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에서 학부모로
초등학교 입학을 앞둔 대혼란의 시기
7살부터 변화의 조짐이 보였다.
우주와 동갑내기 아이를 키우는 집들이 비슷한 시기에 이사를 준비했다. 이사한 집을 리모델링하면서 아이 방을 따로 만들어 주기도 하고 전세로 살던 사람이 내 집 마련을 하기도 했다. 수도권에 살던 사람이 서울에 가거나 아파트에 살던 사람이 오랜 꿈이던 주택을 짓기도 했다. 그 모든 변화들이 비슷한 시기에 일어났다. 단체로 이때 이사하기로 약속이라도 했나 의아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다 초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벌어진 일이었다.
학군을 고려해 이사를 가는 사람도 있었지만 꼭 그런 이유만 있는 건 아니었다. 아이가 학교에 입학하면 전학 때문에 사는 곳을 옮기는 게 쉽지 않으니, 오래 뿌리내릴 곳을 찾아 둘에서 셋넷이 된 가족 구성원에 맞게 삶 전반을 다시 계획했다. 변화를 꾀할 적당한 타이밍에 맞춰서 새로운 단계를 밟은 것이다.
두 사람이 살기 적당한 신혼집을 얻을 때와는 상황이 달라졌고, 아이 중심이 된 지금은 살고 싶은 동네와 집의 형태도 달라졌을 것이다. 나는 뒤늦게 알았지만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아이가 8살이 되기 전에 그런 고민 끝에 새 집을 구했다.
그때 나는 어땠을까. 그 시기 우리 동네는 부동산 업자들이 흔히 말하는 호재가 생겨 전세금이 폭등했다. 2천만 원 까지는 어떻게 해보려고 했는데 4천만 원을 올려줘야 한다기에 바로 새 집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이렇게 된 거 아예 오래 살만한 곳으로 옮겨볼까 고민도 했지만 우리 전세금으로는 내가 살고 싶은 곳으로 갈 수 없었다. 별 수 있나 현실에 맞춰야지.
집은 고를 것도 없었다. 우주가 갈 초등학교에서 멀지 않은 아파트 중 우리 돈으로 갈 수 있는 곳은 딱 한 곳뿐이었다. 굳이 집이 어떤지 따져 볼 필요도 없었기 때문에 그날 바로 계약하고 우리는 곧 이사했다.
34평에서 24평으로. 초등학교를 품은 아파트라고(초품아) 다들 이쪽으로 이사를 오는 마당에 거꾸로 초품아를 떠나 옆 아파트 단지로.
그때 나는 처음으로 뒤처지는 느낌을 받았다. 좋은 집에 살고 싶다거나 내가 살고 싶은 동네에 사는 사람을 부러워한 적은 없었다. 우리는 우리 상황에 맞게, 언젠간 적당한 때에 라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아이 손을 잡고 8살이라는 인생의 출발점에 선 것 같았다. 다른 사람들은 그럴듯한 아이방, 평판 좋은 학교, 살기 좋은 동네라는 아이템을 획득하고 달려 나가는데 나는 오히려 뒷걸음질을 하는 기분이었다.
그런 내 울적함을 아이들에게 티 내고 싶지 않았는데 웬걸 아무것도 모를 것 같았던 아이들이 더 힘들어했다. 우주는 곧 다닐 학교가 집 근처였는데 왜 이사를 와서 더 많이 걸어야 하는 거냐고 등교할 때마다 투덜거렸다. 4살부터 4년을 함께 했던 놀이터 패밀리와도 이제 약속 없이 만날 수 없다고 무척 아쉬워했다. 그리고 새로 이사 온 집 앞 놀이터에서 처음 만난 아이들에게 나는 여기 이사 왔으며 이 집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말을 첫인사처럼 건넸다. 하나 역시 세모집(이전 집 현관 모양)에 가고 싶다고, 여기는 좁아서 놀 곳이 없다며 장난감을 들고 거실을 서성였다.
