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을 잃어버린 사람들
엄마가 되면 왜 뭘 자꾸 잃어버린대
우주가 갓난아기 일 때, 참새같이 뾰족한 입에 손싸개를 하던 빡빡이 머리 아기를 안고 종일 집 안에서 서성거리는 것이 내 하루 일과의 전부였다. 거실에서 주방까지, 작은 방에서 현관까지, 안방 침대 주변을 빙빙 돌며 매일 걸었다. 아이와 둥기둥기 놀아줄 때도, 칭얼거리는 울음을 달래주거나 잠을 재울 때도 아이를 안고 집 안을 산책했다. 아이가 생기기 전에는 새로운 동네를 탐험하듯 골목골목 다리가 아프도록 걷는 것을 좋아했었지만, 그때 내가 할 수 있는 산책은 집안에서 걷는 것이 다였다.
아이와 종일 집에만 있는 것이 답답했지만 우주는 아직 밖에 나가기 어려운 새빨간 신생아였다. 잠깐이라도 나가볼까 싶어도 덜컹거리는 유모차에 순두부 같이 연약한 아이의 머리가 흔들릴까 조심스러웠다. 신생아가 할 수 있는 유명하다는 아기띠도 써봤지만 우주는 내 가슴팍에 안기는 아기띠보다 어깨 위로 들어 올려 안아주는 자세를 좋아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그런 자세를 만들어주는 포대기는 없었기 때문에 하는 수 없이 우리는 언제든 아이를 뉘일 수 있는 집 안에서 내 손목 보호대에 의지해서 한 몸으로 지냈다.
우주는 말랑거리는 볼을 내 어깨에 얹고 기저귀를 찬 엉덩이를 왼쪽 손목에 걸터앉은 채로 안겨있길 좋아했다. 그렇게 꼭 붙어서 우리는 매일 보는 집안 풍경을 마치 처음 보는 것처럼 구경하면서 놀았다. 벽에 걸린 가족사진을 보며 엄-마, 아-빠, 할-머니, 할-아버지, 아이처럼 말을 가르치듯 이야기하고, 거울을 보면서 까꿍을 한 백만 번쯤. 베란다에서 창밖을 보며 어느 날은 파란 하늘을, 어느 날은 자동차를 구경하면서 노래를 불렀다.
나는 언제든 수유를 할 준비가 되어있는 지퍼로 가슴 부분을 열 수 있게 된 수유 잠옷을 입고 생활했다. 어차피 나갈 일이 없으니 편하고 좋았다. 종종 가제 수건과 기저귀를 챙겨서 짧은 외출이라도 해볼까 했지만, 우주는 아직 너무 어렸고 나 역시 외출 전에는 가슴이 두근거리는 초보 엄마였기 때문에 겁이나 그만두었다. 내가 먹고 보고 즐기는 것이 전부 아기에게 맞춰져 있던 시절이었다.
티브이가 혹시 아이에게 안 좋은 영향을 줄까 싶어서 마음대로 보지 못하고 조용하게 흐르는 음악은 괜찮겠지 라디오만 종일 배경음악처럼 틀어 놓고 살았다. 학창 시절 이후 라디오를 그렇게 많이 들었던 적이 없었다. 좋아하는 디제이가 나올 시간에는 우주가 잠들기를 바라며 조용해진 집안에서 라디오 소리에 집중했다. 대부분은 라디오가 틀어져 있는 것도 의식하지 못할 만큼 정신없이 지나갔지만. 가끔씩 적절한 타이밍에 나오는 노래와 사연들은 외로운 초보 엄마에게 훌륭한 말벗이 되어주었다.
평일 낮 시간에는 주부를 대상으로 하는 프로그램이 많았는데 한 번은 엄마들의 잃어버린 이름을 찾아드린다는 코너가 있었다. 누군가의 엄마로 살아온 시간 동안 불릴 일 없었던 자신의 이름으로 사연을 소개해 드린다는 것이었다. 그날은 나도 사연을 보냈다. 아기와 있으니 길게는 쓰지 못했지만 나름대로 정성껏 문자로 사연을 썼다. 청개구리 같은 못된 심보가 튀어나와 사연 끝에 이름은 적지 않았다. 엄마로 사는 것이 좋으니 이름 대신 꼭 우주 엄마로 소개해 달라고 했다. 프로그램 취지에 맞지 않은 청취자인데 의외로 내 사연이 라디오에서 흘러나왔다. 이런 분도 계시네요 하면서. 이름은 적지 않았으니 우주 엄마로 나를 불러주었다. 나는 정말로 내 이름보다 우주 엄마로 불리는 게 좋았다. 그토록 기다렸던 이름이었으니까.
