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카오뱅크 땡큐
친정에 갔더니 엄마가 조심스럽게 통장 하나를 숨겨 방으로 들어왔다. 아빠가 서류를 정리하다 오래전 내 이름으로 만든 사업자 통장을 찾았다는 거다. 엄마는 아빠에게 이거 예전에 다 쓴 통장이라고 천연덕스럽게 둘러대셨다고 했다.
“엄마가 통장 정리 해봤어. 여기 사백 있으니까 우리 둘이 나누자.”
갑자기 모녀의 007 작전이 시작됐다. 엄마는 내 짐가방 깊숙한 곳에 어서 숨겨두라고 거실에 있는 사위나 남편이 들을 수 없도록 작게 속삭였다. 대단한 첩보작전이라도 하는 듯 진지한데 자꾸 키득키득 웃음소리가 새어 나온다.
돈의 정확한 주인을 찾기 어려운 통장이긴 하다. 이름은 내 명의지만 친정 식구들과 함께 한 일이었고 돈의 출납은 아빠와 남편이 관리했으니까. 어찌 됐든 지금 이 통장에서 돈을 꺼낼 수 있는 건 나뿐이다.
친정에서 거대한 비밀을 하나 가지고 돌아온 후, 항상 들고 다니는 노트북 가방 안쪽 가장 깊숙한 곳에 통장을 보관하고 시한폭탄을 들고 다니듯 조심했다. 남편에게 들키면 뭐라고 얘기해야 하나. 높은 확률로 ‘이백? 당신한테는 큰돈이겠지. 잘 가지고 있어.’ 할 테지만 (그릇이 간장 종지 만한 나와 달리 남편은 없는 주제는 그릇만 큰 편) 만에 하나 없는 살림에 돈 이백이 생겼는데 말을 안 했냐며 서운해할지도 모른다. 어떤 반응이든 아무쪼록 이 돈은 들키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다.
사실 오래전에 비상금을 들킨 적이 있다. 그때는 현금으로 야금야금 모아둘 때였다. 당근 마켓에서 작아진 아이 옷 판 돈, 친구들과 만나서 내 카드로 결제하고 현금으로 받았던 돈을 차곡차곡 딴 주머니에 모았다. 현금으로 모으는 거라 아주 더디게 늘었지만 아주 가끔 꺼내서 세어보고 혼자 흐뭇하곤 했었다.
비상금 은닉 장소는 엽서와 카드, 예쁜 포장지 같은 것을 모아두는 내 전용 서랍이었다. 그중에서도 아끼는 꽃무늬 포장 봉투 안에 넣어두었다. 절대 들킬 일 없다고 생각했던 그곳을 어쩌다 남편이 열어 봤을지 여전히 미스터리인데, 남편은 그 돈을 발견하고는 내가 숨겨두었을 거라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은 듯했다. 내가 경조사를 대비해서 봉투에 넣어두고 잊었나 보다고 쉽게 지나갔다. 얼마 안 되는 돈이라 그런지 비상금으로도 보이지 않았다는 점이 다행이면서도 시쳇말로 킹받는다.
엄마에게서 건네받은 통장에 돈을 빼려니 걸림돌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ATM 기계로 뽑으려니 통장 거래 미등록. 그러면 창구에 가야 했는데 마침 신분증을 잃어버려서 새 주민등록증부터 발급받아야 했다. 공돈 이백 생기기가 어디 쉬운가. 사진관에 들러 급하게 사진을 찍고 읍사무소에 가서 신분증을 대신할 수 있는 서류를 받아 왔다.
드디어 가능해진 출금의 순간. 통장에 있는 돈을 빼려고 은행에 가는 데 CCTV가 신경 쓰이는 건 무슨 일일까. 이게 남의 돈도 아닌데 나는 도둑질이라도 하듯 뚝딱거렸다.
“통장에 있는 돈을 이 계좌로 이체하려고요.”
미리 적어두었던 카카오 계좌번호를 적은 메모지를 함께 건넸다.
“비밀번호가 틀리다고 나오는데 새로 만들까요?”
“네. 워낙 오래전에 만든 거라 기억이 안 나네요. 짐 정리하다 몇 년 전에 만든 걸 찾은 거여서….”
네 아니요만 하면 될 것을. 내가 왜 이 통장의 비밀번호를 기억하지 못하는지 굳이 설명하고 있다. 아, 이래서 거짓말을 하면 말이 많아진다는 거구나. 비밀번호를 새로 만들고 통장까지 새로 발급하고 이체를 모두 마친 후에 은행 밖으로 나와서야 깊게 한숨을 쉬었다. 이거 두 번은 못 할 짓이다. 바로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은행에서 내가 얼마나 이상하게 굴었는지 얘기하며 푸하하하 웃어버렸다.
