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을 든 공주님과 눈물 많은 왕자님
여자가 아니라 하나, 남자가 아니라 우주라서
아이를 키우면서 우리나라 어르신들 특유의 오지랖을 어느 정도 이해하게 되었다. 아이고 예뻐라. 지금이 제일 좋을 때다. 어쩜 그렇게 말을 잘하니. 그냥 지나치치 않고 따뜻한 눈길을 보내는 분들이 많다. 나도 길에서 만나는 아기들이 어릴 적 내 아이 같고 참 예쁜데 그분들은 오죽할까. 아장아장 걷는 아이가 귀여워서 자신의 손주 같은 마음으로 그냥 지나치지 않고 말로 쓰다듬어 주신다는 걸 잘 알고 있다. 문제는 가끔씩 지나치다 싶은 참견이다.
지나가는 강아지한테도 아는 척을 하면 안 되는 게 요즘의 에티켓인데 하물며 처음 보는 아이 엄마에게 아들은 꼭 낳아야 한다거나 애가 둘은 있어야 외롭지 않다는 이야기를 하시면 당황해서 화를 내는 법도 잊는다. 그분에게는 마땅한 진리이고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 여도 나에게는 깜짝 놀랄만한 무례일 때, 그 선의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
"무슨 남자애가 울고 그래. 뚝!"
"남자는 씩씩해야지 울고 그러면 안 돼요. 허허허."
우주가 길에서 울고 있으면 지나가는 어른들이 여지없이 한 마디씩 툭툭 던진다. 울고 있는 아이가 딱해서 하시는 말씀이니 의도가 나쁜지 않다는 건 안다. 하지만 그 말을 듣는다고 울음이 그치는 것도 아니고, 그 안에는 남자가 우는 건 창피한 일이라는 편견이 담겨 있지 않나. 그냥 지나가시지 뭘 또 한 마디 하고 가시나 종종 마음이 상했다.
아이를 키우며 듣는 참견이 어디 그거 하나뿐이겠나. 동생을 잘 챙기는 우주에게 굳이 동생이 너무 예쁘다. 동생이 예뻐서 좋겠다. 잘해줘라. 너 오빠라고 동생 구박하면 안 된다는 칭찬 아닌 칭찬을 하시는 할머니도 계셨다. 어리고 예쁜 하나를 귀여워해주고 싶었던, 그분이 갖고 있는 어느 정도의 좋은 마음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런 말은 아이도 엄마도 듣고 싶어 하지 않는다고, 참견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일일이 얘기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두 아이가 나란히 있는데 한 아이의 외모만 칭찬하는 건 결코 칭찬이 아니에요. 이 아이는 충분히 좋은 오빠니까 그 말은 아이에게 불필요할뿐더러 상처가 되는 말이에요.'라고 말이다.
그래서 나는 아이가 듣지 않았으면 하는 차별의 말에는 대꾸하지 않고 귀를 닫는다. 영화 <맨 인 블랙>에서 외계인을 본 지구인들의 기억을 지우는 것처럼 아이에게 눈을 맞추고 진지하게 얘기한다. 정말로 기억을 지울 수는 없겠지만 지금 들은 이야기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는 걸 알게 해 주려고 말이다.
"우리 우주가 얼마나 예쁜데. 하나는 아직 아기여서 저런 말을 하시는 거야. 우주도 아기 때 맨날 예쁘다는 소리를 들었어. 엄마는 우주가 세상에서 제일 예뻐. 그리고 우주는 세상에서 제일! 제일! 좋은 오빠야."
넘어져서 울고 있는 우주에게도 그랬다.
"울어도 괜찮아. 아플 땐 우는 거야. 남자도 울고 어른도 울어."