혼란스러웠다. 새로 오게 된 집은 지은 지 15년이 넘은 아파트라 요즘 나오는 24평 보다 훨씬 좁았고 베란다 확장도 안 되어있었다. 아이들이 장난감을 들고 종종거릴 때 나는 아이들 옷장을 대체 어디다 놔야 할지 모르겠다고 줄자를 들고 성화를 부렸다. 끝내 건조기는 앞 베란다, 김치냉장고는 뒷 베란다, 아이들 옷장은 작은 방 베란다에 놓아야 했다.
단순히 집이 좁아서 힘든 게 아니었다. 우리 부부는 15평에서 시작했고 이 집에서도 충분히 잘 지낼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34평에서 불린 짐을 정리도 하기 전에 24평으로 와야 했다는 거였다. 다른 사람들은 오래 살 집을 찾아 탄탄하게 미래를 계획하고 있을 때, 우리는 삶이 원하는 방향대로 나아갈 수 없다는 걸 빠르게 받아들여야 했다. 그 결정이 너무 갑작스러워서 짐도 마음도 아무런 대비를 하지 못한 것이 버거웠다.
앞으로 다가올 일들에 비하면 집은 대혼란의 서막에 불과했다. 일하는 엄마는 아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면 학원 스케줄을 짜는 것으로 골머리를 썩는다.
초등학교 1학년은 점심을 먹고 바로 하교하기 때문에 1시면 집에 온다. 그래서 집에서 아이를 돌볼 수 없는 경우 학교에서 운영하는 방과 후 수업과 돌봄 교실을 신청하는데, 방과 후는 길어야 1시간짜리 수업이고 하교 시간 이후의 수업은 집에 갔다가 다시 학교로 돌아와야 하기 때문에 이것 역시 집에 어른이 없는 경우 무용하다. 돌봄 교실은 조금 더 늦게까지 학교에서 유치원과 비슷한 돌봄을 받을 수 있는 걸 말하는데, 지역마다 다르지만 이곳은 신청 인원이 많으면 추첨을 하기 때문에 마음을 놓을 수 없다. 회사나 자영업을 하는 사람들은 퇴근시간까지, 나의 경우는 집에서 일할 수 있는 어느 정도의 시간이 확보되어야 하는데 그러려면 하교 시간에 맞춰 데리러 오는 학원을 한 개에서 많게는 세 개까지 다녀야 하는 것이다.
초등학교 입학을 앞둔 시기 엄마들 카페에서는 학원차를 운영하는 주 5회 학원을 묻는 글을 아주 쉽게 볼 수 있다. 맞벌이라 정보가 없다거나 아이 맡길 곳이 없어서 도움을 구한다는 절절한 사연들도 함께. 웬만한 고난은 스스로 감당하는 편인데도 이쯤 되면 도대체 아이를 어떻게 키워야 하는지 나라 탓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럼 이제부터가 고민인 거다. 이제 겨우 8살인 아이의 하교 이후의 시간을 무엇으로 채워야 할 것인가. 공부를 시킬 것이냐 말 것이냐. 시킨다면 어떤 공부를 시킬 것이냐. 학원을 보낼 것이냐 말 것이냐. 보낸다면 어떤 학원을 보낼 것이냐. 부모의 교육관에 따라 다르겠지만 나는 내 일을 해야 했기에 돌봄 교실과 학원을 이용해야 했다. 그렇다면 어떤 학원을? 8살은 돌봄을 받는 유치원생과 달리 학습을 목표로 학교에 가는 학생이 아닌가. 지금까지의 육아와는 달라야 했다. 잘 놀아만 주면 되던 아이에게 이제 잘 가르치기도 해야 한다니 갑자기 두려워졌다.
지금까지 관심 밖이었던 상가에 빼곡한 학원 간판들을 눈여겨보기 시작했다. 길에서 보이는 노란 학원차들도 유심히 봤다. 음악 줄넘기, 코딩, 키즈 수영, 바둑, 별별 학원이 다 있었다. 주변에게 물어물어 평이 좋은 학원 상담을 받고 학원차를 운영하는지 시간표가 어찌 되는지 확인했다.
