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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희정 Aug 28. 2024

결혼기념일이라 써보는 글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당신이 좋으니까


미용실에 갔는데 염색약을 바르고 앉아있는 내 옆으로 파마를 하러 온 손님과 원장님의 대화가 오간다. 손님은 집에서 남편이 기다리고 있다고 빨리 가서 저녁을 해줘야 한다고 했다. 아직도 저녁을 차려줘야 되냐 알아서 먹으라고 해라 뭐 그런 이야기들이 오가다 대화는 자연스럽게 나에게 토스됐다.

 

“아니, 그렇지 않아요? 뭔 밥을 해달래. 손님은 남편이 어쩌면 좋겠어요?”

“네…? 저는 그냥 말을 안 걸어줬으면 좋겠는데.”


깔깔깔깔. 셋 뿐인 미용실에 웃음이 터졌다. 그렇지 그렇지. 맞아. 남자들을 여자를 귀찮게 한다니까.



나는 기회만 되면 남편 흉을 본다. 아이들 앞에서만 하지 않을 뿐, 내 주변에 있는 성인이라면 처음 만난 사람이든 10년 지기 친구든 친분관계를 떠나 수시로 튀어나오는 김비서 이야기를 들을 각오를 해야 한다. 하지만 긴장은 하지 않아도 된다. 진지함은 쏙 뺀 해탈한 스님이 웃으며 알려주는 인생의 쓴 맛 같은 농담이니까.


“김비서는 하숙집 청년 같지. 애들이 안방으로 가면 핸드폰 들고 거실로 나오고, 애들이 거실로 나오면 안방으로 들어가고. 뭐 거의 만날 일이 없어.”

놀아주는 건 거의 아빠가 해준다는 집 이야기 뒤에 내가 이렇게 덧붙이면 모두가 웃었다. 내 농담 겸 속풀이는 사실 내가 웃기 위해 하는 이야기에 가깝다. 웃지 않으면 어쩌겠는가. 울고 싶지는 않다.



내 인생에서 가장 잘한 일이 남편을 만난 것이라는 학생의 글을 첨삭하면서 나는 고작 이런 글을 쓴다. 결혼을 다시 하기 전까지는 달리 방법이 없다. 세상에는 남편을 인생의 유일한 복이라 생각하는 사람도 있고 숙제라 생각하는 사람도 있는 것이다.

숙제를 푸는 사람의 직업이 마침 글을 쓰는 것이라 나는 남편이 한 짓을 만천하에 공개한다. 한 번의 말실수를 놓치지 않고 기억했다가 글의 소제로 삼아 내가 얼마나 상처받았는지 박제한다. 이기적인 인간이라고, 오늘도 회식이라고, 딸바보 아들바보도 있다는데 얘는 그냥 바보라고 인스타에 브런치에 뉴스레터에 동네방네 올린다. 제 얼굴에 침 뱉기라는 것 역시 알고 있다.


나는 내 얼굴에 침을 뱉으며 견디고 있다. 이건 내 방식의 버티기다. 누군가는 대청소를 하고, 친구를 만나 수다를 떨고, 운동을 가고, 술을 마시듯 나는 내가 할 수 있고 좋아하는 것으로 버티는 글을 쓴다. 글을 쓰는 건 결국 나를 잘 알아가려는 과정이다. 나와 잘 지내보려고 애쓰는 것이고 내 아이 돌보듯 내 삶 전체를 세심하게 관찰하는 것이다. 그러니 남편에 대한 글을 쓰는 것은 그를 이해해 보려는 시도다. 갖다 버릴 수도 없는 어두운 감정을 해소하려는 노력이다. 남아있는 사랑을 잃지 않기 위한 울타리 치기다.


