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 T발 C야?
*메일리에서 발행하는 뉴스레터 '마흔 일기' 암(1)~(3)에서 남편과 관련된 에피소드만 모았습니다.
24. 1. 24
“내가 미리 언질을 줬었죠.”
암이라는 뜻이다. 모양이 좋지 않다 정도의 복선이 암일 거라는 뜻인지는 몰랐지만.
갑상선 유두암이라고 가장 예후가 좋은 암이라고 했다. 유두는 목 아래 있는데 왜 목안에 있는 암 조직의 이름이 유두일까. 잠깐이지만 우습다는 생각을 했다.
수술을 해서 갑상선 절반을 떼어내는 것과 고주파 치료가 있는데 선택은 내 몫이라고 했다. 의사는 설명을 이어갔다. 암에 대한 설명은 아니었다. 주로 실비와 보험에 대한 이야기였다. 고주파 치료가 더 좋다고 이야기하는 것처럼 느껴졌는데 실비 보험 서류는 떼어줄 수 없다고 했다. 속으로 대체 얼마길래…라는 생각을 했지만 물어보진 않았다. 수술이든 치료든 어차피 여기서 하지는 않을 테니까.
“저 정도의 크기와 모양이면 보통 어떤 방법을 택하나요?”
“얘기했잖아요. 선택은 본인의 몫이라고.”
딱 하나 가장 궁금한 것을 물어봤으나 얻은 건 없었다. 돌아가는 길 갑상선 암 카페에 가입해야겠다. 다시 정보의 바다에 뛰어들어야 할 때다. 블로그를 찾아보니 어느 파워 J의 포스팅이 눈에 띄었다. 포스팅에는 이렇게 쓰여있었다.
‘당황할 시간 없어요. 한국인은 8282’
아- 정말이지 유쾌한 민족이야.
우선은 공동 운명체인 남편에게 이 사실을 알려야 했다.
하나카드 결제일 지났는데 아직 못 빠져나갔다는 걸 알리고 보험 연체를 알리는 메시지도 복사해서 보냈다. 내 검사 결과는 우리 부부가 처리해야 할 여러 공지사항과 함께 전달 됐다. 마치 세탁세제가 떨어졌다는 이야기처럼 일상적이었다.
24. 1. 24
저녁으로 찜닭을 했다. 이럴수록 건강하고 맛있는 걸 먹어야지. 감자랑 당근, 양배추를 넣고 수프를 끓이듯 푹 고았다. 국물을 넉넉하게 해서 밥 위에 부어 먹을 생각이다.
퇴근한 남편이 기다란 박스 하나를 들고 왔다. 회사 사람에게 소곡주를 받아왔다고 한 잔 하잔다. 그것도 원래는 회식에서 먹을 것을 회식이 미뤄져 자기가 가져왔다는데 그래서 잘 되었다는 건지 자랑을 하는 건지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지 판단이 안 됐다.
저녁으로 찜닭 해놨으니 먹자고 했더니 얼씨구 뭐 시켜 먹잔다.
“아니, 뭐 축하할 일 있어? 뭐 파티할 일 있냐고.”
순간적으로 암의 원인이 스트레스라면 그 스트레스의 9할은 당신이라고 소리치려는 걸 참았다. 이 사람이 소시오패스가 아닌 이상 와이프가 암 진단을 받은 저녁에 이럴 수는 없다. 함께 산 지 올해로 12년이 되어가는데도 아직 저 사람을 다 알기엔 짧은 시간이었나 보다.
하늘은 잘 울지 않는 나에게 울보 딸을 주셨고, 걱정이 많은 나에게 대수롭지 않아 하는 남편을 주셨다. 그런 이유가 있겠지. 이것도 합이라면 잘 맞는 거겠지. 사는 동안은 최대한 잘 지내보다가 나중에 하늘에 올라가 꼭 물을 작정이다.
남동생은 주변에 물어 괜찮다는 병원과 경험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계속 톡으로 보내온다. 오늘 검사 결과 나오는 걸 아는 지인은 걱정 말라는 내 말에 어떻게 암인데 걱정을 안 하냐고 운다.