우주는 배우는 걸 좋아하는 아이였다. 그것도 내가 가장 자신 없어하는 수학과 과학을 좋아했다. 더 어릴 때는 책을 사다 집에서 과학실험도 해주었는데 이것도 한계가 있어서 일찌감치 과학실험 교실을 알아두었던 것이 첫 번째 스케줄이 되었다. (우주는 여기를 너무 좋아해서 어른이 될 때까지 다니고 싶어 할 정도다) 그러고는 아이들 사이 유행하는 한자 만화책을 보더니 한자 학원을 보내달라고 했다. 집에 선생님이 오는 건 싫고 친구들을 만날 수 있는 학원이어야 한단다. 그렇게 한자 학원이 추가되었다. 마음이 여리고 운동신경 없는 아이라 나는 도장에 다니자 설득했다. 이맘때 주변에 아이들은 거의 다 태권도에 다니고 있었다. 그렇게 운동도 추가. 국영수도 안 배우는 데 학원이 벌써 세 개나 되었다. 생각보다 빼곡한 스케줄에 이게 맞는 걸까 싶기도 했다.
학원비를 낼 때마다 남편은 무슨 학원을 가성비 안 좋은 것 만 골라 다닌다며 타박했다. 그도 그럴 것이 합기도는 일주일에 세 번. 과학과 한자는 달랑 한 번씩 가는 거였으니까.
그러던 중에 수학과 과학을 좋아하는 우주에게 딱 알맞은 곳을 찾아냈다. 주 5회 다니는 학원으로 수학과 과학, 주 1회는 보드게임을 했다. 수학은 풀이 과정을 앞으로 나와 칠판에 설명하고 과학 실험도 하는 곳이었다. 발표하고 친구들과 어울리기 좋아하는 우주의 취향에 딱 맞는 곳이라 마음에 들었는데 원비가 문제였다. 거의 50만 원 돈이었다. 우주에게 딱 맞는 학원을 그렇게 찾아다녔으면서 원비를 듣고 고민이 많아졌다. 우리 집의 경제적 상황을 떠나서 초등학교 1학년 때 50만 원이라면 중학교 1학년, 고등학교 1학년 때 나는 얼마짜리 학원을 보내고 싶어 질까 무서웠다. 마치 명품가방처럼 품질 좋고 유명한 것을 찾아 고개를 치켜들면 끝도 없을 것 같았다. 한 편으로는 아직 더 놀게 하고 싶은 내 속마음도 제동을 걸었다.
놀고 싶어 하는 엄마에 배우길 좋아하는 아들이라니. 1학년 때는 얼마나 어디까지 얼마만큼 가르쳐야 하는 걸까. 육아의 새로운 장에 접어들었다는 걸 느꼈다. 갓난아기 때처럼 궁금한 것은 많은데 아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젖먹이를 떼어 놓고 출근하던 엄마들이 그렇게 아낀 육아휴직을 왜 초등학교 1학년 때 쓰는지 알 것 같았다.
정 반대의 고민을 하는 엄마도 있었다. 학원 다니면서 친구도 사귀고 공부도 하면 좋을 텐데 아이가 아무 데도 다니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집에서 아이와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엄마라면 큰 문제가 아니지만 일을 해야 하는 경우 억지로라도 다니게 해야 하니 그것도 괴로운 일이었다.
7살까지 우주를 키우는 건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 나는 몸으로 놀아주는 것에 자신 있는 엄마여서 더 놀고 싶어 하는 아이와 해가질 때까지 놀이터를 지키는 게 어렵지 않았다. 동네 놀이터를 하나씩 섭렵하며 하루에 두어 번씩 장소를 바꿔도 피곤하기는커녕 오늘도 잘 놀았다는 사실이 뿌듯했다. 체험장 같은 곳에 가면 긴 줄을 서서라도 모든 체험을 다 하겠다는 아이에게 그래 해봐라 해봐라 대신 줄을 서줬고, 물놀이가 하고 싶다면 하나를 뱃속에 품고도 혼자서 짐을 챙겨 수영장에 데리고 갔다. 아이가 즐거워한다면 내 몸이 힘든 것은 아무런 문제가 안 됐다. 그렇게 아이의 만족이 곧 나의 만족이던 때가 있었다.
