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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희정 Oct 02. 2024

남편을 김비서라 부르는 이유

우리 부부의 역할 분담

남편의 별명이 김비서가 된 것은 우리의 역할 분담 때문이었다. 1인 출판사를 꾸려나가려면 몸 하나에 역할은 수십 가지여야 한다. 작가도 하고 편집자도 하고, 가끔은 디자인도 하고, 마케팅과 판매도 하고, 우리 집이 물류센터인가 가정집인가 착각할 정도로 책과 굿즈를 쌓아두고 택배를 포장할 때도 있다. 

그것 만으로도 쉽지 않았지만 더 큰 문제는 내가 두 아이의 엄마라는 사실이었다. 두 아이의 길어진 손톱과 계절에 맞는 옷과 매일 풀어야 할 학습지와 놀이터에서 먹을 간식을 챙기는 것도 내 몫이었다. 누가 날 좀 도와줬으면. 간절하게 내 일을 나누어 줄 사람이 필요했다. 


도저히 안 되겠기에 남편에게 비서직을 제안했다. 아니 반 강제로 임명했다. 남편과 아빠 역할을 100% 수행하지 못하고 있던 그에게도 차라리 나를 보좌하는 업무를 주어주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남편이 맡은 주요 업무는 ‘내가 하지 못하는 것’ 하기다. 나는 수에 약해서 큰돈을 이체하면 손이 달달 떨린다. 혹시 계좌번호 하나 잘 못 눌러서 엉뚱한 곳에 보내면 어쩌나 여러 번 확인하고도 날 믿지 못해 불안하다. 은행에서 대출을 받거나 이사 때문에 거액의 돈을 이체해야 하는 날은 그게 뭐라고 아침을 먹지 못할 정도로 긴장한다. 

덕분에 출판사 업무 중 가장 어려운 것이 숫자다. 엑셀이나 계산서 발행 같은 것은 거북이 못지않게 굼뜨다. 노트북 어딘가에 저장해 놓은 책방의 사업자 번호를 찾고 입금 금액을 확인하는 일이 왜 그렇게 익숙해지지 않는 것인지. 그때마다 김비서는 문화다방의 계산서 발행 담당자가 되어 순식간에 밀린 업무를 처리한다. 내가 반나절 끙끙거리던 것을 30분도 안 돼 해치우는 것을 보고 완벽하게 손을 뗐다.


또 다른 업무는 운전이었다. 전국 방방 곳곳 페어나 북토크 등 책 관련 행사가 있을 때는 가족이 모두 함께 움직이는데 그럴 때마다 김비서는 김기사가 되어 고속도로를 누볐다. 다행히 김비서는 김기사의 역할도 훌륭하게 수행했다. 평소 운전하는 것을 싫어하는 편이 아니라 내가 주말에 어디 갈까 고민하고 있으면 한두 시간 거리 정도는 별 것 아니라며 쉽게 떠나자 얘기했다. 김비서는 매일 고속도로를 타고 90km를 출근했다 다시 90km를 퇴근하는데 나였다면 주말에는 차 근처에도 가지 않았을 것이다. 다행히 운전과 숫자는 그에게 크게 스트레스가 아니라 부딪히는 일 없이 지금까지 잘해오고 있다. 고마운 일이다.


아이가 초등학교 4학년이 된 후로 수학 문제를 풀어주는 것도 김비서의 몫이 되었다. 내가 해답을 설명해 주는 것이 어려워지는 시기가 이렇게 빨리 오게 될 줄 몰랐지만 2학기부터 나는 공식적으로 아이의 수학 교육에서도 물러났다. ‘애 수학 공부 좀 도와줘.’라는 입력값으로는 김비서를 제대로 움직일 수 없으므로 ‘매주 주말 서술형 수학문제 집 3장 풀이’라는 디테일한 업무 지시를 했다. 물론 더 상냥하게 이야기할 수 없냐, 아이의 자존심까지 깎아내리지는 말라는 추가적인 지시도 계속 업데이트되었다.  


남편이 당연히 해야 하는 것, 남편도 할 수 있는 것을 굳이 비서라 칭해가며 나눈 것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정신 건강에 이로웠기 때문이다. 회사에서는 주체적인 인간이었다가 집에만 오면 수동적이 되는 사람에게는 남편과 아빠로서의 몫을 해내길 기다리기보다 제2의 업무로 안겨줘는 것이 편리했다. 안 해도 그만, 좀 쉬었다 해도 그만인 일이라 생각하면 빠릿빠릿하게 움직이는 법이 없는 사람이니까. 


사실할 수 있지만 하지 않는 것도 있다. 분리수거와 음식물 쓰레기는 김비서 담당인데 특히나 음식물 쓰레기는 주말부부 시절을 제외하고는 나는 손댄 적이 없다. 오죽하면 주말부부를 하게 되면서 음식물 쓰레기 버릴 때 쓰는 카드 사용법을 새로 배워야 했다. 결혼하면서 물 한 방울 안 묻히게 해 주겠다는 비현실적인 약속은 하지도 받지도 않았지만 적어도 물이 뚝뚝 떨어지는 음식물 쓰레기 봉지는 만지게 한 적 없으니 이것만큼은 칭찬해 줄 만했다. 만약 남편이 나보다 먼저 땅에 묻힌다면 비석에 ‘아내에게 음식물 쓰레기를 만지게 하지 않은 남편’이라 적어주겠다는 약속만큼은 꼭 지킬 작정이다.


남편은 종종 욱욱 거리며 봉지를 들고 서둘러 현관을 나간다. 그러면서 이거 당신이 버렸으면 난리 났을 거라고 자기니까 이 정도라 으스댄다. 비위가 좋은 편이라 의무소방이었을 때 별별 걸 다 봐도 아무렇지 않았다고. ‘응응. 맞아.’ 동조했지만 사실 비위는 나도 어디 가서 뒤지지 않는다. 사실 나는 김비가와 주말부부일 때 음식물 쓰레기 버리는 것이 전혀 괴롭지 않았다. 코와 입을 막고 물티슈를 챙겨 호들갑을 떨 필요도 없었다. 하지만 당신에게는 영원히 비밀. 나는 당신에게는 평생 비위가 약한 여자로 남을 예정이다. 


글을 쓰다 보니 몇 해 전 돌아가신 김비서의 외할머니가 생각난다. 어쩌다 김비서가 집에서 설거지를 했다는 이야기가 나왔더니 하시는 말씀이 그럼 너는 뭘 하냐 하셨지. 세대가 다르니 서운하지는 않았다. 

“그거 빼고 전부요. 모-두 다 제가 하죠.” 웃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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