문희정이라는 이름으로 31년을 살았다. 원해서 대학생이 되었고 유명하지 않아도 작가가 되고, 작은 가게였지만 사장님도 될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언젠가 엄마가 되고 싶을 때도 지금까지 그랬듯 스위치 켜듯 간단하게 결정만 내리면 될 거라 생각했던 게 그 흔한 엄마라는 타이틀이었다. 나에게도 엄마가 있고, 세상에 어딜 가나 엄마들은 많고 많았기 때문에 그다지 어려울 것 같지 않았다. 하지만 엄마라는 이름은 내가 노력한다고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왜 아기를 하늘이 주신다고 하는지 그제야 알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우주 엄마로 불리게 된 이 새로운 이름이 무척이나 소중했다. 얼마나 좋았는지 자신의 이름을 잃어버렸다고 하는 다른 엄마들에게 서운할 지경이었다.
내 이름을 잃어버리다니, 나라는 사람은 엄마가 된다고 해서 소멸하지 않는다. 내가 종일 아이와 집에 있다고 해서, 밖에서 우주 엄마로 소개된다고 해서 내 이름을 잃어버린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나는 감사하게도 내 부모가 지어주신 이름 외에 내가 선택하고 바란 '엄마'라는 무거운 이름을 하나 더 얻은 것이다. 엄마가 되는 건 바란다고 될 수 있는 게 아니었기에 나에게는 기적 같은 행운이었다.
종종 신혼부부나 결혼하지 않은 사람들이 아이는 낳지 않을 거라, 결혼해도 아이는 몇 년 후에 가질 거라 이야기하는 것을 들으면 혼자 흠칫 놀란다. 내 옛날 모습 같아서. 신혼은 몇 년 즐기고 아이를 가져야지. 어느 정도 돈을 좀 모으고 준비가 되었을 때 낳아야지. 내 가벼운 말들을 하느님이든 삼신할미든 아무튼 사람의 영역 밖에 무언가를 행하는 분이 듣고서 노하셨는지 나는 아기를 낳고 싶다고 결심한 이후 꼬박 2년을 아이를 바라며 보내야 했다. 몸에 문제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정상적인 부부생활을 해도 임신이 되지 않는 난임부부가 많다는 것도 그때 처음 알게 되었다.
임신 가능한 배란일은 한 달에 한 번이다. 정자가 몸속에 살아있는 3일 정도를 계산하면 임신 가능성이 있는 날은 넉넉하게 일주일 정도. 병원을 다니면 정확한 배란일을 알 수 있는데 의사가 정해주는 날짜 앞뒤로 관계를 맺으면 확률이 올라간다고 한다. 그러니 아이를 기다리는 부부에게 임신을 위해 무언가 노력할 수 있는 기회는 한 달에 한두 번이라는 뜻이다.
그렇게 한 달을 기다리다가 임신 테스트기에 뜨는 한 줄로 임신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고, 잠시 절망했다가 또 한 번 혹은 두 번의 기회를 노린다. 아기를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1년은 365일이 아니다. 그들에게는 1년은 임신이 가능한 단 열두 번의 날 뿐이다. 그렇게 난임부부라는 이름표를 달고 1년이 지난 후에 조급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난임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병원에 가고 나팔관 시술을 하고 정액검사를 하고 차례로 시험관 시술까지 고민하게 된다. 아직 건강하고 젊은 나이일 때 시험관에 성공할 확률이 올라가기 때문에 요즘은 1,2년간 자연 임신되지 않은 부부에게 일찍 시험관 시술을 권한다. 그맘때면 부부의 관계 맺기는 숙제가 된다. 두려움이고 부담감이고 끝내는 아픔이 된다. 하지만 그래도 거를 수 없는 소중한 기회다. 나는 시험관 시술을 하지 않고 기다렸지만 일찍 시험관을 택한 친구는 병원에 한 번 다녀오면 반나절을 앓아누웠다. 배에 스스로 주사를 놔야 하는 것도 멍든 배를 쳐다보는 것도 무척 괴로워했다. 그 기다림과 아픔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나에게도 아기를 기다리는 시간은 간절했다. 사실 2년은 난임이라기에는 짧은 시간이었다. 나와 함께 난임 병원에 다니던 사람은 8년째 그런 시간을 보내고 있었고 10년이 넘은 사람도 있었다. 아기를 기다리며 눈물을 흘려본 사람들은 안다. 티브이에 나오는 육아 예능을 보면 다들 잘만 엄마가 되는 것 같은데 왜 나한테는 이렇게 어려운 일인지 화가 난다. '넌 두줄로 나타났지'라는 보험 광고를 볼 때는 야속하게 매번 한 줄인 내 상황에 울컥해서 뜬금없이 펑펑 눈물을 흘린다. 아이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얘기하던 지난 시간을 무던히도 후회했었다.
