벽잠을 못 이룬 건 흔한 일이었다. 서로가 지치고 짜증도 넘쳤던 그 모든 시간을 곱씹어도 그 새벽의 헛헛함이 좀 독특했던 건 사실이었다. 그저 그렇게 또 하루가 지나가던 것인지, 서로에 대한 치유의 시간이었는지 답도 내지 못한 채 잠들었다.

훗날 웃으면서 그 힘든 시간을 이겨내며 아이를 키웠다고 얘기할지도 모르고, 그 정도 고생은 고생도 아니라고, 누구나 다 겪는 일이라고 훈계들을 지도 모르지만, 막상 잠들지 못하는 깊은 밤의 한 복판에선 한없이 이기적이고 나약해지는 나 자신을 마주하곤 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 부부는 사랑으로 아이를 대하며, 약한 체력에 매 순간 허덕이는 자기 자신에게 지쳐가고 있을 것이다. 다행이라면 차차 수월해질 것이고 달콤한 휴식과 긴 잠도 돌려받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모두가 공통되게 모호했던, 그래서 잠을 설치며 의문스러웠던 그 이상하고 수상한 새벽은 계속 곱씹어 볼 것 같다. 잠들지 못하는 자는, 잠드는 순간까지 방황하게 마련이다.

그리고 모두가 다 같이 행복하게 잘 살았더래요, 로 마무리하지 못한 내 육아휴직도 종반부로 달려가고 있었다.


한 인생의 드라마는 항상 무거움의 은유로 표현될 수 있다. 사람들은 우리 어깨에 짐이 얹혔다고 말한다. 이 짐을 지고 견디거나, 또는 견디지 못하고 이것과 더불어 싸우다가 이기기도 하고 지기도 한다. 그녀를 짓눌렀던 것은 짐이 아니라 존재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이었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 밀란 쿤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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