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 -1-
응, 나는 할머니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
수능 2주 전, 독서실은 막판 스퍼트를 올리는 학생들의 열기로 평소와는 다르게 다소 들떠있다. 당시 동네에 처음으로 들어온 프리미엄 독서실. 수험생활 내내 학교, 시립 도서관 등의 무료 시설만 이용하던 내가 처음으로 부모님께 부탁드려 자리 잡은 나만의 공부 공간. 자유석과 1인실, 휴게공간과 무료 음료를 제공하던 요즘은 조금 흔한 스터디 카페의 모티브가 되는 공간. 영역별로 분위기를 다르게 조성해 어떤 정신상태에도 공부에만 집중할 수 있게끔 마련된 호화로운 시설 밖 엘리베이터와 화장실 사이의 회색벽에 기대 선 나. 벌써 두 시간째 이어지는 할머니의 전화를 끊지 못하고 있다.
당시 방영하던 시사교양프로그램 속의 어떠한 여자아이가 주유소에서 일을 하면서 공부를 했다던 가, 주유소에서 일하는 부모가 있다 했다던 가, 그렇게 서울대를 갔다던가 사실 기억이 잘 나진 않는다. 나는 네, 네, 맞지요, 그렇지요를 끊임없이 반복하며 머릿속으로는 독서실에서 나가야 하는 시간과 자리에 두고 온 스케줄러를 끊임없이 생각한다. 내가 오늘 순공시간(순수 공부 시간)이 얼마더라? 이렇게 오래 걸릴 줄 알았으면 영어단어 노트라도 가지고 올 걸. ”할머니, 저와 그 친구는 시험 전형이 다르다구요. 지금은 정말 다양한 방식으로 대학을 갈 수 있어요 “ 하고 발끈해 보는 것도 잠시, 대화가 통하지 않는 상대에게 “제가 지금 할 게 좀 많아서요, 바빠서... ”하며 빌어보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어지는 일장연설에 나는 그 만 눈을 질끈 감고 차라리 잠을 자기를 택한다. 그러나 대답이 늦으면 집중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또 그저 가루가 될 뿐인 것이 고3 수험생에게 행해지는 안부전화의 익숙한 패턴이다. 이 공부의 왕도에 나왔다는 대단히도 훌륭한 아이의 이야기가 내 수능 이후 쏟아진 저주 폭격에도 다시 쓰였다는 사실은 이젠 별로 놀랍지도 않다.
긴 글을 작성해 나가기에 앞서 고백하자면 내 우울의 근원은 안타깝게도 어린 시절에 있으며 어느 누구에게도 의도한 바는 없었다는 것이 나를 더욱 미치게 한다. 나의 모든 이야기는 사실은 병리적 나르시시스트를 진심을 다해 사랑한 손녀딸의 이야기다. 어쩌면 딸의 대체제로 존재하던 유일한 손녀딸에 대한 이야기다. 그리고 이 집안의 정신적 지주에 대한 이야기다. 그리고 이제는 그 역할을 홀로 감당해 내기를 포기한 그냥 오롯이 나에 대한 이야기다.
세상의 다양한 짝사랑 중 가장 불행한 짝사랑은 감히 나르시시스트를 사랑할 때가 아닐까. 우리말에 내리사랑은 있지만 아이가 부모를 사랑하는 것을 표현하는 적절한 단어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아이를 구성하는 그 가장 첫 번째 세계는 부모이기에 부모는 아이의 세계의 전부가 되고 ‘효(孝)’라는 단어로는 그 일방향의 사랑을 표현하기에 충분하지 않다. 부모와 아이는 각각 상대방이 자신을 사랑하는 것보다 본인이 상대방을 더 사랑한다 착각하며 자신만의 짝사랑을 행하는데 여념이 없다.
나르시시스트 부모가 자녀를 자신의 연장선으로 여기며 자녀의 실패와 성공을 자신의 것으로 간주해 비현실적인 기대를 부과한다 거나 자녀와의 관계에서 상호성을 무시하고 복종을 요구하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유아기에 형성한 부모(주양육자)와의 애착이 이후 모든 대인관계의 기저가 된다는 Bowlby의 애착이론(1988)은 부모-자녀 관계뿐 아니라 인생 전반의 성격 및 사회성 발달에 널리 쓰이는 이론적 패러다임이다. 더 나아가 애착유형이 세대전이가 될 수 있음을 시사하는 연구도 존재한다. 나는 감히 나르시시스트 할머니의 존재가 내 성장과정에 미친 영향은 80%가 넘는다고 단언해 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