내가 바란 공감과 위안을 어째서인지 집 밖에서 얻는다. 그러한 까닭에 담담했던 내 진단명이 갑자기 서글퍼졌다. 나는 진짜 괜찮은데 당신은 좀 휘청여야 하는 거 아니냐고 물으려다 목구멍에 억지로 치킨과 소곡주를 밀어 넣고 먼저 일어났다.
24. 2. 1
내일은 용인 세브란스 초진 예약 날이라 오늘은 조직검사를 했던 병원에서 슬라이드와 서류를 받으러 갔다. 내일 내가 근처까지 시외버스를 타고 가면 반차를 낸 남편이 데리러 올 계획이었다. 아이 하원 시간 전까지 올 수 있을까 조마조마했지만 정 안 되면 40분 거리에 사는 아버님이 와주신다고 했으니 큰 걱정은 없었다.
아버지는 낼 일 생기셨다고. 그래서 진아는 어쨌든 우리가 픽업하는 걸로. 혹시 우리 늦을 수 있으니 5시 데리러 가는 걸로 하고 그것도 안되면 누구한테라도 부탁해야 할 거 같아요.
남편에게 이 카톡을 받고 나서야 내가 버스표를 사두지 않았다는 게 생각났다. 서둘러 들어가 봤지만 당연히 모두 매진. 세상에 이런 멍청이가 있나. 병원 예약 날짜 정해지자마자 표부터 샀어야지. 무슨 정신으로 살고 있는 걸까.
마치 내 인생 같았다. 온갖 거 다 챙기다가 정작 자기는 못 챙기는. 온갖 거 다 신경 쓰다가 자기는 스트레스로 암에 걸려버리는 병신 같은 인생. 저번에 시가에서 암 진단을 받았다고 말씀드렸을 때는 도울 게 있으면 언제든 오겠다 하셨으면서 그 사이 무슨 약속이 생겼을까. 며느리 병원에 가는 동안 손주들 봐주는 것보다 중요한 약속이 뭘까. 대체 왜 남편은 버스표는 샀냐 그거 한 번을 물어보지 않는 걸까. 여행 가면 나는 남편의 런닝과 팬티까지 챙기는데 왜 내 일을 함께 해주고 챙겨주는 사람은 없는 걸까.
다 내가 보살핌 받지 못해 이렇게 된 거다. 이게 바로 암 환자의 우울이다 이것들아. 나를 뺀 모두를 멱살 잡고 원망하고 싶었다. 진단 후 처음으로 눈물이 솟구칠 것 같았다. (하지만 울지 않지) 사실 안 다. 이건 다 핑계라는 걸. 내 실수고 내 탓이다. 그래도 짜증 나는 이 감정을 탓해야 한다면 암을 원망해야지 어쩌겠나.
24. 3. 31
보고 싶으니 아이들 얼굴 사진 좀 보내달라고 했더니 남편이 보내준 둘째 아이 사진이 처참하다. 아이는 전혀 의식하지 않고 찍었고, 그 꼴을 찍어 보낸 남편도 모르나 본데 눈이 빨갛게 부어있다. 아니 어떻게 이런 사진을 아무렇지 않게 보낼 수가 있지? 바로 전화를 걸었다.
“괜찮았는데 지금 막 씻고 나와서부터 그런 거야.”
“봄이라 이제 알레르기 시작했나 봐. 항상 들고 다니는 약 가방에 안약 있으니 넣어줘.”
분노를 가라앉히고 최대한 차분히 설명했더니 태연하게 안 가지고 왔단다. 1박 여행을 가도 꼭 챙기는 비상약 가방을 3박 4일 시가에 가면서 안 챙긴 것이다. 아마 자기 게임할 닌텐도는 챙겼을 것이다. 아무렴.
