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멋대로 망가진 무릎뼈를 보면 전문의가 우두두둑 맞춰서 고정해야 할 것처럼 보이긴 하는데.
깁스를 오랫동안 해야 되는 건가?'
"남편 분도 들으셔야 하니까 영어로 설명을 드릴게요."
"네, 그렇게 해 주세요."
나는 영상 의학과 문 밖의 좁은 통로에 놓인 간이침대에 누워서 의사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남편은 과호흡이 진정되긴 했지만 내 옆에 서서 붉어진 얼굴로 나와 의사를 번갈아 보는표정엔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고개를 돌려 보니 어느새 병원 접수처는 환자와 보호자들로 꽉 차서 많이 붐볐다.
" Hmmm, your wife knee cap....... shattered. operation....... must..... difficult. top 1%"
의사는 한참 사용하지 않은 듯한 '영어 실력'이지만 의학 용어를 사용해서 설명한 뒤 일반인이 알아듣기 쉬운 단어로 다시 한번 최선을 다해 열심히 설명해 주었다. 내가 원하던 강남에 위치한 병원도 한남동의 병원도 가지 못하고 앰뷸런스 출발지에서 가장 가까운 종합 병원으로 온 상황이라 100% 병원을 신임하고 있지는 못했던 상황이었는데 전라도 사투리 억양에 섞인 영어 발음으로 성실히 답하는 의사의 모습이 우리에겐 진솔하게 환자를 대하는 의사의 모습으로 좋게 보였다.
재산도 아니고 집값도 아니고 학교 성적도 아니고, 부상이 상위 1%
의사가 과장하는 건 아닐 텐데. 어떻게 무릎 부상의 정도로 치면 상위 1%의 심각한 상황이라는 거지? fracture(골절) 정도는 예상하고 있었지만 의사는 나의 골절을 shattered(조각나 부서짐)라 표현했다.
긴급 수술이 필요한 상황...
흠. 다른 의사에게 second opinion을 받아볼 만한 시간이 있는 것도 아니고 어쩌나. 한국에 보험도 없는 일반 환자라 병원 측에선 '봉'잡았다 하며 이것저것 돈을 우려먹으려 서두르는 건 아닌지. 전에 보았던 한국 병원의 어두운 모습을 보여 준 TV 프로그램에서 나온 무서운 장면들이 머리에 맴돌았다.
부산에서 기차를 타고 오고 있는 동생에게 연락을 하니 거의 다 도착했다며 조금만 기다리란다.
동생에게 남편과 함께 진료실에 들어가서 영상 판독하는 의사의 태도나 치료 계획 등의 설명을 함께 들어주길 부탁했다. 나는 다른 방안을 생각할 만한 지식도 전무했고 너무 지치고 힘들어 이성적인 판단을 할 만한 에너지도 없는 기진맥진한 상태였다.
부산에서 내 전화를 받자마자 입고 있던 옷 그대로 핸드백 하나 들고 기차를 타고 달려와 준 동생이 고마웠다. 진료실에서 나오는 동생에게 물었다.
"나 전처럼, 정상적으로 다시 걸을 수 있을까?"
"그럼... 그런데 앞으로 많이 힘들 거야."
입원 수속을 마치고 간호간병통합서비스 병동에 있는병실로 실려갔다.
침대에 누워 환자복으로 갈아입고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건지. 오늘 오후 늦게 수술을 한다는데 나는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건지. 하루 종일 젖은 옷을 입고 있다가 보송하게 마른 환자복으로 갈아입고 나니 잠이 쏟아졌다. 잠자고 나면 다 괜찮아질 텐데 왜 이리 수선인가 하는 몽롱한 생각으로 잠깐 졸았는데 간호사들이 와서 이런저런 질문을 반복하며 수술 전 검사를 했다.
주님을 부르며 기도하고 싶었지만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았다. 쏟아지는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아버지~' 부르고 몇 초 후 다시 '아버지~', '아버지'만 속으로 반복해 불렀다.
눈을 뜨니 훤하게 열린 커튼 앞에 세 명의 아줌마가 두 분은 목발을 짚고, 한 분은 허리에 지지대를 감고 보조기를 잡고 서서, 누워서 신음하는 나를 보고 있다.
'뭐야 이건. 내가 원숭이냐?'
뜬 눈을 얼른 감았다.
누구와 말 섞기도 싫고, 그럴 기분도 아니고, 기운도 없는데 이 사람들은 왜 내 발치에 서서 나를 보고 있나.
조용하게 자기들끼리만 얘기한다고 생각하나 본데, 그러기엔 아줌마들의 목소리는 너무나 크고 우렁찼다.
'많이 다쳤대요.'
'응급 수술해야 된대요.'
'아이고 어쩌다 저렇게 됐어. 아직도 머리가 젖어 있네. 딱해라. 저 밖에 휴게실에 앳되게 생긴 잘생긴 남자가 저 언니 남편이래.'
'그래? 어디? 나 아직 못 봤어.'
아 정말 이 아줌마들이.
너무 기막힌 하루여서 눈물도 나지 않았다. 그렇다고 웃을 수도 없고. 이 상황에 처한 지금이 '나에게 속한 나의 하루' 같지 않았다. 남에게 속한 남의 하루가 나에게 잘못 굴러 들어온 것 같아 주인을 찾아 돌려줘야 할 것 같았다.
나는 지금까지 큰 노력을 하지 않아도 좋은 운이 따르는 럭키한 삶을 살아왔고 좋은 것은 내 것이고 나쁜 것은 남의 것이라고 여기며 살았던 것 같다.
'두 번 수술하는 일이 없도록 부서진 모든 뼈 조각을 나사, 핀, 줄 모두 써서 잘 묶어주기를 본인의 의술이 아닌 하나님의 힘을 의지하며 기도로 수술에 임하겠다'는 의사...
나는 주님께서 의사의 손을 움직여 주실 것을 기도하며 주님만 생각하며 마취에 취해 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