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이 개똥밭을 구르자
시간은 흐르고 흘러, 아이 둘을 키우느라 바빴던 30대의 문희정은 노년을 걱정하는 중년의 문턱에 들어섰다. 앞자리가 4로 바뀌면서부터 나는 자주 미래를 상상한다. 아이들은 점점 집 밖에서 친구들과 더 커서는 애인과 보내는 시간이 많아지겠지. 그러면 나는 한동안 그게 또 서운하다가 차차 적응할 것이다.
이제는 그토록 바라던 내 시간을 알차게 활용할 만반의 준비를 시작해야 할 때다. 이상하고 자유로운 할머니(이상하고 자유로운 할머니가 되고 싶어, 무루), 카페에서 공부하는 할머니(카페에서 공부하는 할머니, 심혜경), 귀여운 할머니(장래희망은 귀여운 할머니, 하정) 사이에서 나는 어떤 할머니가 될 것인가.
할머니가 되어도 엄마는 절대 죽지 말라며 자기 전 내 목을 끌어안는 둘째에게 걱정 말라고, 엄마는 120살까지 살 거라고 호언장담했다. 아이를 안심시키기 위해서 한 말이지만 어느 정도의 뻔뻔한 진심도 담겨있었다. 내 주변에는 개똥밭에 구를 거면 화끈하게 떠나겠다는 이들이 대부분이지만 나는 어떻게든 이승에 붙어 개똥밭을 신나게 구르며 살고 싶은 쪽이다. 가능하다면 오래 살고 싶다. 몇 살이든 그때 누릴 수 있는 즐거움을 악착같이 찾아내 즐기고 싶다.
나는 20대 보다 40이 된 지금 하고 싶은 게 더 많다. 오히려 나이가 들면서 원하는 것을 더 구체적으로 선명하게 바라게 되었다. 지금부터 노화되는 신체에 발맞춰가면서 그 나이의 기쁨을 포기하지 않으려고 한다. 눈이 안 보인다면 오디오 북을 들으며 손의 감각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을 하고 싶다. 허리나 고관절이 안 좋아져서 누워서 움직일 수 없다면 계절의 변화를 느낄 수 있는 쪽으로 침대를 옮겨 온종일 창밖을 바라보고 싶다. 불행하지 않으리라 대책 없이 낙관하는 것이 아니라 불행과 고통사이 숨겨진 다행을 발견하길 포기하지 않으려는 것이다.
가만히 누워 다른 사람의 손을 빌어 입고 먹고 씻어야 하는 때가 오더라도 수치심으로 나를 좀먹지 않고 싶다. 한평생 혼자서 제 몫의 삶을 사는 시간은 생각보다 많지 않으니까. 한 사람이 태어나고 자라는 데는 어차피 곁에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하지 않았나. 하루 종일 가만히 누워 책과 영화에 파묻혀 사는 삶에도 행복을 있을 거라 믿는다.
내 수명이 다하는 날까지 의지대로 움직일 수 있다가 눈을 감는다면 축복이겠지만, 그게 아니라고 해도 내 삶은 계속될 것이다. ‘환자’라는 이름표를 달고 수십 년을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어느 날 갑자기 갑상선 암 진단을 받고 수술을 하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온 것처럼. 어느 날 갑자기 이제는 사라졌다고 생각한 작은 암조각이 남기고 갔던 흔적이 사이즈를 키워 재발할지, 유방암 환자가 될지, 자궁암 환자가 될지 모를 일이다.
그저 무릎이 성할 때 열심히 걷고, 갑각류 알레르기가 생기기 전에 새우를 맛있게 먹고, 노안이 심해지기 전에 아름다운 그림을 보고 많은 책을 읽고 싶다. 평생 잘 관리해서 비가 오면 파전에 막걸리를 먹고, 무더운 여름에는 시원한 맥주 한 잔을 마시고, 축하할 일이 있는 날에는 저녁식사에 와인을 곁들이고 싶지만, 그러지 못하고 하더라도 예상했다는 듯 받아들이고 싶다. 손가락 관절이 허락할 때까지 뜨개질을 하고, 하루 한 잔의 카페인이 허락될 때까지는 좋아하는 카페를 탐방하며 더 소중하게 커피를 마시고 싶다. 언젠가 인쇄나 판화도 수작업으로 배워보고 싶고, 예전 취미였던 필름카메라도 기회를 엿봐 다시 시작해 보고 싶다. 그때도 여전히 요리를 좋아할 테고, 물가를 찾을 테고, 내가 아니더라도 세상에 흥미로운 문학과 예술은 계속 만들어질 테니까.
그때도 역시 남편이 걱정이다. 김비서는 가끔 월차라도 낸 날에는 뭘 해야 할지 몰라 집에서 빨래나 게다가 끝나버린다. 그럴 거면 피시방이라도 가라고 등 떠밀면 두세 시간 게임하다 오는 게 전부다. 닌텐도랑 웹툰, 야구 중계 보는 거 말고 김비서의 노년에는 무슨 즐거움이 있을까. 노년에 즐길 수 있는 취미는 둘째 치더라도 그의 노년의 삶이 잘 그려지지 않는다. 출근도 안 하는 그 긴긴 시간을 내 옆에 붙어 뭘 해야 할지 몰라 심심해 죽을 지경으로 앉아 있으려나. 하지만 취미를 강제로 만들어 줄 수도 없는 노릇이다.
바지를 사느라 '당신 허리가 36이었나 38이었나' 물으며 진짜 이제는 술 안 마시고 관리를 좀 해야 한다. 나는 나이 들어서도 건강하게 술도 즐기며 살고 싶다. 잔소리를 해도 건성이다. 지금부터라도 취미를 만들어라. 운동이든 뭐든 좋으니 좀 배워라. 해도 알았다는 대답 이후 행동으로 이어지는 꼴을 못 봤다.
할머니가 된 나는 여전히 하고 싶은 것도 해야 할 것도 많은 것 같은데, 이 할아버지는 그때도 소파와 한 몸이 되어 티브이에서 해주는 신세계나 타짜 같은 영화를 보고 또 보고 있을까. 나이가 들어서도 우리 조금 즐겁게 살았으면. 여전히 하고 싶은 게 많은 할머니 할아버지로, 우리 둘이서 구를 개똥밭에 노년의 즐거움이 산재했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