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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나 Aug 26. 2023

살다 보니 이런 일도 겪게 되네요

이번 서울 여행은 6박 7일로 비교적 짧은 일정인데 크고 작은 모임으로 스케줄이 채워져 있었다.


화요일 늦은 오후, 서울에 도착해서

다음 날인 수요일 인왕산 수송동 계곡에 다녀오려 했지만 며칠 동안 서울에 비가 '많이' 올 거라는 기상 예보가 맞은 듯 하늘은 잔뜩 찌푸리고 어두웠다.


느긋하게 커피를 마시고 계곡에 가기로 했던 일정을 취소하고 신논현역에 있는 '서점'에 가서 오전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비가 와서 그런지 길이 미끄럽다며 남편이 자기가 신고 있는 운동화 바닥을 연신 체크한다.'내 신발이 미끄러운 건 아닌데 길이 왜 이러지'


순간 나도 미끌하며 들고 있던 우산을 놓치고 젖은 길바닥에 넘어졌다. 바닥에 부딪힌 왼쪽 무릎을 손으로 쓰다듬으며 일어나려고 하는 데 몸이 맘대로 되질 않았다. 넘어진 충격 때문인 것 같아 잠시 기다리며 심호흡을 했다.

빗물에 젖은 보도블록 위엔 누군가 버린 손바닥 만한 크기의 비닐이 있었다. 내가 그 작은 비닐을 밟고 미끄러져 넘어졌던 거다.


"Are you All right?? Do you need help?"

한 청년이 다가와서 관광객으로 보이는 우리들에게 영어로 도움이 필요한 지 물었다.

다시 일어나 보려고 시도했지만 굽혀진 왼쪽 무릎이 펴지지 않았다.

입고 있던 긴치마를 들춰 무릎을 보니 뭔가 잘못되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무릎뼈는 울퉁불퉁 이미 제 멋대로 모양이 변해 있었고 무릎을 펼 수도 움직일 수도 없었다.


"아무래도 병원을 가긴 해야 할 것 같은데, 일어나질 못하겠어요."

"아, 한국분이세요?"

도저히 무릎을 펼 수가 없었다.

"그냥 계세요. 움직이시면 안 될 것 같아요. 119 불러 드릴게요."

글쎄 뭐 119까지? 하며 생각했다가 움직이질 못하니 다른 방법이 없을 듯했다.


남편은 길바닥에 주저앉은 내 옆에서 등을 받쳐 주며 어쩔 줄 몰라하고 있다. 청년이 우산으로 내리는 비를 가려주며 119가 곧 출동할 거라며 조금만 참으라고 우리를 안심시켰다. 꽉 막힌 길을 보니 앰뷸런스가 과연 이 길을 뚫고 올 수 있을지, 얼마나 빨리 올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다.

"앰뷸런스가 정말 와요? 이렇게 복잡한 길에."

"네, 그럼요."


젖은 땅바닥에 앉아 있다 보니 춥기도 하고 무릎에서 시작된 통증이 전율처럼 온 다리로 퍼져서 몸이 떨렸다.

순간 천 가지 만 가지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별 거 아니겠지. 괜찮을 거야. 괜찮을 거야.'

'지금은 119 타고 병원까지 가는 것만 생각하자. 앰뷸런스 탈 때까지 정신 줄 놓지 말자.'


비에 흠뻑 젖어 우리를 위해 앰뷸런스 위치를 추적하고 있는 청년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저희들끼리 앰뷸런스 기다릴게요. 비가 많이 와서 다 젖으셨네요. 회사원이신 것 같은데."

이 청년이 도와주지 않았다면, 신속하게 119에 신고해 주지 않았다면, 지금 우리는 어떻게 되었을까?


"업무 중에 나오긴 했는데, 앰뷸런스 타시는 것까진 보고 갈게요."

"혹시, 명함 있으시면."

"아, 명함이요..."

망설이며 서 있는 청년에게 "어디에서 근무하세요? 성함은?" 물었다.

"네, 삼성 OO, OOO입니다."

"감사합니다. 어떻게 보답을 해드릴지."

"별말씀을요. 앞에서 걸어오다 넘어지시는 거 봤는데, 심하게 넘어지신 것 같지 않아 지나치려고 했는데 못 일어나시길래..."



앰뷸런스 소리가 들려온다. 그 소리가 이렇게 반가울 줄...


앰뷸런스 대원들의 들 것에 실려 앰뷸런스를 탔다. 정신이 몽롱한데 이런저런 질문을 하며 지금 갈 수 있는 몇 개의 병원을 알려 주며 장단점을 설명하는 대원에게  나는 무조건 S병원으로 가야 한다고 거기로 가달라고 했다.


"대형 병원 응급실은 환자 분 선택이 아니고 생명을 위협하는 증상이 아닌 부상의 경우 치료를 거부할 수도 있습니다."

'설마. 난 아파 죽겠는데 생명을 위협하는 게 아니라고? 병원도 내 맘대로 못 가는 거야?'


한국에 의료보험도 없고 주소지도 전화번호도 없는 상태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 상황이 이렇게 되고 보니 한국에서 나는 한국말 잘하는 외국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구급대원을 통해 부산에 사는 동생에게 연락을 하고 앰뷸런스는 근처의 종합 병원으로 향했다.

나는 차가 흔들릴 때마다 통증으로 끙끙거리는 데, 내 옆에 앉은 남편은 남편대로 '공황과 과호흡'으로 힘들어하며 비닐봉지에 얼굴을 고 숨을 고르고 있다.



병원에 도착해서 남편은 화장실로 나는 응급실 앞으로 옮겨져 의료진을 기다렸다.

정형외과 의사가 와서 무릎을 펼 테니까 고통스러워도 참으라 하며 급한 대로 X ray를 찍어서 먼저 보자고 한다.

나는 억지로 펴진 왼쪽 다리의 무릎을 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X ray 촬영을 기다리는 데 중년의 영상의학과 직원분이 나를 안심시키려는지 스몰 토크를 한다.

"많이 아프지요?"

"네"

"이럴 때는 왜 다쳤지 하며 곱씹어 생각하시지 말고요. 고관절이 다치지 않아서, 머리를 다치지 않아서 감사합니다. 그렇게 생각하셔야 돼요."

"네, 그렇긴 한데."

"환자 본인은 지금 많이 아프시고 이게 뭔가 싶겠지만, 저희들은 일상이다 보니, 비 오는 날엔 낙상환자가 많겠구나, 오늘 바쁘겠구나 그런다고요. 별거 아니니까 크게 낙심하지 마세요."


이게 무슨 꼴.

남편의 퇴직 파티도, 조카들의 졸업식도, 아버지의 첫 기일도 모두 다 참석하지 못하게 됐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앞길을 계획하지만,
그 발걸음을 인도하시는 분은 주님이시다.

라는 잠언서의 말씀이 떠올랐다.


밖을 보니 여전히 비가 퍼붓고 있다.


23/08/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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