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즈카페에서 신나게 트램펄린을 타던 우주가 잠시 멈추더니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우다다다 뛴다. 높은 곳으로 기어올라갔다가 경사진 곳을 데구루루 구를 것처럼 아슬아슬 뛰어내려올 때도 두 손이 바지 근처를 떠나지 않는다. 계속 바지를 붙잡는 모양이 아무래도 바짓단이 길어서 불편한 것 같았다. 잘 놀고 있는 아이 흥을 깨는 것이 미안하지만 우주를 불러 세워서 바지 끝을 두 번씩 야무지게 접어 올려줬다. 짤따랗게 올라간 바지가 방금 밭일을 끝낸 꼬마 농부 같아서 조금 우습고 너무너무 귀여웠다. 바짓단 접는 그 잠깐 사이를 못 참고 몸이 자꾸 트램펄린으로 기우는 우주. 다 됐다고 엉덩이를 두드리자 용수철처럼 튀어나간다.
우주가 불편 없이 잘 노는 모습을 확인하고 테이블에 앉아 주위를 들어보는데 내 아이뿐만 아니라 거기 모인 아이들이 하나같이 웃는 얼굴이라 덩달아 미소가 지어졌다. 장난감과 놀이기구 몇 개 모아놓은 보통의 실내 놀이터일 뿐인데 천국이라도 만난 듯 즐거운 표정이다. 여기 있는 아이들이 모두 키즈카페가 처음도 아닐 테고, 여기가 전국에서 가장 좋은 곳도 아닌데 말이다. 아이들은 어쩜 이렇게 쉽게 행복해질까.
나는 종종 모르는 아이들을 보는 것 만으로 감동하고 만다. 사주를 봤더니 이유가 있단다. 생년월일을 넣자마자 아이에 대한 이야기부터 나왔다. 아이를 워낙 좋아하니 학생을 가르치는 일이나 유치원 원장을 했어도 될 거라고 했다. 타고난 사주 때문인지 정말로 나는 처음 보는 아이들에게도 쉽게 애정을 느끼는 편이다. 오래간만에 혼자 떠난 여행에서도 길에서 아이들을 보면 홀가분한 내 자유가 불필요하게 느껴지고, 금세 아이와 함께 온 엄마가 부러워진다. 길에서 지나가는 중고등학생 아이들을 봐도 어릴 적 동생을 보는 것처럼 애틋하고, 심지어 잘 자란 20대 청년을 보면 내 새끼도 아닌데 반듯하게 잘 컸네 기특하다. 사주 상으로는 아이가 넷이라는데 남은 두 아이 몫이 채워지지 않아서인지 세상 모든 아이들이 다 예쁘다.
아이들 뿐만 아니라 그 아이를 지켜보는 따듯한 시선에도 자주 뭉클한다. 우주의 4살 첫 재롱잔치 때도 그랬다. 조명이 꺼진 관객석에는 무대 위 못지않은 긴장감과 설렘이 가득했다. 내 아이가 얼마나 예쁠까 얼마나 잘할까 모두 같은 마음으로 들떠있었다. 엄마 아빠 그리고 아이의 재롱잔치를 보러 온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좋은 옷을 입고 자리를 가득 채웠다. 손에는 꽃다발이나 풍선 같은 것을 하나씩 들고 있었고 다른 한 손에는 언제든 사진 찍을 준비가 된 핸드폰을 들고서 언제쯤 내 아이가 나오나 고개를 쭉 빼고 있었다. 그런 풍경을 보고 있자니 아이를 바라보는 다정한 마음이 자연스럽게 어른들에게까지 옮겨졌다.
첫 무대가 시작되고 나는 얼굴도 모르는 형님반 아이들의 공연을 보며 울어버렸다. 처음으로 올라온 6살 아이들은 낯선 무대에서 쑥스러움을 이겨내고 있었다. 오로지 내 아이에게 집중하고 있는 엄마의 간절한 시선을 발견한 한 아이가 바쁘게 손을 흔들었다. 이것보다 더 감동적인 눈 맞춤이 있을까. 울컥한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울어버린 것이다. 옆에 있던 남편은 아직 우주도 안 나왔는데 왜 그러냐고 했지만 정작 내 아이가 나왔을 때는 조금이라도 가까이에서 동영상을 찍느라 바빠 감동할 틈이 없었다. 그날 나는 내 아이가 아니라 거기 모인 사람들의 부푼 마음에 동화되어 눈물이 났다.