신혼을 즐겨야지. 아직은 아니야. 지금 생기면 큰일이야. 내가 했던 말들 때문에 벌을 주시는 거라면 후회하고 있으니 용서해 달라고 하고 싶었다. 아이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내가 빌 수 있는 모든 존재에게 빌었다. 일 년에 네 번 제사와 두 번의 차례 때마다 정성껏 전을 부치고 음식을 올렸다. 산소에 가서 절을 할 때도 건강한 아이를 주시면 잘 키우겠다고 살아계셨다면 예뻐했을 할머니 할아버지께 부탁했다. 생일날 케이크에 불을 끄면서 빌었고, 산에 갈 때마다 돌탑 꼭대기에 반듯한 돌을 얹었다. 보름달이 뜰 때는 베란다에서 비는 것이 건방져 보일까 밖으로 나가서 달을 올려다보며 소원을 빌었다. 예쁜 아기라고 하면 욕심 많아 보일까 그냥 건강한 아기면 좋겠다고 더 바라는 것 없다고. 사랑으로 키울 테니 제발 아기를 갖게 해 달라고 빌고 또 빌었다.
나는 절박했지만 내 간절함은 아무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았다. 나 혼자만의 조급함이길 바랬다. 사람들이 진지하게 걱정하기 시작하는 순간 임신이 어렵다는 것, 임신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 기정 사실화 될 것 같았다. 내가 날짜에 맞춰 관계 맺는 것에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는 것을 남편도 몰랐으면 했다. 그래서 나는 가끔 둘이서 지내는 노년도 즐거울 거라는 듯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냐 또 다른 미래를 꿈꾸는 척했다.
그 시기 내 쇼핑리스트는 모두 임신 테스트기였다. 가격이 만만치 않아서 친구들에게 생일선물로 차라리 임테기를 달라고도 했다. 종로에 있는 대형 약국이 저렴하다 길래 잔뜩 사다 놓고 혹시나 할 때마다 검사를 했다. 임신도 하지 않았으면서 이번 달에는 예감이 좋다며 친구들을 만나도 술을 마시지 않았다. 그다음 달에도 내가 또 그러니 친구들은 언제까지 그럴 거냐며 웃었다. 겨우 2년 아이가 안 생긴다고 뭐 요즘은 그것보다 더 오래 기다리더라는 사람들의 가벼운 위로도 쌓이니 상처가 됐다. 아침에 일어나면 어젯밤 꿈에 무슨 의미가 있는 건 아닌지 희망을 품고 태몽을 검색했고, 계속 아기 생각만 하면 안 좋다더라 여행을 가면 여유가 생길 거라고 해서 여행도 종종 갔다. 아무튼 나는 아이를 만나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걸 했다.
그렇게 만난 아기인데 엄마라는 이름이 소중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우주 하나의 엄마라는 이름으로 지겹도록 불리고 싶다. 9년을 엄마로 흔들리며 살아보니 나를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새로운 나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엄마가 된다고 해서 문희정이 사라지는 게 아니다. 우주 하나 엄마와 문희정은 단짝 친구처럼 평생을 함께 할 것이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필요할 때마다 서로를 도우면서. 아이는 생각보다 빨리 클 테고 문희정으로 사는 시간은 또 길게 이어질 거다. 조급해하지 않고 지금은 엄마라는 이름을 충분히 만끽하고 싶다. 아이 엄마로 사는 사람들에게 자꾸 자신을 찾아라, 잃어버린 젊음과 이름과 자아 같은 것을 찾으라고 좀 그만했으면 좋겠다. 우리는 아무것도 잃어버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