조금씩 이래도 될까 고민하게 된 건 8살부터였다. 노는 거 좋아하는 엄마 따라 아들도 노는 걸 좋아하면 좋겠는데 우주는 커가면서 호기심이 많아졌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인데 체험이나 탐구가 모두 놀이의 범주에 들어가서 열심히였던 아이가 학습으로 관심이 옮겨가자 갑자기 버거워졌다.
수포자 미대생이었던 엄마에게 누가 봐도 이과생으로 자랄 것 같은 아들이라니 하늘도 무심하지. 학창 시절 나는 다른 아이들이 문제집 풀 때 집에서 시집을 읽다 엄마의 잔소리를 들었고, 친구들이 야자하고 과외받을 때 늦은 시간까지 미술 학원에 있었다. 아마 그림이 아니었다면 대학에 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던 내가 나와 성향이 다른 학습 열의가 넘치는 이 아이를 잘 도울 수 있을까.
이미 실패한 전적도 있다. 우주는 아주 어릴 때부터 영어에 관심을 보였었다. 돌이 갓 지나서 야물지 않은 발음으로 알파벳을 읽었고 어린이 집에 다닐 때 나를 앉혀놓고 sit, cat 같은 단어들을 스케치북에 적어가며 뜻을 설명해 줬다. 기차에서 외국인을 만나면 겁도 없이 헬로! 하고 말을 걸었다. 이 정도야 조금 빠른 애들이 다 하는 건데 세상에 모든 첫째 엄마들이 그렇듯 나는 우주가 혹시 영재인가 호들갑을 떨었다. 내 평생의 숙제가 영어인데 내 아이가 영어 신동이라니(아님) 영어유치원을 보내야 하나, 영어 학원을 보내야 하나 마음이 급해졌다. 엄마 영어 세미나 수업을 듣고 엄마표 홈스쿨링을 공부했다. 집에서 읽어주기 좋은 영어책을 사들였고 좋은 영상을 찾아 자주 노출시켜줬다. 그래서 9살이 된 우주의 지금 영어 실력은? 어제 알파벳을 쓰다가 J가 왼쪽으로 구부러진 건지 오른쪽으로 구부러진 건지 묻더라.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왔다.
내가 집에서 영어를 읽어주고 노출시켜 주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 영어 노래를 틀어주고 동영상을 틀어주고 사실은 그게 참 번거롭고 싫었다. 무엇보다 스스로 영어가 싫은데 아이에게 무슨 공부를 시키겠나. 책을 읽어줄 시간이면 아이들이 책을 고르러 가는 뒤통수를 보며 마음속으로 '한글책 가져와라 한글책.' 빌고 있으니 말 다 했지.
우주에게 영어 교육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좋은 선생님을 찾아 6세 반이 없던 학원에 자진해서 사람을 모아 6세 팀을 새로 만들기도 했었다. 그렇게 몇 달이 잘 배우다가 팀이 와해되는 바람에 중단하게 되었지만. 적당한 때에 다시 시작해야지 생각했을 때는 이미 내 아이가 영재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고. 엄마표 영어도 시들해졌다. 그렇게 아이의 영어 교육은 원점으로 돌아갔다. 꾸준히 오래 해줄 수 없다면 조급하게 굴 필요가 없었는데 그때는 하루라도 빨리 가르쳐야 할 것 같았다. 영어유치원은 경제적인 능력이 안 되어 못 보냈지만, 거긴 가정 통신문도 영어로 되어있다고 하니 나는 아마 전달사항을 받을 때마다 스트레스로 괴로워했을 것이다. 영어 실력도 유치원 비용도 내 능력 밖이었다.