그러면 우주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우주가 4살 때 옷 가게서 이런 일이 있었다. 어떤 것이었는지 정확하지 않지만 우주가 분홍색을 물건을 집어 들고 예쁘다고 한 적이 있다. 아마도 유아용 스카프였던 것 같다. 얼굴이 하얗다 못해 투명하게 뽀얀 우주는 분홍색이 정말 잘 어울렸다. 나도 정말 예쁘다고 맞장구를 치고 있었는데 가게 남자 사장님께서 '남자가 무슨 핑크야, 이건 여자애들이나 하는 거지.' 하시는 거다. 머릿속에서 비상 비상! 빨간 불이 켜졌다. 내 아이가 성별 때문에 받게 되는 사회의 온갖 편견에 반응하는 내 나름의 머릿속 비상 체계다. 사장님을 투명인간처럼 세워두고 곧장 우주와 눈을 맞추려고 무릎을 굽혀 앉았다.
"우주야. 분홍색은 여자 색깔이 아니야. 여자 색깔 남자 색깔은 없으니까 우주가 하고 싶은 거 하면 돼. 알았지?"
8살이 된 우주는 노랑, 빨강, 파랑처럼 채도가 높은 선명한 색을 좋아하게 되었다. 처음 학교에 입학하면서 가방을 고를 때 우주의 선택은 빨강이었다. 그런데 빨간색 가방의 선택지에 우주가 마음에 들어 하는 것이 없어서 차선으로 파랑을 선택해야 했다. 파란색 가방의 세계에는 우주가 좋아할 만한 후보들이 줄줄이 튀어나왔다. 아쉽지만 파랑은 남자아이, 빨강은 여아 아이를 위한 디자인이 많기 때문일 것이다.
하나는 무지개 색을 가장 좋아한다. 그다음은 보라와 분홍이다. 여자아이에게 당연한 듯 분홍색을 쥐여주는 것만큼이나 조심해야 하는 게 여자아이에게 그 외의 색을 권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요즘은 오히려 그런 사람들을 많이 본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핑크로 도배한 아이에게 여자라고 핑크만 고집하는 거 너무 싫다고 하는 사람들.
나는 우주가 빨강을 좋아해도 좋았고 하나가 분홍을 좋아해도 상관없었다. 그냥 색깔일 뿐이니까. 여자니까 분홍 말고 다른 색 어때, 남자라고 파랑만 입지 말고 하는 식으로 의식적으로 나누고 싶지 않았다. 세상에 많은 색 중에 그저 좋아하는 걸 고르게 하면 안 되나. 제한하거나 권하지 말고, 아이의 취향에 따른 선택을 성별 때문이라 섣불리 판단하지 말고. 다양한 색을 접하게 해 주고 자신의 취향을 따르면 되는 거 아닌가.
심지어 아이의 장난감도 성별에 따라 나뉜다. 쇼핑몰에는 여아와 남아로 카테고리가 나뉘어 있고 여자아이 코너에는 인형과 주방놀이가, 남자아이 코너에는 미니카와 공구놀이가 있다. 하나 역시 주방놀이를 좋아하고 우주도 미니카를 열심히 사 모았던 때가 있었다. 하지만 성별이 아니라 놀이 영역에 따라 나뉘어 있다면 더 좋을 것이다. 주방놀이를 좋아하는 남자아이가 여아 코너에 있는 것이 이상해 보이지 않도록 말이다.
하나는 총과 칼 같은 장난감을 좋아한다. 빨간색 총과 검은색 칼이 있는데 총은 편의점에서 산 만듦새가 엉성한 것이었다. 3천 원 짜리 조악한 총이 뭐가 좋을까 싶었지만, 소리도 나고 방아쇠를 당기면 여러 색으로 빛나는 총구 덕에 하나가 가장 아끼는 장난감이 되었다. 경찰관과 소방관이라 꿈이라는 하나답게 우리는 그 총으로 도둑 잡는 경찰 놀이를 자주 했다. 승부욕 강하고 부시고 자르고 때리고 없애는 걸 좋아하는 슈퍼 하나에게(스스로를 그렇게 부른다) 딱인 장난감이었다.