아이에게 직접 물으려고 전화를 바꿨더니 기침소리가 예사롭지 않다. 이제 막 시작되는 소리가 아니라 의심할 여지없는, 이미 감기로 땅땅 판정된 소리였다. 결막염에 기침까지? 대체 며칠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갑상선 유두암 수술로 3박 4일 병원에 입원 후, 친정에서 이틀 요양하고 돌아가는 참이었다. 하루 부족한 그 일주일을 못 참고 남편은 끝내 감기에 걸린 둘째를 나에게 토스한다. 집에 도착하면 감기에 걸린 아이가 있을 것이다. 나는 무리하지 말고 쉬라는 의사의 권고 따위는 상관없이 아이 간호를 해야겠지. 나 없는 사이 애들 아프지 않게 다치지 말고 있으라는 게 그렇게 어려운 부탁이었나. 시가에 어른이 셋인데 왜 아무도 아이가 아픈 걸 알아채지 못하는 걸까. 거실에서 눈 비비는 아이는 신경 쓰지 않고 연승하고 있는 한화의 득점에 환호하고 있을 남편의 모습이 그려졌다. 그 정도는 홈캠이 따로 필요 없을 정도로 생생하게 그릴 수 있었다. 또다시 울화가 치민다. 떼어낸 내 암세포가 아마 이렇게 처음 생겼을 것이다.
24. 4. 6
벚꽃 시즌. 병원에서 벚꽃 개화가 늦어진다는 기사를 보고 내심 기뻐했었는데 다행히 몸을 좀 움직일 수 있는 때 벚꽃이 만개했다. 게다가 주말. 아직 컨디션이 다 돌아온 건 아니지만 돗자리와 도시락을 싸 들고 소풍을 나갔다. 평소 같으면 아이들 쫓아다니느라 바빴을 텐데 나는 캠핑의자를 펼쳐놓고 앉아 솔솔 부는 봄바람을 느끼며 책을 읽었다. 이런 호사가 있나. 평소라면 돗자리 밖으로 나를 수십 번도 더 불러냈을 아이들도 수술한 엄마는 양심상 부르지 않는다. 다정한 남편과 결혼한 여자들은 평생 이렇게 살았겠지. 나는 암에 걸려야 누릴 수 있는 사소한 여유가 누군가에는 평범한 일상이었겠다는 생각을 했다. 웃프지만 내 딴에는 이것도 행복이었다.
나는 요즘 배터리가 금방 닳아버리는 오래된 핸드폰이 된 것 같다. 전원이 켜져 있을 때는 나름대로 잘 작동하는데 어느새 금방 방전되어 버린다. 그래서 활동할 수 있는 낮 시간을 절반으로 나눠 꼭 충전을 해줘야 한다. 피곤해도 낮잠을 자는 법이 없었는데 이제는 스멀스멀 침대로 들어가 기절하듯 짧은 낮잠을 자고 일어나 하루의 절반을 다시 살 에너지를 얻는다. 수술 후에는 내 체력의 한계를 인정하고 피곤할 때는 쉰다. 그전까지는 아무리 힘들어도 낮잠을 자지 않았는데 이제는 어쩔 수 없이 쓰러져 잔다. 무리하지 않고 잠시 쉬어가라는 몸의 신호를 받아들이고 버티지 않게 되었다.
24. 4. 30
어제부로 보험금이 모두 들어왔다. 일십백천만십만백만천만 소리를 내어가며 몇 번을 세어봤다. 살면서 만져본 적도 없는 금액이다. 집 전세 계약을 할 때 통장으로 주고받아 본 적은 있지만 실제로 그런 돈을 갖고 있다고 느끼며 살아본 적은 없었으니까.
이런 것도 좋은 소식이라고 해야 할까. 이왕 아픈 거 돈이라도 많이 받으면 좋은 거겠지. 퇴근하고 온 남편을 소파에 앉혀놓고 너무 좋아하지 말고 들으라고 통장에 찍힌 금액을 보여줬다.
“입꼬리 단속 잘하고 봐봐. 너무 좋아하지 마라.”
“N년 치 대출이자네.”
“우리 빚이 얼만데?”
“X억”
암 진단금 얼마 들어왔다고 바로 현실감각을 잊고 붕 뜨고 있었던 날 남편은 순식간에 땅 위에 단단히 묶어 놓는다.
