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불량 아빠 Dec 27. 2019

나는 나, 너는 너, 우리는 우리

- 아빠도 엄마도 너희도 각자의 삶으로

난 나를 추켜세우거나 비하하는 데 너무 많은 시간을 허비했다.
난 그곳에 앉아 음악을 들으며 내 안에 있는 인생을 진정으로 느꼈다.
그들을 사랑할 순 있어도 소유할 순 없다. 세상을 사랑해도 소유할 수 없었듯이.
난 아직도 세상을 사랑한다.                    (영화 ‘괜찮아요 미스터 브래드’ 中에서)

내가 아내를 많이 좋아해서 시작한 연애였다. 한 6개월을 주변에서 서성였고 답답했던 아내가 먼저 사귀자고 했다. 첫 단추를 그렇게 끼웠기에 아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대부분 맞춰지기 시작했고, 내가 줄을 당겨서 다툼이 생겨도 종국엔 아내 쪽으로 기우는 것이 우리의 방식이었다. 무게추가 그렇게 기울었던 관계는 10년 연애 끝에 결혼 후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다. 내가 안정적인 월급을 받았고, 아내는 프리랜서라 수입이 들쑥날쑥했던 것도 이유였다. 그러다가 아내가 큰 아이를 낳고 일을 줄여나가기 시작하고 아내는 전업주부가 되었다. 큰 아이가 태어나고 거의 만 5년은 아내가 우울증의 구덩이에 허덕이는 시간이었다. 큰 아이는 어린이집에 쉽게 적응하지 못해서 5살이 될 때까지 엄마 옆에 꼭 붙어있었고 애착관계도 심한 수준이었다. 퇴근 후, 그리고 주말이면 미안한 마음에 내가 아이와 시간을 보냈지만, 아내는 주어진 짧은 시간 동안 ‘나 자신을 위한’ 무언가를 찾지 못했다. 돌이켜보면 어떤 키워드나 실마리라도 찾을 법도 한데, 이른바 ‘감’이 떨어진 건지 몇 발자국 나아가지 못하고 의미 없는 검색과 자료 수집만 반복되었다. 

거지가 되지 않기 위해, 네가 만든 삶의 방식으로 사는 게 싫어!

아내가 나를 향해 외치던 반복된 구호였다.

아내 입장에서 한 해를 버틸 수 있는 몇 가지 이유 중, ‘여행’은 큰 부분을 차지했다. 육아로 매몰된 본인에게 숨통을 틔워야 할 때, 이루 말할 수 없는 갑갑함을 이겨내야 할 때, 나의 회사 일정 조정을 요청하고 덥석 비행기 표를 예매했다. 일정을 짜고 새로운 어딘가를 거닐면 당시 우리 세 가족은 무척 행복했다. 큰 아이가 한 살 두 살 더 먹을수록, 한 달 두 달 더 지날수록 여행은 어려운 과제가 아니었다. 없는 살림에도 그렇게 일 년에 두세 번은 여행을 떠났고, 그중 제주도는 꼭 한 번씩 포함되었다. 큰 아이가 다섯 살 때는, 아내는 둘째 아이 임신 초기였음에도 큰 걱정 없이 비행기를 탈 정도로 우리 가족의 여행은 원숙해졌다. 

둘째는 생각지도 않던 부부가 거의 동시에 새로운 식구를 맞이하길 희망한 것도 신기한 일이었다. 여전히 그 설렘은 이해할 수 없지만, 둘째 아이가 태어나면 우리 가족은 무언가 바뀌어 나갈 것이란 막연한 기대감이 있었다. 그리고 아빠가 육아휴직을 낼 수 있다는 개념도 정말 우연처럼 엉겁결에 알게 되고 실행한 것이다. 그렇게 둘째 아이는 뱃속에서부터, 우리 가족의 익숙한 방식을 바꿔나갈 열쇠를 쥐고 있었다.

그리고 정말 그랬다. 원래 아이가 태어나면 가족들의 생활 방식이 바뀌기 마련이지만, 우리에게 둘째 아이가 온 것은 특히나 우리 부부에게 큰 지각변동을 일으켰다. 일단 육아휴직을 낸 나는 얼마 걸리지 않아 우울증의 나락에 떨어졌다. 아내는 이에 질세라 남편 복직 전에 본인의 사회적 기반을 닦겠다며 무리한 계획과 시도와 시행착오를 반복했다. 