우주가 어릴 때 친구들과 집 앞에서 물총놀이를 할 때는 늘 우리 집이 물 보급 창고가 되었다. 나는 2리터짜리 물통 4개를 수시로 채워 친구들 몫까지 열심히 날라주었다. 다른 엄마들이 정자에 앉아있을 때도 나는 옷이 흠뻑 젖도록 물총을 맞아주며 함께 뛰어다녔다. 그건 내가 좋아하는 일이었고 잘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런데 아이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블록을 배수로 늘여놓거나 한자 퀴즈를 낼 때는 난감했다. 기특하긴 한데 그 관심과 시도를 내가 잘 키워줘야 하는 과제처럼 여기는 거다. 마치 영어가 그랬던 것처럼.
진지하게 고민해 봤다. 나는 어떤 엄마가 되어야 할까. 내가 아이에게 어떤 걸 해줄 수 있고 어떤 걸 해줄 수 없을까. 나에게는 영어를 실패한(아이의 실패가 아닌 내가 가르치려는 시도의 실패) 경험도 있으니 인정할 것은 해야 했다.
결론적으로 나는 엄마 선생님이 되고 싶지 않았다. 아이에게 수학과 한자를 가르칠 자신도 없고 능력도 없었다. 그래서 초등학교에 입학시키며 새로운 규칙을 세웠다. 공부는 선생님께, 엄마는 놀아주거나 칭찬해주거나. 이 두 개만 하자. 아니나 다를까 한자 학원을 몇 달 다니던 아이가 8급 대비 문제집을 혼자 푸는데 거진 만점을 받는 것이다. 가장 쉬운 단계라 더 어린아이도 합격한다지만 나는 집에서 한 번도 가르친 적이 없으니 마치 스스로 깨친 것처럼 놀라웠다. 이거구나! 우주가 한자 천재라도 되는 듯 감탄하며 칭찬해주었다. 내가 잘할 수 있는 거였고 스트레스를 받는 일도 아니었다. 아이가 좋아하는 건 당연했다.
그리고 새롭게 깨닫게 된 것이 있다. 아이라면 별이고 달이고 다 따줄 것 같았던 내가 사실은 내 시간도 무척이나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과 아이와 내 목표가 같을 때만 신이 나서 쫓아다닐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아이가 보면 좋을 전시는 차로 두 시간을 가도 고되지 않았는데, 아이에게 공부를 가르치는 건 두 자릿수 더하기도 하기 싫었다. 우스갯소리로 하나가 예쁘니 아기모델을 시켜보지 않겠냐는 소리를 들을 때도 덜컥 하나 매니저로 살고 싶지 않다는 생각부터 했다. 아마 내 딸이 김연아의 재능을 타고났어도 나는 아침마다 스케이트장으로 태워주며 서포트하지 못했을 것이다. 내 아들이 손흥민이었어도 마찬가지다. 나는 아이에게 내가 줄 수 있는 것의 한계와 종류가 있다는 걸 천천히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러고 나니 앞으로 가야 할 길에 안개가 걷히고 조금씩 시야가 선명해졌다. 나는 아이들이 배우고 싶어 하는 것이 있다면 직접 가르치지 않고 학원을 보낼 것이다. 좋은 학원의 적정선을 찾으려고 노력할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너희들에게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만 줄 수는 없음을 알려줄 것이다. 너희를 위해 살지만 나의 생활도 중요하다는 것을 미안하지만 이제 깨닫게 되었다고 이야기할 것이다. 대혼란 혹은 대환장의 롤러코스터는 그걸 깨닫게 되면서 멈췄다.
다가오는 3월에는 또 어떤 학원 스케줄로 가정의 평화를 찾아야 할지 모르겠다. 게다가 2학년은 돌봄 추첨에서 떨어져 여간 난감한 게 아니다. 하지만 작년 3월처럼 두렵지는 않다. 우리는 앞으로도 각자 하고 싶은 것을 하며 살기 위해 서로에게 시간을 양보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