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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희정 Dec 05. 2023

고려 거란 전쟁 보다가 부부 전쟁

김비서 시리즈 : 리얼 부부 현실 에세이

토요일 밤. 막걸리 한 병과 맥주 한 캔을 먹고 거실 침대에 기대앉아있다.(거실 소파 대신 싱글 침대 매트리스를 놓고 주말 부부를 끝낸 김비서의 잠자리로 쓰고 있다) 잘 유지하고 있던 간헐적 단식은 김비서가 집으로 들어온 후부터 번번이 실패하고 있다. 이상하게 먼저 술을 먹자고 하는 것도 아닌데 자꾸 저 사람만 보면 (좋은 의미로) 술 생각이 난다. 오늘도 술을 곁들인 거나한 저녁을 먹고 잠들기 전까지 자유시간. 

아이들은 핸드폰을 하나씩 들고 안방 침대에 누워 있고 우리는 김비서가 무척이나 기다리고 있던 <고려 거란 전쟁>을 보기 위해 거실 티브이 앞 침대로 자리를 옮긴 참이었다. 


나는 결과가 뻔한 전쟁 이야기도 보기가 힘들다. 


"어떡해… 횃불 올려야 되는데 거란 애들 나타났어. 저거 전쟁 이겨? 저? 지는 거야? 어떻게 저거 때문에 왕이 도망치는 거야? 어떡해 어떡해…."

"아니 천 년 전에 있었던 일로 지금 그러는 거야?"


나는 지금 보는 드라마가 마치 현재의 일처럼 안타깝고 김비서는 그런 나를 이해 못 한다는 얼굴이다. 부끄럽게도 역사를 잘 모르는 나는 자꾸 결과를 알리가 없으니 지금의 일인 것 마냥 급박하다. 나 때문인지 술 때문인지 김비서도 덩달아 전쟁씬에 몰입했다.


"내가 저기 달려 나가는 병사 2야. 개죽음당하는 거지. 그래도 나라를 살리기 위해 싸울 거야."

"그러면 나는 애 둘 키우면서 이러겠지. 이 개노무 새끼 살아서 온다더니. 죽어버리면 어쩌자는 거야."



우리가 자주 얘기하는 주제가 있다. 우리가 일제강점기에 태어났다면 항일 운동을 할 것인가 아닌가. 나의 기준은 아이들이 있느냐 없느냐에 있다. 남편과 나의 가치관과 애국심은 합의된 것이라 결혼했을 것이다. 매국노였든 애국자였든 끼리끼리 만났겠지. 그렇지만 아이들은? 그저 우리 사이에서 태어난 것일 뿐인 아이를 지킬 수 있는 것은 부모밖에 없지 않나. 여기서 우리의 의견은 완전히 갈린다. 


김비서는 나라를 잃으면 아내도 아이도 살아남을 수 없다. 

나는 나라가 다 무슨 소용이냐 내 새끼가 죽는다면 다 소용없다. 

우리의 이 의견차이는 한 번도 좁혀진 적 없이 팽팽하다. 마치 그 시대에 태어나기라도 한 것처럼 매번 진지하다. 김비서는 항일 운동을 한다고 만주든 어디든 집 밖으로 쏘다닐 것이고, 고문에 시달려도 절대 동지의 이름을 밝히지 않을 거고, 감옥에서 죽어 훗날 기억에 남은 위대한 인물이 될지도 모른다. 나는 아이 둘을 데리고 단출하게 짐을 싸 산속으로 들어가든 기댈만한 친척집에든 갔을 것이다. 우리는 기필코 살아남을 것이라며. 독립운동 하는 아버지는 절대 모른다고 해야 한다고. 최대한 몸을 사리고 목숨을 부지할 생각을 하라고. 아이들을 지키기 위해 무슨 짓이든 하겠지. 그러다 들키더라도 창씨개명을 하라면 할 것이고 일본말을 배워야 한다면 그럴 것이다. 


매국노 아내와 독립운동가 남편의 망상은 한 번도 합의된 적이 없다. 나는 나라를 구해봤자 아이들 얼굴 한 번 못 보는 아빠가 아빠냐. 그런 아버지 따위 필요 없다. 최악이라고 혀를 내두르고 당신도 말은 그렇게 하지만 그 당시에 정신 똑바로 박힌 사람이라면 그럴 수 없을 것이다로 팽팽하다. 

우리는 어느새 거실의 드라마는 잊고 목소리를 높인다.(이게 다 술 때문이다. 싸울 일이냐고 이게.)


 "성공한 사업가가 되고 싶거나 자유로운 예술가로 살고 싶다면 아이를 낳지 말아야 해.  그 꿈을 응원해 주는 사람과 결혼이야 할 수 있겠지만, 엄마나 아빠의 역할을 할 여유가 전혀 없는 사람이 애초에 왜 아이를 낳으려는 거야. 무책임하게."


김비서가 대단한 사업가도 아니고, 방만한 예술가도 아닌데 나는 얘기하다 보니 머리끝까지 화가 났다. 


“티브이에서 봤는데 에디슨이 엄청 아끼던 아들이 평생 함께 보낸 시간이 일주일이 채 안 됐대. 20시간이랬나? 아무튼. 그게 아빠냐고. 아빠가 에디슨이면 뭐 해. 얼굴 볼 시간도 없는데. 업적을 떠나서 나는 에디슨 같은 놈을 아빠로, 배우자로 진짜 혐오해. 너무 싫어.” (확실히 술에 취해있었다.)


김비서는 당신이 가족을 너무 유대관계의 입장으로만 보는 거라고, 아이를 낳는 문제는 시대에 따라 상황에 따라 달라야 하는데 내가 너무 좁게만 생각한다고 했다. 그럴때면 당신 장인어른이랑 똑같다고 내 민감한 부분을 건드린다. 


"당신은 당신이 맞다고 생각하면 그거 외에는 다 말도 안 되는 생각이잖아. 그럴때 보면 장모님이랑 똑같아."


왜 부부 싸움에서 서로의 부모님이 언급 되는 경우는 최악의 순간일 뿐일까. 나는 김비서가 얘기하는 엄마 아빠의 그 여지 없는 강한 고집이 어떤 것인지 너무 잘 알아 잠시 주춤했다. 우리의 시각은 보통 그렇다. 나는 좁고 확고하다. 남편은 넓고 유연하다. 그걸 알아서 씩씩 거리다가 머쓱해질 때가 있다. 그러니 '그러는 너는 왜 아버님을 안 닮고 이 모양이냐. 니가 이런건 그럼 어머님을 닮은 거냐' 한 소리 하고 싶지만 참기로 한다. 그건 끝장을 보자는 거니까.


적절한 타이밍에 강감찬이 등장했다. 와. 역시 연기 장난 아니네. 우리 둘은 잠시 휴전상태로 최수종의 연기를 감상했다.


“그나저나 저게 그 얘기는 아니지? 와이프랑 애들 싹 다 죽이고 전쟁 나가는?”

“계백? 아니지 그건 백제 얘기고 저건 고려잖아.” 


“아 진짜 개새끼 아니야? 지가 나가서 정신력으로 싸우든 지든 해야지. 가만히 있는 애들을 왜 죽여 죽이길.” 

최수종이 그런 역할을 맡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가상 매국노이자 역사 무식자의 분노는 에디슨에서 계백으로 넘어갔다. 김비서는 이쯤에서 다시는 나와 술 마시고 고려 거란 전쟁을 보지 않겠다고 결심했을지 모른다. 시리즈 : 리얼 부부 현실 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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