칼은 놀이동산에 갔을 때 샀다. 분명 보는 것마다 사달라고 할 테니 입구에서 약속을 했었다. '이 놀이동산에 장난감 가게가 엄-청 많아. 여기 아주 넓거든. 그런데 하나가 갖고 싶은 거 한 개는 사줄 거야. 딱 한 개만 사줄 거니까 많이 생각해 보고 정말 갖고 싶은 걸로 사야 해. 알았지?' 이야기가 끝나자마자 눈앞에 있는 장난감 가게로 달려가 고민도 없이 고른 게 이 플라스틱 칼이었다. 금색 장식에 검은색 칼집이 있는 자기 키 절반만 한 커다란 칼. 반짝이는 헬륨 풍선과 귀여운 인형들이 즐비한 놀이동산에서 하나는 칼을 선택했고, 다른 장난감 가게가 보여도 한 번도 다른 것을 사겠다거나 바꿔달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이건 분명 하나의 취향인 것이다.
사람들은 종종 로봇을 가지고 노는 여자아이를 오빠의 영향이라 생각하고, 남자아이가 입은 분홍색 옷을 누나의 것이라 단정 짓는다. 하나가 칼을 가지고 유치원을 갔을 때도 그랬다. 원래는 장난감을 가지고 등원할 수 없지만 그날은 반마다 색을 정해서 패션쇼를 하는 이벤트가 있었다. 보라색 옷을 입고 가야 했는데 마침 물려받은 보라색 드레스가 있어서 옷과 왕관을 꺼내 주고 장난감 하나를 고르라고 했더니 장난감 통에서 놀이동산에서 산 칼을 찾아가지고 나왔다. 꼭 이거여야 한단다. 칼이 패션쇼와 어울릴까 싶었지만 아마 집집마다 아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걸 가지고 오겠지 싶어 그래라 했다. 왕관을 쓰고, 반짝이는 보라색 드레스를 입고, 칼을 휘두르면서 세상에서 내가 제일 멋지다는 듯 위풍당당한 걷는 하나가 너무 하나다워서 웃음이 났다.
하원할 때 하나가 칼을 들고 나오자 주변 엄마들은 역시 오빠 있는 동생은 다르다며 웃음을 터뜨렸다. 많은 사람들이 당연하게도 오빠인 우주 것을 가지고 온 거라 생각했지만 우주는 총칼을 사달라고 해 본적도, 가지고 놀아 본 적도 없는 아이다. 군대에 가면 총 쏘는 것도 배워야 하고 전쟁에 나가서 사람을 죽일 수도 있다며, 자기는 절대로 안 가고 싶다고 지금부터 눈물을 줄줄 흘리는 아이가 무슨 칼을 갖고 놀겠나.
아이들은 이런 사소한 관습과 전통과 구분을 경험하면서 점점 성별이라는 벽에 갇히는 어른이 될 거다. 우주가 딸이었다면 아마 빈도와 강도가 더했을 거라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었다. 그래서 뱃속에 둘째가 딸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부터 나는 어느 정도 전투태세가 되었다. 아이들에게 편견을 심어주려는 사람들을 만나면. 대꾸하지 않는 것 이상으로 나서야 할 때가 온다면. 나는 그 상대와 얼마든지 부딪힐 각오로 정신무장을 했다.
아마도 아직 남아있는 차별들이 우주가 분홍색 스카프를 고르지 못하고 빨간색 가방을 멜 수 없는 것보다 더 교묘하고 끈질기게 하나의 선택을 방해할 것이다. 때로는 칭찬을 가장해서 아이에게 울타리를 칠지도 모른다. 그때마다 나는 아이의 눈을 똑바로 보기 위해 무릎을 꿇고 단호하게 얘기해주려고 한다.
너는 그냥 너이고 뭘 하든 네 마음을 따르면 된다고. 원래 그렇다는 사람들의 말은 지금처럼 무시해도 된다고. 그래도 안 되면 맞서자고. 하나의 모든 선택이 성별에서 자유로울 수 있도록 나는 뭐든 할 준비가 되어있다. 물론 우주를 위해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