육아휴직 2년을 내고, 그 기간 동안 이사를 2번 했다. 집 근처로 옮긴 것도 아니고, 차 막힐 때 1시간 넘는 거리로 기초 자치구를 이동했고, 공교롭게도 두 날짜 모두 추웠다. 둘째 아이가 7개월, 22개월 때 이사를 했고 그렇게 거주지를 옮길 때마다 참혹했다. 이사 방식과 노동력 활용을 두고 아내와 번번이 부딪혔고 짐 정리도 쉬이 끝나지 않아 가족 모두 고생했다. 이 모든 것이 시행착오였다고, 과정 중에 많은 것을 배웠다고, 시간이 지나 미화하지만 가족 모두에게 깊고 얕은 상처를 모두 갖고 있다.

두 아이를 두고, 언제 어떤 방식으로 이혼하는 게 가장 현명하고 이상적인가를 서로 각자의 방식으로 아내와 나는 고민했다. 지금도 여전히 공유할 수 없는 자신만의 서랍이 생겼고, 영원히 채우지 못할 깊은 계곡이 파였다. 

정말 두 아이가 있었기에, 어처구니없이 무모하게 떠난 동유럽 4개월 유랑이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다. 나도 아내도 아이들도, 싸우기도 많이 싸웠지만 상처가 생기지 않은 작은 생채기 수준이었다. 그 의미 있는 4개월을 거둬내면 나머지 20개월은 감정 기복도 심하고, 그중 절반은 지옥에 가까웠던 것 같다. 물론 우리는 동유럽 여행 및 한 달 살기 외에도 비행기를 타고 떠났다. 직장에서 일정 조율하는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서 기간을 넓게 넓게 잡아가며 절약도 못하고 여기저기 떠났다. 제주도는 한달살기, 보름살기도 하고, 복직 전에 마지막으로 일주일을 보냈다. 겨울엔 미세먼지 공습으로부터 피하기 위해 오키나와를 찾기도 했다. 큰 아이만 키우던 시절엔 아내가 그렇게 여행이 간절했건만, 둘째가 태어나자 남편인 내가 집구석에서 투닥거리는데 이골이 나서 어디론가 떠나고 싶어 했다. 여행이라고 떠나도, 결국 아이들 돌보기는 마찬가지인데, 집에서 일상을 보내고 살림을 꾸려나가는 것과는 무언가 달랐다. 일단 집에 있으면 아이들이 잠들기만을 기다리고, 아이들이 자면 게으름뱅이처럼 쉬는 게 일상이었다면, 돈 써서 떠나 있으면 깨어있는 시간 하나하나를 알차게 채우고자 부지런히 돌아다녔다. 집 앞동산에 무료 운동기구는 거들떠도 안보지만, 돈 내고 등록한 헬스장은 아까워서라도 매일매일 출근하는 모양새 같았다. 

매달 15일은 고용보험 홈페이지에 로그인해서 육아휴직수당을 신청했다. 큰돈은 아니지만, 수입이 없는 우리 가족이 저축을 까먹으며 살았기에 그 돈은 간절했고 다행히 닷새 정도 안에 입금이 되었다. 그때마다 ‘아, 이제 복직까지 몇 개월 남았지?’ 막연하게 세보았다. 그렇게 숫자가 하나 둘 줄어가다 24개월이란 시간을 꼬박 보냈다.


만 2년간의 육아휴직을 마치고 복직했다. 회사에선 내가 있었는지 없었는지도 모르게 정신없이 시간이 흘러갔다고 하는 한편, ‘과연 저 녀석이 돌아오긴 할까?’하는 의문도 있었다고 했다. 당연하게도 육아휴직 후 복직자에 대한 차별이나 괴롭힘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육아휴직은 근로기준법에서 보장한 노동자의 당연한 권리이지만, 일부 사업장에선 알게 모르게 피해를 보는 경우가 여전히 존재한다. 부당한 대우를 하지 않은 회사에 감사하는 현실이 조금 아이러니하다. 

연극, 영상 및 공연예술 분야에서 일하는 아내는 답 없이 거의 20개월을 발버둥 치다가 내 육아휴직 막바지에 지역구 문화재단 등에서 운영하는 예술인 작업실, 예술 교육 사업 등에 하나둘씩 참여할 기회를 얻었다. 동유럽을 다녀온 후, 무언가 해보겠다고 무리해서 디스크까지 터져서 거동을 못하고 입원할 지경이었는데, 일이 풀리게 되니 작은 실마리들이 하나둘씩 보이기 시작했다. ‘다 모든 일은 때가 있는 법이야’란 얼토당토 하지 않은 명언이 적용되는 사례일 수도 있고, 악착같은 발버둥의 결과가 조금씩 나오기 시작한 것일 수도 있다. 그렇게 아내는 육아하고 살림하는 경력 단절된 엄마가 아니라 ‘나 자신’을 찾아가며 조금씩 씩씩해지고 있다. 사회생활을 오래간만에 시작해서 이 역시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라, ‘행복해지고 있다’란 표현을 쓰는 건 다소 무리일 수도 있겠다. 

