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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희정 Dec 13. 2023

연애랑 결혼은 다르지

김비서 시리즈 : 리얼 부부 현실 에세이

남편과 둘이 꼭 붙어 걷는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비가 온다길래 각자 우산을 따로 챙기며 현관을 나섰다. '역시 우리는 부부군. 우산 하나를 같이 나눠 쓸 생각 따위 하지 않지.' 농담을 하면서 나왔는데 차에 우산 하나를 놓고 내린 것이다. 

남편은 우산을 들고 나는 남편의 팔을 붙잡고 걸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따뜻하더니 오늘은 날이 너무 추웠다. 


나는 손발이 차고 김비서는 열이 많다. 한때는 그것이 우리가 잘 만난 이유라 여기기도 했다. (별게 다.) 연애시절에는 남편을 커다란 난로 삼아 꼭 안겨 다녔다. 김비서 품 안에 들어가기에 내가 너무 커다랗긴 했지만 어깨를 구겨 넣고 나보다 겨우 5센티 큰 남자의 품으로 비집고 들어갔다. 

나의 오른쪽 몸은 김비서의 왼쪽 몸과 샴쌍둥이처럼 붙어 있었다. 덕분에 내 오른쪽 잠바 주머니는 언제나 무용지물이었고, 김비서의 왼쪽 주머니는 항상 만실이었다. 사랑에 미쳐있던 때는 이 사람에게 더 가까이 붙을 수 없게 만드는 내 오른팔이 거추장스럽게 느껴질 정도였다. 

애교도 부렸다. 애교를 부리지 않아도 나를 귀여워하는 사람에게 더 귀여워 보이고 싶어서. 입 속이 훤히 들여다 보이게 하품을 하거나, 아무 데서나 꾸벅꾸벅 졸아도 이뻐하길래 어디 이것도 예뻐할 수 있나 보자 막 나갔다. 만원 지하철에서 '여기 있는 사람 중에 희정이가 제일 예쁘다.'라는 소리를 듣고는 아- 이 사람 콩깍지가 제대로 씌었구나 더 마음대로 굴었다.

밀당을 못하는 사람이었지만 내 제멋대로의 성질은 밀당을 대신하는 자극제가 되었다. 남편은 더 나아지지도 나빠지지도 않고 그 자리에 있었고 나는 달라붙었다 튕겨나갔다 흔들었다 바빴다. 꼴도 보기 싫으면 여자 화장실에 숨어있다 집에 갔고, 좋으면 껌딱지 같이 붙어 놓아주지 않았다. 그럴 때도 김비서는 묵묵히 있었다. 그게 답답할 때는 다시 도망갔고 고마울 때는 엉엉 울며 다시 찾아왔다.


내 양손은 항상 아이들 차지였는데 김비서와 밀착해 걸으려니 어색했다. 머리를 기대기에는 살짝 낮은 남편의 어깨에(디스 아님. 오늘은 그런 감성 아님.) 두꺼운 팔뚝, 갑자기 바람이 휙 불어도 흔들릴 것 같지 않은 튼튼한 다리. 내 남편이 어떻게 이렇게 생겼었지 새삼 알고 있던 것을 다시 기억해 냈다. 짧은 다리 덕분에 오종종 채신없이 걷는 건 평생 놀림거리지만 가만히 있을 땐 고목나무처럼 든든한 면이 있었지. 내 인생까지 지탱해 주느라 고생하는 우리 집 기둥목. 김비서는 그때나 다름없었다.