그 이백만 원 은 지금 내 카카오 뱅크 세이프박스에 들어있다. 이 이 백은 앞으로 무엇이 될까. 아마도 책을 만드는 데 쓰이겠지만, 단 한 번도 나를 위한 물건으로 치환된 적 없는 비상금이 이상하게 존재 자체만으로도 힘이 된다. 비상금이란 무릇 가지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든든해지는 걸까.
1년에 두 번씩 하는 글쓰기 수업을 하면 백만 원을 떼어 남편 몰래 엄마에게 보냈다. 어려울 때는 그 절반이라도 보냈다. 인내심 있게 모아서 목돈을 만들어 드리고 싶었지만 나 사는 게 빠듯해지면 효녀 노릇부터 포기할 게 뻔했기 때문에 내 작은 지갑이 조금이라도 찼을 때 바로 보내는 게 나았다.
아빠 모르게 받은 그 돈은 아마도 자주 생활비에 보태졌을 것이다. 아빠에게 말할 수 없는 곳에 쓰였을 수도 있다. 차곡차곡 모아둔 돈과 합해서 빚 갚는 데 보탰을 수도 있고. 어느 속상한 날에는 스타벅스에 가서 엄마 좋아하는 돌체라테를 마셨겠지.
오래전 엄마의 비상금은 종종 나를 위해 쓰였다. 평생 달고 살았던 여드름 때문에 이 꼴로는 사회생활도 못 할 거라며 우울해하는 딸을 위해 몇 달 치 피부 관리 비용을 결제했고. 남자 친구가 군대가 있을 때 쌍꺼풀 수술을 하겠다는 딸의 성형수술 비용도 엄마의 주머니에서 아빠 몰래 나왔다.
결혼할 때 엄마가 그러셨다. ‘결혼하면 비상금이 있어야 해.’ 철없는 딸은 남편에게 비밀 같은 거 가지고 싶지 않다고 대답했었지. 또 뭐라고 했더라. ‘아기는 나중에 신혼 생활 실컷 즐기고 나서 낳을 거야.’(2년간 난임으로 고생했다)라든가 ‘여기 내려와 살 때만큼은 시댁에 잘하고 싶어.’(10년을 헌신하다 지금은 그만두었다)라는 한 치 앞도 내다보지 못할 말들을 잘도 했었다.
남편이 문화다방의 회계 담당이 된 이후로 내 모든 계좌와 비밀번호, 공인인증서를 공유하고 있다. 그래서 따로 주머니를 만드는 게 가능할 리 없었다. 그러다 내 삶에 변화를 불러온 것은 카카오뱅크의 등장. 핸드폰으로 다 해결할 수 있는 이 간편하고 비밀스러운 은행이 나에게도 기회를 만들어 준 것이다.
모든 정산을 출판사 계좌로 받다가 가끔 내 돈이 필요할 때면 슬쩍 카카오뱅크로 입금 계좌를 변경한다. 거기로 모이는 돈은 매달 나가는 배본사와 택배 비용을 제외하고는 내 돈이 된다. 그 돈은 2년 뒤 한꺼번에 찾아 올 동갑 부모님의 칠순을 위해 남동생과 모으고 있는 적금 5만 원. 친구와 언젠가 해외여행을 떠나기 위해 모으고 있는 2만 원. 지인과 목적을 만들어 놓지 않고 무언가의 씨앗이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모으는 2만 원. 1년짜리 적금 2만 원과 비정기 적금 하나로 나뉘어 살뜰히 빠져나간다. 20만 원 도 아니고 겨우 2만 원씩 모아 어느 세월에 목돈이 될까 싶지만 이렇게라도 나는 나중을 도모하는 것이 좋다. 매달 희망을 생각하게 되니까. 아예 하지 않는 것보다는 나을 거로 생각하고 코 묻은 돈까지 모아 차곡차곡 나누어 담는다. 그리고 창피하지만 가끔은 이게 최대한일 때도 있다.
얼마 못 벌어도 푼돈이나마 계도하고 적금도 들고 거기다 비상금까지 생기니 갑자기 오늘 밤 프라닭에서 치킨 두 마리라도 시킬 수 있을 것처럼 거만해진다. 거기다 코울슬로에 감자튀김까지 시키는 사치를 부려도 괜찮을 것 같다.
* 메일리 뉴스레터 '마흔 일기'로 연재했던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