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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희정 Aug 23. 2024

내 세계의 장르를 결정하는 말

그러니까 상냥하게 말해

“상냥하게 말해. 하나가 듣고 싶은 말투로 다른 사람한테도 말하는 거야.”

하나를 키우며 내가 골백번은 했던 말이다.

“기분 나쁘게 말하지 마. 같은 말이어도 좋게 말할 수 있잖아.”

이건 내가 김비서와 살며 골백번도 더 한 말이다.


가끔 나 혼자 친절을 베풀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이 집에서 서로의 기분을 생각하고 다정하게 말하려는 사람은 나뿐이라는 생각이 들면 나도 막살고 싶어 진다. 되는대로 내뱉은 건 아주 쉬우니까.


어제도 같은 이유로 하나를 혼냈다. 그러다 하나를 혼내는 내 말투가 걷잡을 수 없이 내가 기피하던 딱 그 방식으로 나와버렸다. 훈육과 폭력은 종이 한 장 차이, 나는 어느새 아이의 기분을 망치고 싶어 되는 대로 쏘아대고 있었다. ‘내가 다 망쳐버렸어. 엄마는 나를 제일 좋아한다면서 왜 그렇게 말해.’ 틱틱거리고 비아냥대는 내 말을 듣고는 하나가 운다. 그러면 나는 정확하게 내가 가장 그 싫어하는 사람, 아이에게 이렇게 되지 말라고 했던 못난 사람 그 자체가 되어버린다.

‘되는 대로 말하고 안 좋은 기분을 숨김없이 드러내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배려하지 않는 거야. 엄마는 그런 사람이랑 같이 있고 싶지 않아.’ 그게 바로 어제의 나였다.



며칠 전 카페에서 책을 읽다가 김비서에게 내가 글을 쓰고 책을 만드는 일을 하는 건 어쩌면 내 지적 허영을 채우기 위한 것인지 모르겠다는 얘기를 했다.

“당신 공부를 안 했잖아.”

어디 사람 기분 나쁘게 하는 방법을 따로 배워왔나. 당신은 그래서 수 했냐. 공부를 하도 해서 이제 책이랑은 담쌓았냐 따져 물을 수도 있었다. 나도 되는 대로 내뱉은 사람이었다면 말이다.

내가 유독 아이의 말투에 민감한 것은 내 아이가 김비서처럼 말하는 어른으로 키우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내뱉은 말은 내 기분을 만들고, 주변의 공기를 바꾸고 시간이 지나 내 세계의 장르를 결정한다고 믿는다.


   

아이가 아파서 24시간 하는 동네 병원에 갔는데 수액실 너머 빽 소리를 지르며 우는 아이의 서러운 목소리가 들린다. 아픈 아이가 커다란 바늘을 꽂는다는데 울지 않을 수 있나. 목소리를 들어보니 아직 어린이집에 다닐 나이. 움직이면 위험할 텐데 무사히 그 시간이 지나길 바라며 나는 병원 로비에서 아이와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안 하겠다고 버티는 아이의 목소리 뒤에는 아마도 아빠일 사람의 목소리도 들렸다.

“야이씨. 가만 안 있어? 야, 울지 마. 울지 말라고 했다. 쫌!”

아픈 아이를 진정시키는데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 협박이었다. 보호자라는 사람이 어리고 아픈 아이에게 해서는 안 될 말이었다. 저런 사람 지옥에나 떨어져 버렸으면. 초능력자 라도 되는냥 속으로 되뇌었다. 말로 죄를 짓는 사람들, 상처 주는 사람들 모두 지옥에나 떨어져 버렸으면. 저게 얼마나 큰 잘못인지 모르고 떠드는 사람들 뒤늦게라도 후회할 수 있게 지옥에 그런 자리도 마련되어 있길.


그러다 정말 그렇게 된다면 그 지옥에 내가 아는 사람도 꽤나 있을 것 같아 마음속으로 빌던 것을 슬그머니 철회했다. 취소 취소합니다. 지옥의 커트라인을 다정함과 상냥함에 맞춰 낮췄다가는 우리 가족은 죽어서 한 곳에서 만나지 못할 수도 있어요. (남편은 거기서 엄마와 함께 외롭지 않겠지만.)



결혼하고 수년간은 시가에 다녀오면 끝내 소화하지 못한 말을 며칠 동안 밀어내다 실패하고 남편에게 털어놓았었다. 남편은 묵묵히 듣는 것으로 아마도 최선이었을 대답을 했다. 상황을 정리하거나 나를 비난하거나 어머니를 두둔하지도 않는다. 애초에 더 이상 상처받지 않기 위해 지금부터 시어머니를 바꾸겠다는 기대 없이 한 말이었기에 그것만으로도 위로가 됐다. 가만히 듣고 앉아 있기도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다 어느 날 남편이 대화의 끝자락에 ‘당신은 참 말 한마디에 한마디에 의미를 두네.’라는 말을 등뒤로 흘린다. 남편의 말 그대로 나는 그 말을 주어다 또 며칠을 괴로워했다. 말 한마디에 큰 의미를 두는 게 잘못된 건가. 내가 소심하거나 예민해서가 아니라 당연한 것 아니었다. 그러니까 동서고금 막론하고 말을 신중해야 하라고 당부하는 것 아닌가.

이제 김비서에게 내가 책을 만드는 이유를 정정하고 싶다. 내 지적허영을 채우기 위해서가 아니다. 말의 의미가 너무나 중요해서 생각하고 또 퇴고해서 다듬어 글로 쓰고 있는 것이다.



한 번은 우주가 친구와 시험 답안을 맞춰보다 으스대듯 말했다.

“나 공부 하나도 안 했는데 내가 더 잘 본 거 같은데?”

나는 그 말이 아주 따갑게 가슴에 꽂혔다. 그게 사실이라면, 정말 내 아이가 친구보다 잘 봤다면 이 상처를 어떻게 사과할 수 있을까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집에 와서 채점해 보니 이게 웬걸 우주가 친구보다 20점이나 낮다.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정말 다행이었다.


제 점수가 몇 점인지 그다지 신경 쓰지 않고 있던 우주를 불러다 앉혔다. 내 진지한 표정을 보고 점수가 낮아 그런 걸까 살짝 얼어있던 우주는 아까 했던 말에 대해 꺼내니 조금 놀란 눈치다. 엄마가 다 듣고 있는지 몰랐겠지.

“우주야. 아까 한 말 생각나? 엄마는 친구가 험을 더 잘 봐서 오히려 다행인 것 같아. 친구가 점수가 높으면 그냥 우주가 경솔하게 말한 걸 창피해하고 말겠지만 정말 네가 더 잘 봤어봐, 그럼 넌 친구한테 상처 주는 말을 한 거야. 잘 봤든 못 봤든 앞으로는 그런 말 하는 거 아니야. 조심해.”

 

말 한마디에 큰 의미를 두는 사람이라 나는 또 아이의 지나가는 말을 흘려보내지 못하고 주의를 줬다. 나는 때론 진심보다 말이 더 중요하다고 느낀다. 말하지 않아도 안다는 광고 카피는 말 대신 행동을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행동으로 보여주지 못할 때는 말이 거의 전부다. 말 외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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