 

김비서 생일이라고 오랜만에 영화관 데이트를 하러 왔는데 우리가 들어온 3관에는 관객이 딱 세명뿐이었다. 우리 둘과 어느 남자 한 명. 손님이 없어서인지 난방을 하지 않아 팝콘을 집어먹는 손이 시릴 정도로 추웠다. 나는 사실 영화를 보러 왔다기보다 오랜만에 영화관에서 팝콘이 먹고 싶었다. 좋아하지도 않는 팝콘이 이상하게 영화관에서는 맛있으니까. 손이 시려서 못 먹겠다고 김비서에게 귓속말을 몇 번 했더니 김비서가 조끼를 벗어주었지만 추위는 가시지 않았다. 물티슈로 슥슥 손을 닦고 팝콘 먹기를 중단했다. 그냥 예전처럼 남편의 왼쪽 주머니에 오른손을 넣어두고 남은 시간을 보내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두 시간 반짜리 영화는 불행히도 재미가 없었는데 할인을 받기 위해 한참 키오스크 앞에 서있던(최대한 할인받을 수 있는 신용카드 혹은 통신사를 찾고 있었을 것이다.) 김비서는 속으로 돈이 아깝다고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영화가 끝나니 무섭게도 빨리 하원 시간이 돌아왔다. 첫째는 벌써 집에 와있다고 전화가 왔고, 조금 있으면 둘째의 하원 시간이라 서둘러 유치원으로 가야 했다. 그 뒤로는 생일맞이 휴가라는 특별함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평범한 날처럼 흘렀다. 내가 아이들 간식을 하는 사이 김비서는 잠깐 일을 했고, 김비서가 작은 아이를 공부방에서 데려오는 사이 내가 일했다. 저녁을 먹고 케이크 앞에서 조촐한 선물을 증정식을 마치고 네 식구가 돌아가며 씻고 씻기니 하루가 다 갔다.

    


22살 김비서와 21살의 내가 만나 서로의 20,30대의 모든 시간을 함께 했다. 의정부에 살던 김비서는 거의 매번 광명에 있던 우리 집 문 앞까지 바레다 주고 다니 먼 길을 돌아갔다. 기대하지도 않은 것을 채워주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해달라는 것은 고생스러워도 해줬다. 아름답기만 한 연애는 아니었지만 내 20,30대의 모든 기억이 후회될 정도는 아니었다. 대체로 좋았고 그럭저럭 행복했다. 

7년을 연애하는 동안 우리는 학교를 졸업했고 군대에 다녀왔고 취업을 했다. 상대적으로 이른 나이에 했던 결혼도 지켜보던 사람들은 그 정도면 할 때가 되었다 수긍했다. 이 정도 만났으면 결혼하던가 헤어지던가 양단간에 뭐든 하나를 해야 할 세월이었다. 

 

연인으로 7년 부부로 12년이 지난 지금, 나는 자주 남편이 밉고 오른팔이 거추장스러울 정도로 사랑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결국 저 사람이 어떻게 되길 바라냐고 묻는다면 내 미움이나 사랑과 상관없이 나는 언제나 남편의 옆에 가장 먼저 서고 싶다. 

내가 저 사람을 미워할 때 그 마음은 증오보다 원망에 가깝다. 내가 저 사람을 사랑할 때 절절함보다 애틋함이 크다. 한결같은 마음으로 살아가는 부부도 있겠지만 내 사랑은 시간이 지나며 계속 다른 이름으로 불렸다. 지금은 이런 마음이지만 내년에는 후년에는 또 어떻게 변할지 모른다. 


남편이 되도록 행복했으면 좋겠다. 

언제나 건강했으면 좋겠다. 

열심히 살고 있으니 일도 잘 되었으면 좋겠다. 

내가 남편을 어떻게 생각하고 얼마나 좋아하느냐를 떠나 그가 자신을 사랑하고 후회 없는 인생을 살길 바란다. 우리가 부부라서 그런 것은 아니다. 당신과 내가 이 배를 버리고 바다에 뛰어든다 하더라도, 다른 배에 오르기 전까지는 잘 지냈으면 한다. 물론, 다른 배에 탔다면 그때부터 내 소관 아니고.


어찌 되었든. 행복해라 김비서. 웬만하면 우리 평생 같은 배를 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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