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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나 Sep 11. 2023

적응력과 융통성

아침 7시, 낮 12시, 오후 5시. 하루 세 번

마치 알람 시계처럼 정확하게 밥과 국, 반찬 네 가지를 쟁반 위에 올려 갖다 주시는 배식 담당 아줌마가 부담스러웠는데, 이것도 적응이 된 건지 아니면 훈련이 된 건지 언제부터인가 아줌마의 "식사 왔어요"하는 소리를 들으면 자동으로 침대 위 테이블을 펴고 쟁반 위 그릇의 뚜껑을 모두 열어 놓고 밥을 먹게 되었다. 아침에도 커피 대신 흰쌀밥(죽 같은 진밥)을 김칫국에 말아 숟가락으로 떠먹으며 튀긴 가자미 구이를 젓가락으로 떼어서 발라 먹고 깍두기에 나물에 배식 나온 모든 반찬은 젓가락으로 집어서 맛이라도 한번 다. 하루 세끼 한식으로만 그것도 병원에서 주는 밥을 먹으려니 물리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딱히 먹고 싶은 것도 없고, 운동량도 적은데 많이 먹으면 소화가 안될 거 같아 밥과 국, 반찬을 하루 세번 조금씩 먹고 다.


식사가 끝난 환자의 쟁반을 치워주는 조무사 중에 퉁퉁한 체형의 한 분이 "왜 밥을 안 드세요? 반찬은 좀 잡수시는 데 밥은 항상 반도 더 남기시네. 밥이 보약이에요." 하며 쟁반 위에 남은 음식을 보며 핀잔을 준다.

"많이 먹었어요."

혼잣말인지 들으라고 하는 소리인지

'하여간 식사한 쟁반만 봐도 뚱뚱한 사람, 날씬한 사람 표가 나.' 하며 방을 나간다.

이렇게 누워만 있는데 세상 어떤 사람이  밥맛이 있고 입맛이 있어서 밥 한 그릇을 다 먹을까 싶다.


2인실에서 같이 방을 쓰게 된 옆 환자는 50세 싱글 직장여성으로 심한 통증 때문에 진통제를 맞아가며  zoom으로 미팅을 하고 이메일과 전화로 병실에서도 하루 종일 일을 하고 있다.

'그나마 나는 일을 안 하니까 다행인 건가, 그래 편하게 회복만 신경쓸 수 있는 것도 감사한 일이지.'

하며 위로를 해 보았지만 여전히 뭔가 억울한 기분은 가시질 않는다.


 집에 있는 가 청소한  화장실이 아니면 변기를 항균물티슈로 박박 닦고 사용하는 별난 '결벽증'이 있는 내가 이제는 육안으로도 지저분해 보이는 환자용 공동 화장실에서 용변을 아무렇지도 않게 보고 있다. 휠체어에서 무사히 변기로 옮겨 타는 거에 온 신경이 집중되어 그 외의 것은 신경 쓸 여유가 없다.


나는 커튼 쪽으로 고개를 돌려 옆의 환자에게 제안했다.

"저기... 우리, 화장실이요. 문 열고 쓰면 어때요? 화장실이 전혀 휠체어 사이즈를 고려하지 않고 설계된 것 같아요. 들어가서 변기로 옮겨 타는 것도 힘든데 문까지 닫고 하려니까 너무 힘들어요. 좀 전에 화장실에 꽉 껴서 못 나올뻔했어요. 진땀을 잔뜩 흘렸네요. 샤워도 못하는데 땀나는 거도 그렇고."


촌스러운 환자복을 입었지만 누가 봐도 차도녀 인상의 옆 환자는 의외로 수더분하고 '일'만 하고 살았는지 세상물정을 잘 모르는 순진한 싱글녀 같았다. 이 사람도 내가 까다로워 보여서 차마 제안을 못하고 있는 것 일 수도 있겠다 싶은 생각이 들어 몇 살 더 많은 '언니'로서 먼저 제안해 보았다.


"네, 그렇게 해요. 저도 화장실 갈 때마다 너무 힘들었어요. 그래서 참다 참다 한 번에  몰아가고 그랬어요."

쿨하게 동의하는 옆 환자.

그렇게 우리는 '화장실 트기'를 했다.


화장실 문을 열어 놓고, 휠체어를 문 입구에 주차하고 변기에 앉아 있다 보면 조무사나 간호사들이 방으로 들어올 때도 있지만 우리는 변기에 앉은 채 묻는 질문에  대답도 하고 약도 받고 더 이상 프라이버시네 뭐네 전혀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게 되었다. 단지 처리하고자 하는 일을 안전하게 처리하는 것이 목표였다.

이슬만 먹고 이슬만 싸며 살 것 같이 생긴 내 옆의 차도녀 환자가 화장실에 가면 나는 음악을 크게 틀어 놓고 편하게 일을 볼 수 있도록 해 주었다. 옆의 환자는 내가 화장실에 가면 자기 귀에 이어폰을 꽂는 걸로 배려해 주었다.


"혹시 큰 일 보셨어요? 수술하고 나서 계속 변비네요."

"저도요. 식사를 제대로 못하기도 했고 아무래도 움직이질 못하니 그런 것 같아요."

우리는 간호사에게 변비약을 동시에 받아서 함께 먹고 비슷한 시간에 큰 일도 사이좋게 해결했다.


'세상 까칠한 인상'을 한 두 여자가 상황이 이렇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세상 쿨하게 편한' 성격이 된 건지 아니면 인상만 그렇다 뿐이지 천생이 '쿨하고 편한'성격이었던 건지 잘 모르겠다. 어쩌면 생존본능 같은 거일 수도 있겠다.


"아침만 되면 우울해서 너무 힘들어요."

"저는 오후 되면 우울해요."

서로 우울함을 호소하며 증상을 비교하며, 몸의 컨디션 외에는 사적인 질문도 자세한 신상도 서로 캐지 않고 마치 배낭여행 중에 호스텔 이층 침대에서 위아래 침대에 묵으며 '여행 정보'를 교환하는 그런 사이처럼 어색하지 않을 만큼의 대화만 하며 그럭저럭 잘 지냈다.


주말에 차도녀가 퇴원하고 나서 75세 몸짱 할머니와 이틀 밤, 외래로 간단한 시술만 해도 될 텐데 보험금을 받기 위해 입원한 목청도 덩치도 큰 70세 경상도 아줌마와 하룻밤을 더 자고 마침내 1인실 전용 층으로 방을 옮겼다.


07/09/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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