재테크한답시고 분수에 안 맞는 땅을 사서 팔리지도 않는 것을 허덕이며 끌고 오고 있던 참이었다. 내 소원이 있다면 그놈의 땅을 계약하기 전 삶으로 돌아가는 것. 기내식이 궁금했던 아이들과 드디어 비행기를 타고 여권을 만들어 떠나볼까 들떴던 마음이 차갑게 식었다. 이 어마어마한 돈이 그저 공짜로 생긴 여윳돈처럼 생각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엄마에게 좋은 소식이 있다고 알려드렸더니 그래 잘 되었다 하시더니 조금 있다 메시지가 왔다.
“네 큰 아픔으로 받은 거니 먹는 거나 맘 편히 먹도록 해라. 우리 이쁜 딸~~ 엄만 속상하다.”
24. 5. 2
남편과 식탁에 앉아 보험금의 쓰임에 대한 회의를 했다. 남편은 노트북을 꺼내 엑셀을, 나는 적어두었던 다이어리를 꺼냈다. 그동안 어떻게 하면 더 벌 수 있을까만 생각해 봤지 어떻게 쓸까 생각해 보는 것은 처음이라 입꼬리가 자꾸 올라갔다. 그러면서도 수시로 불안이 엄습한다. 역시, 돈도 있어본 놈이 쓰는 거지.
남편은 아주 조금 내가 원하는 대로 쓰고 나머지는 없는 돈으로 생각하고 묶어두고자 했다. 일부라도 대출금을 갚을지, 이사를 갈 때 쓸지, 돈이야 들어가자면 끝이 없었다. 나는 암에 걸린 후 나에게 마음을 써준 사람들에게 보답을 하는데 쓰고 싶었다. 큰돈은 아니더라도. 그 사람들에게 밥 한 끼라도 사고 싶었다.
사실 우리는 매달을 미션을 클리어하듯 살았다. 어마어마한 대출이자를 내느라 생활비 조금 아끼는 것은 티도 안 나는 수준이었다. 때로는 생활비 보다 큰 대출이자를 내면서 이럴 거면 아끼며 사는 게 무슨 의미일까 허무해졌다. 이번 달은 주식을 팔아서 내고, 이번 달은 적금을 깨서 내고, 이번 달은 저번 프로젝트 대금 받은 걸로 내고, 이번 달은 인세 들어온 것으로 내고. 이런 식이었다.
남편은 여행도 가지 않았으면 했다. 그건 나중에 돈 많이 벌면 가자고. 나는 그것만은 포기할 수 없었다. 큰돈의 보험금이 들어왔는데도 가지 못한다면 우리 아이들은 영영 여권 사진을 찍을 일 없을 것이다. 한몫을 떼어 여행자금이라고 써두었다. 이것만큼은 타협할 수 없었다.
남편이 평소에 갖고 싶어 하던 6만 8천 원짜리 갤럭시 워치. 동네 엄마들과 아이들 물놀이장이 있는 고깃집 예약. 지금까지 보험금 사용 내역은 이것뿐이다. 200만 원이라는 내 몫의 여윳돈은 아마도 이런 식으로 쓰일 것이다. 내 것은 사고 싶은 게 없었다. 4년 전 내 생일날 남편이 큰 마음먹고 선물해 준 50만 원짜리 상품권이 여전히 그대로 있는 것과 비슷했다. 필요한 것은 많지만 사기 시작하면 끝도 없어 차라리 갖추지 않고 살길 선택하게 된다. 그래도 언제든 마음 가는 곳에 내밀길 주저하지 않을 황금 카드를 득템해서 기쁘다. 200만 원이 들어있는 체크카드를 황금카드라고 할 수 있다면 말이다. 어쨌든 한동안은 당장 망할 일 없고 나는 좋아하는 사람에게 돈으로 마음을 보여줄 수 있게 되었다.
나머지는 예금 통장으로 들어갔다. 다시 당근에서 아이 옷을 팔고, 매달 2만 원, 5만 원짜리 적금을 넣고, 어제 쓴 가계부를 떠올리며 아메리카노를 마실까 욕심내서 얼그레이 티 라테를 마실까 고민하는 평소의 나로 돌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