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는 몇 걸음 걷지 않고 주저 않아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옷을 펄럭였다. 아직 15분도 안 걸었는데 벌써 다섯 번째 주저앉아있다. 겨우 5월 중순인데 벌써부터 덥다고 하면 여름에는 어쩔 생각인지. 아직 길에는 긴팔, 긴 바지를 입은 사람도 있는데 더위를 많이 타는 아이는 콧잔등에 송골송골 땀이 맺히는 지금부터 한 여름의 무더위를 느끼고 있는 듯하다.
횡단보도 앞 그늘진 벤치에 아이를 앉혀 놓고 앉았다. 미안하지만 일장연설을 좀 해야 할 타이밍이다. 내 목적은 나 역시 짜증 내지 않고, 최대한 간결하게, 하나를 울리지 않고 이 연설을 끝내는 것.
"덥지. 엄마도 더워. 덥다고 얘기할 순 있어. 그런데 그걸 짜증 내면서 얘기하면 안 되지. 짜증 내는 게 왜 나쁜지 알아? 옆에 있는 사람들까지 기분을 안 좋게 만들거든. 덥다고 그렇게 말하면 옆에 있는 엄마 기분은 나빠져도 상관없다는 뜻이야? 혼자 있을 때는 얼마든지 짜증 내도 돼. 화나면 화내도 돼. 그 얘기를 듣는 건 어차피 너 혼자니까. 그런데 옆에 다른 사람이 있으면 짜증 내지 말고 말로 해야 돼. 지금 여기 있는 사람들이 덥다고 다 짜증 내고 있다고 생각해 봐. 모두 소리 지르고 화내고 있으면 어떨 것 같아? 여름에는 덥다고 짜증 내고, 겨울에는 춥다고 짜증 내는 사람들로 가득할 거야. 배고프거나 뭐가 마음대로 안 될 때마다 사람들이 다 짜증 내고 있으면 어떻겠어? 여기 있는 사람이 속으로는 덥지만 짜증 내지 않고 있는 건 다른 사람들을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야.
하나야. 엄마는 다른 사람을 배려하지 않고 자기 멋대로 하는 사람과는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 그런 사람이랑 밥을 먹거나 산책을 하거나 여행 가고 싶다는 생각은 안 할 것 같아. 엄마는 그 사람을 위해서 예쁘게 말하는데 그 사람은 엄마를 위해 주지 않으니까. 그러니까 그냥 하나가 생각하는 걸 말로 해. 짜증 내지 말고. 그래도 하나가 지금 어떤지 엄마는 충분히 알 수 있어."
다행히 눈물 없이 파란불로 신호가 바뀌기 전 훈육이 끝났다. 하지만 다음에도 하나는 (당연히) 덥다고 난리를 칠 것이다. 나는 문밖을 나설 때마다 짜증 내지 말고 잘 다녀올 것을 당부하겠지. 올여름 이 이야기를 몇 번이나 하게 될까.
내가 가장 불편하게 느끼는 감정은 ‘짜증’이다. 아이들을 키우며 분노보다 더 보기 힘든 게 짜증이었다. 분노에는 원인이 있었지만 짜증에는 대부분 뚜렷한 원인이 없었다. 그냥 기분이 안 좋아서. 쫌 그래서. 짜증 나니까 짜증 내는 게 바로 짜증이다.
나는 그 대책 없는 감정을 드러내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우울인지 불만인지 예민인지 분노인지 제대로 들여다 보고 이야기 해 주길 바랐다. 나는 보통 드러내지 않고 사니까. 이왕이면 스스로 삭이길 바라면서.
하지만 부부란 나와 반대인 사람을 찰떡같이 골라 짝을 맺는 저주에 걸린 사이 아니던가. 김비서는 무척이나 쉽게 짜증을 내는 사람이다. 주차장에 짐을 옮겨야 하는데 짐이 너무 많으면 짜증. 분리수거를 하러 가다가 플라스틱 쓰레기를 흘려도 짜증. 설거지를 하고 있는데 아이들이 자꾸 불러도 짜증. 짜증 짜증 짜증.