처음 하나의 어린이집에 상담을 갔을 때, 입구에서 원장님을 기다리고 있는데 조르르 모여있는 신발장 속 아이들 신발을 보고도 울컥했다. 앙증맞은 신발들이 자기 이름표 위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는 모습을 보고는 갑자기 그랬다. 편하고 예쁜 신발을 골랐을 부모와 그 신발을 신고 제 힘으로 걸어왔을 작은 아이의 발걸음이 그려지는 것 같아서. 처음 엄마와 떨어져서 자기 덩치만큼 커다란 어린이집 가방을 메고 낑낑거리며 신발을 신고 벗었을 안쓰러운 모습도 보이는 것 같았다. 신발 하나하나에 그런 아이와 그런 부모들의 이야기가 담겨있다고 생각하니 갑자기 눈물이 주룩 흘렀다. 어린이집 첫 상담에 울면서 대기하는 엄마라니, 무슨 대단한 사연이라도 있는 것처럼 보일까 빨리 눈물을 훔치고 아무렇지 않은 척하느라 혼났다.
아이가 하원하는 시간에 사람들이 모여있을 때도 비슷한 생각을 한다. 아이를 기다리며 현관 앞에서 고개를 빼고 내 아이를 찾는 사람들이 좋다. 푸석한 얼굴에는 피곤함이 묻어나도 자기 아이를 발견하면 어쩔 수 없이 배시시 미소 짓는 모습이 좋고. 하원 시간에 맞춰 퇴근하기 위해 서둘러 온 엄마가 삐딱하게 주차한 체 시동도 끄지 못하고 아이의 이름을 부르며 달려오는 다급함도 좋다.
"갑자기 추워졌네요."
"오늘 아침에 따뜻해서 얇게 입혀 보냈는데 어떡해 너무 춥네요."
"OO는 오늘 잘 갔어요? 하나는 가기 싫다는 걸 겨우 달래서 보냈어요."
아이의 안부와 날씨는 변함없는 우리의 주된 관심사다. 유치원 앞에서 아이가 나오길 기다리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보면 여기 있는 다른 사람들도 그런 마음으로 서 있는 거겠지, 비슷한 노력으로 아이를 키우고 있겠지 라는 생각에 마음이 따뜻해진다. 힘든 것도 나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에 위안을 받고, 사랑받는 것이 내 아이뿐이 아니라 안심이 된다.
약속한 하원 시간이 되면 선생님 뒤로 한 줄 기차를 하고 나오는 아이들은 눈을 크게 뜨고 자기를 데리러 온 엄마를 찾는다. 나도 하나가 볼 수 있게 손을 흔들어 안심시킨다. 유치원에서 만든 것을 손에 들고(엄마들은 예쁜 쓰레기라 부른다) 흔들며 계단을 내려오면 제일 먼저 어깨에 멘 가방부터 건네받는다. 가방에 든 거라곤 물병 하나와 그날 그린 그림 한 두 장이 다지만 솜털 같은 무게라도 대신 들어주고 싶은 게 엄마의 마음이다. (물론 제 몫은 제가 책임지게 하는 현명한 엄마들도 있지만 나는 그런 쪽으로는 애초에 글러먹었음을 이전 글에도 고백했었다) 집까지 길어봐야 10분이지만 갑자기 추워진 날씨에 챙겨 온 머플러부터 둘러준다. 아이에게만큼은 '잠깐이니 괜찮겠지'가 없다. 짧은 길이라도 따뜻하게 입히고 함께 걸으며 집에 오자마자 간식을 찾는 아이를 위해 오늘은 무얼 준비해 놨는지 얘기해 준다. '엄마가 하나 좋아하는 딸기 사놨지.' 하면 아이는 놀란 토끼눈을 하고 깡총거리며 뛰어간다.
아이의 친구들에게 인사하고 엄마들끼리 다시 시작된 육아 출근을 암묵적으로 응원하며 각자의 집으로 뿔뿔이 흩어지는 사이, 내 등 뒤에서도 아이에게 오늘 하루를 묻는 엄마들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린다. 그럴 때면 사랑받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내 주위에 있구나 마음이 몽글몽글해진다. 원래 눈물이 많은 편도 감성적인 편도 아닌데 아이를 둘러싼 친절함에는 한 없이 약해지고 만다.
물론 모든 어른이 아이를 다정하게 대하는 건 아니다. 어리고 힘이 없어서 내키는 대로 쉽게 말하는 사람도 있다. 아이에게 이름 대신 야 너 심하게는 욕을 섞어가며 함부로 대하는 사람들을 볼 때면 그 사람이 유독 오늘 무척 지치고 힘든 날이었길 진심으로 바랄 뿐이다.