난 육아가 힘들어서 하지 못한다고 핑계를 대던 운동을 시작했다. 새벽 6시에 헬스장에 나가 4~50분 운동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얼추 가족들의 기상시간과 맞는다. 이른 아침 등교를 해야 하는 큰아이를 깨워서 아침밥을 차려주고, 둘째 아이가 일어나면 기저귀를 갈아주고 역시 먹을거리를 지원해주다가 출근을 한다. 아내는 아이들 등교와 등원을 도와주고 난 후 본인의 작업실로 출근을 한다. 나는 나, 아내는 아내의 삶을 보내고 아이들 하교, 하원 시간에 맞춰서 아내가 돌아오거나, 일이 있으면 장모님께서 두세 시간 맡아주신다. 되도록 칼같이 집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회사 일정도 맞춰놓았고, 회사에서도 육아휴직까지 쓴 직원이 애 보러 칼퇴근하는 걸 잡을 생각이 없다. 자유직종인 아내는 일이 많을 때는 늦게까지 본인의 시간을 보내다가 귀가하고, 나는 잠들기 전 저녁시간 아이들의 하루를 마무리한다. 가능할 거라 상상하지 않았던 규칙적인 각자의 삶이 시작되었고, 그 안정감에 모두들 서로를 더 귀중하게 느끼게 되었다. 그렇게 각자의 5일을 보내면, 주말은 더 진취적이 된다. 여행 때처럼 공연도 많이 보러 다녔고, 날만 좋으면 큰 고민 없이 외출해서 뛰어놀았다.

휴직 전부터 만원 전철에서 서서 출퇴근을 하며 이 자체가 힘든 거라며 아내에게 투정을 했었다. 지친 몸을 빌미로 아이와 놀아주길 게으르게 할 핑곗거리였다. 복직 후 난 출퇴근 전철 시간이 즐겁다. 하루 일과 중 온전히 내가 나만 바라보는 시간이란 걸 알기에, 맛보기를 권유한 시식코너에서 기대치 않은 명품 요리를 만난 마냥, 별거 아닌 듯 짧은 시간이 내겐 가치 있는 시간이 되었다.

큰 아이는 초등학교에 입학을 했고, 둘째 아이는 어린이집에 다니기 시작했다. 그들은 온전히 그들의 삶을 산다. 아이들이다 보니 가끔 아프고, 병원 다녀온 후 집에서 쉬어야만 하는 날도 간혹 있지만, 이제 모두가 ‘나는 나’의 삶을 만들었다. 그러고 보니, 네 식구가 함께 동유럽을 떠돌던 4개월 동안에도, 둘씩 둘씩 나뉘어 각자의 여가 활동을 즐기고 우연히 만난 인연을 누리고 저녁이면 숙소에서 얼굴을 마주하곤 했다. 

복직 이후, 한 달에 두어 번 주말에 회사에서 일을 해야 할 때가 있다. 아내는 오전 9시부터 저녁 6시까지 온전히 8살, 3살 아이를 떠안는 꼴이 된다. 날씨가 따뜻할 때는 놀이터도 가고 외출도 가능했지만, 겨울이 다가오고 날이 굳으면 그 시간을 아빠를 직장으로 보낸 여자 셋이서 집 안에서 보내게 된다. 일을 마치고 귀가하면, 아이들과 근 9시간을 함께 보낸 아내가 녹초가 되어 말한다. “당신이 왜 육아휴직 2년 동안 우울증에 걸려 미쳐갔는지 이해가 충분히 가네”

누군가 원하는 방식에 귀속되는 것이 아니라, 설사 상대의 방식이 나와 결이 다르더라도 존중하며, 아빠도 엄마도 아이들도 모두 각자의 삶을 살고 있다. 어쩌면 이게 우리가 찾고 싶던 해답이었는지도 모른다. 

물론 내가 그랬고 아내가 그랬고 많은 부모들이 그랬듯, 아이가 어리면 어른 하나가 24시간 그대로 삶이 저당 잡힌다. 그 시간을 이겨내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아이가 좀 더 자랄 때까지, 아이에게 ‘너는 너대로 일상을 보내~’라며 떼어놀 수 있을 때까지 함께 대화하고 위로할 누군가가 반드시 필요하다. 지금도 어딘가에서, 육아와 살림에 얽혀서 나 자신을 까먹으며 살아가는 부모들에게 부담 없이 소통하고 공유할 수 있는 공간과 비용이 공적으로 지원되길 희망한다.

#육아휴직 #육아휴직여행 #아빠육아휴직 #아빠육아 #남편육아휴직 


이전 25화 ever after, 제자리로 돌아간 육아휴직 아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