지인들이 지겹도록 들은 김비서의 만행을 속속들이 알면서도 그럴 거면 헤어지라든가 끝내라는 말을 하지 않는 것은 그 말속에, 글 속에 잘 살아보려는 내 의지를 읽었기 때문일 것이다. 내 친구들이 내가 남편 욕을 그렇게 해도 그를 미워하지 않고 가끔은 다정한 사이로까지 보는 것도 같은 이유겠지.




헬싱키로 혼자 일주일간의 여행을 준비할 때 좀처럼 잔소리가 없는 김비서가 두 번이나 한 얘기가 있다. ‘당황하지 말고 천천히. 천천히 하면 다 할 수 있어.’ 나는 그 말을 여행 내내 자주 떠올렸다. 신용카드 핀 번호가 다르다고 나올 때도, 기계에서 티켓이 나오지 않을 때도, 호텔에서 얼리 체크인이 되지 않는다고 했을 때도. ‘천천히 하면 돼.’ 나를 다독였다.


김비서가 나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은 아니지만 그는 나도 모르는 나를 안다. 내가 ‘딱 좋아.’라는 말을 자주 한다는 것도, 다른 사람의 평판에 무척 쉽게 흔들리는 것도, 전화를 받지 못하고 거절 버튼을 눌러대던 나에게 단순한 문제가 아니라고 심각성을 처음 깨우쳐 준 것도 남편이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전화벨이 울렸을 때 발신자 표시에 뜬 이름 중 내가 아무런 긴장도 하지 않고 받는 유일한 사람이기도 하다.


여행을 갈 때마다 가족들을 위한 코스를 짜느라 머리를 싸매고 있는 나를 보며 당신이 유일하게 마음 편히 여행 갈 수 있는 사람은 나뿐이라던 김비서의 말도 (인정하기 싫지만) 맞다. 김비서 앞에선 뭔 짓을 해도 된다. 내가 뭘 하든 괜찮다고 가만히 두는 사람이다. 원래는 그러지 않지만 남편이 먹던 곰보빵 끄트머리를 야금야금 뜯어먹으며 이건 겉 부분이 맛있다고 하면 김비서는 먹기 편하게 겉 부분만 떼어 쟁반 위에 놓는다. 김치 줄기만 먹는 나 때문에 이파리만 주구 장창 먹는다. 시원하게 코를 풀고 휴지를 산처럼 쌓아놓고 있으면 비위 좋은 남편이라 얼마나 다행이냐고 당신 이러려고 결혼한 거 같단다. 김비서 앞에서는 잘 보이려 애쓰기는커녕 오히려 막 이상하게 군다. 받아주는 사람 앞에서만 떼쓰는 아이처럼.



부부의 결속력은 그래서 이 사람과 끝낼 것인가 라는 마지막 물음 앞에서 단단해진다. 그렇게 미워하는 사람과 어떻게 살 수 있냐고 물으면 지난밤의 앙금이 아침까지 이어져 냉랭하게 말 한마디 하지 않다가도 지나가다 남성복이 세일하면 '당신 여름옷 하나 살까. 여기 진짜 싸다.'고 메시지를 보내는 게 부부라고 설명할 수밖에 없겠다. 모든 게 지긋지긋한 상황에서도 대부분의 부부가 그렇듯 저녁밥은 어떻게 할 건지 기침은 좀 나아졌는지 서로의 안녕을 체크한다.


만나는 사람마다 숨 쉬듯 김비서의 못마땅한 점을 읊으면서도 왜 갈라서지 않느냐 당연히 (인정하기 싫지만) 이 사람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밉고 싫고 서운하고 원망스럽고 가끔은 끔찍할 때도 있지만 그럼에도 이 사람을 좋아하는 단 하나의 마음이 그것들보다 크기 때문에. 아직은 건재하기 때문에. 그러니 이 험담은 거꾸로 엉뚱한 고백이 되기도 한다.    





뭔가 결혼 기념일에는 꼭 김비서 이야기를 써야 할 것 같은지. 작년 결혼기념일에도 글을 썼네.

가장 편안한 내가 된다 (brunch.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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