엄마의 말도, 낯선 어른의 말도 아이들은 주로 그저 듣기만 하는 존재다. 아이에게 하듯 어른이 어른에게 말한다면 아마 큰 싸움으로 번져 경찰서를 찾게 될 테니, 힘있는 어른은 작고 약한 아이에게만 종종 큰 소리를 낸다. 거기에 대한 씁쓸한 기억이 있다. 길고양이를 후원하는 곳에서 프리마켓이 열렸을 때의 일이었다. 프리마켓의 특성답게 골목골목마다 작고 아름다운 것들이 펼쳐져 있었다. 구경을 하던 한 아이가 도자기로 만든 작은 물건을 만지작 거리며 들었다 놓는데 대뜸 옆에 있던 참가자가 아이를 나무랐다. 꾸지람을 들은 아이는 되려 더 크게 가판대를 흔들었다. 그 사람은 더 큰소리로 아이에게 조목조목 잘못한 점을 알려주었다. 마지막에는 아이를 향해 '너 아주 예의 없는 애구나!'라고 결론지었다. 내가 대신 나서려는 차에 아이 엄마가 왔고 사과를 하고 끝이 났다. 애초에 망가진 물건도 없었다.
아이가 잘못한 것은 맞다. 하지만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을까? 만지면 안 되는 것이었지만 그걸 설명해 준 어른이 없었을 수도, 알지만 살짝 만지려다 실수를 했을 수도 있다. 그것에 대해 주의를 준다면 '이건 눈으로만 보는 거야. 깨질 수 있거든.'이라고 했어도 충분했을 것이다. 아이 입장에서는 난생처음 보는 어른이 큰 소리로 나를 혼냈고, 주변 사람들이 다 자기를 쳐다보는 것이 당황스러웠을 것이다. 그러면 아이의 반응은 보통 두 가지다. 울거나 오히려 더 크게 말썽을 피우거나. 난감하고 부끄러워서 어쩔 줄 모르는 걸 그렇게 표현하는 거다. 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 중 어느 누군가의 입에서 '역시.... 내가 이래서 애를 안 낳을 거라니까.'라는 말이 내 귀에 또렷이 들렸다.
아이에 대한 이해가 없는 그 어른의 부족한 점을 속으로 꼬집는 사람도 있었을 거라 믿고 싶다. 아이가 가판대를 흔드는 '잘못'을 저지르기 전 '실수'였을 때 조금만 더 다정하게 말했다면 달라질 수도 있었다. '예쁘지? 그런데 이건 눈으로만 봐야 하는 거야. 깨질 수 있거든.' 아니면 다음 기회도 있을 것이다. 도자기가 깨질까 봐 순간적으로 혼을 냈더라도, 아이가 당혹스러워하는 걸 알아챈 후에 '깜짝 놀랐구나. 나도 이게 깨질까 봐 놀라서 한 말이야. 화를 내려던 건 아닌데 미안해.' 그렇게 말했다면 아무도 피해보지 않고 아무도 속상하지 않게 끝났을 수도 있다. 그 자리에 있는 모두에게 '예의 없는 아이'로 낙인찍힌 아이가 꾸벅 사과를 하고 마무리됐을 수도 있을 것이다. 더불어 프리마켓을 구경하는 올바른 방법에 대해서 알게 되었으니 다음에는 실수하지 않길 기대해 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해주는 어른은 없었다. 그러니 아이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알 수 없을 것이다. 차분하게 설명해도 악을 쓰는 아이도 있으니까. 하지만 성인이라면 약자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는 깊게 생각해 보지 않아도 안다. 우리는 조금 더 인내심을 갖고 따뜻해질 필요가 있다. 내 아이에게도 모르는 아이에게도.
고양이를 좋아하는 샐러들이 모인 자리였으니 길 고양이 한 마리가 도자기 주변을 걷다 깨뜨렸다면 어땠을까 상상해봤다. '저 나쁜 고양이!' 라며 큰 소리로 혼을 냈을까. '내가 이래서 고양이를 안 키운다니까.' 라며 고양이를 싫어하게 됐을까. 아니면 고양이가 그럴 수도 있지 하고 말았을까. 아이를 키워보지 않은 어른은 아이에 대해 잘 모른다.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럴 때는 그냥 고양이라고 여기면 좋겠다. 아직 손가락을 정교하게 움직일 줄 모르는 아이가, 아직은 감정을 능숙하게 다를 줄 모르는 아이가, 얼마나 쉽게 비난의 표적이 되는지 알아주었으면.
언젠가 내가 인스타에 노키즈존은 차별이라는 피드를 올린 적이 있는데 한 서점의 대표님께서 자신의 이야기를 남겨주셨다. 자신은 결혼도 하지 않고 아이도 없지만 혼자서도 노키즈존은 이용하지 않는다고 하셨다. 이렇게라도 노키즈존 운영에 반대하고 있다고. 그 분과 직접 만난 적은 없지만 차별받는 존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계시는지 알 수 있었다. 그 글을 보고 무한한 애정과 신뢰가 샘솟았음은 물론이다. 나는 사람들이 애지중지 하는 것을 쉽게 깨뜨리고, 언제 날카로운 발톱을 내밀 줄 모르는 작고 어린 고양이, 아니 아이들을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한다. 그들의 배려와 관용과 이해가 다정한 세상을 만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