남편이 짜증을 낼 때마다 마치 내 행복을 갉아먹는 느낌이었다. 단순히 느낌이 아니라 실제로 사각사각 내 몫의 행복이 사라지고 있는 게 보였다.
별 것 없는 삶에서 행복하기 위해 나 나름의 노력을 한다. 산책을 하고 잔이 예쁜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고. 힘들게 하는 사람과 거리를 두고, 좋아하는 사람을 위해 작은 선물을 사고, 건강한 제철 음식을 챙겨 먹고, 아이에게 화를 내지 않으려 인내심을 키우고, 뿌듯하게 하루를 마감하기 위해 시간을 쪼개 일하고, 향이 좋은 핸드크림을 바르고, 잠들기 전에 핸드폰을 하지 않고, 새벽에 깨도 곧바로 잠들려고 노력한다. 그건 모두 좋은 기분을 유지하기 위함이다.
그렇게 차곡차곡 내 작은 행복을 쌓아 놓으면 퇴근하고 온 남편이 음식물 쓰레기를 정리하다 외치는 ‘아이씨’ 한 번에 와장창 무너진다. 짜증은 힘이 아주 세기 때문에. 순식간에 나뿐만 아니라 집 안의 공기를 바꿔놓는다.
그걸 옆에서 보고 있던 나는 처음에는 이게 짜증낼만 한 일인가 의문스럽다가 화가 났다가 이제는 전염되어 같이 짜증을 내게 되었다. 지나가다가 팔이 부딪혀도 짜증, 아이들이 베개와 이불을 끌고 소파 밑에 들어가도 짜증, 정수기에서 물을 받다가 조준을 잘못해서 흘러도 짜증, 치약 뚜껑이 변기 뒤로 굴러가도 짜증, 짜증 짜증 짜증.
“우주야 그게 짜증 내면서 할 말이야? 좋게 얘기할 수 있잖아.”
“하나야. 더우면 옷을 벗으면 되는 거야. 우리 모두 다 더워.”
우리 집은 짜증이 가득한 곳인가. 저 사람의 짜증이 이제 온 가족에 전염되어 내 긍정회로를 망가뜨려 놨다. 좀 즐겁고 잘 웃는 사람과 결혼했어야 했다. 나보다 더 긍정적이고 별 것 아닌 것에 설레하는 사람.
<나 혼자 산다>를 보며 오래된 시트콤을 보며 혼자 웃는 코쿤을 보며 생각했다. 웃음 허들이 낮은 코쿤 같은 사람이랑 결혼해야 했어야 했다. 그럼 우리 집에도 웃음꽃이 피었을 텐데. 말은 또 얼마나 예쁘게 해. 말만 하면 싸우자는 식인 김비서랑은 차원이 다르잖아. <텐트 밖은 유럽>을 보면서 스키를 탈 줄 몰라 자꾸 넘어지는 전선규를 보면서도 아 저런 사람이랑 결혼할걸 생각했다. 구르고 넘어져도 '오우 예스!'라고 하는 사람 얼마나 좋아.
며칠 전 <인사이드 아웃 2>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은 불안이의 폭주장면이었다. 얇고 빛나는 주황식 빛으로 표현된 라일리의 혼란스러운 감정이 그대로 전해졌다. 불안을 잠재우던 기쁨이처럼 나는 이제 남편의 짜증에 내 안의 유머를 끌어다 쓴다. 긴 시간 시행착오를 통해 알게 된 게 있다면 짜증에는 짜증으로 대응하거나 분노, 슬픔으로 대응해도 잠재울 수 없다는 거였다.
내가 왜 이 사람의 짜증을 웃으며 사그라뜨려야 하는지 억울할 것 없다. 결국은 내 기분을 망치지 않기 위해서니까. 옆에 있는 사람이 날 웃게 하지 못하면 나라도 웃겨야지 별 수 있나. 이왕 부부로 살게 된 거 옆 사람의 행복까지 멱살 잡고 끌어올려야야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