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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unghoo Kim Jul 30. 2019

허무주의, 반지성주의, 그리고 파시즘

(1) 근대 독일 지식인들의 허무주의적 이상


들어가며


지금으로부터 50년 전인 1969년 5월 13일, 동경대 야스다 강당에서는 농성 시위 중이던 전학공투회의全学共闘会議 학생들과 소설가 미시마 유키오三島由紀夫의 대담이 있었다. ‘인간’과 ‘역사’가 더 이상 불가능하다는 미시마와 ‘인간’과 ‘역사’ 따위는 애초에 없었다고 주장하는 전공투의 공방이었다.

‘투쟁의 적대자들이 모두 특권적인 자기 위치에 집착했고, 그 집착이야말로 대학 내부에서 지배체제를 유지시킨 것이라고 할 때, 그 안에 있으면서 지배 체제의 변혁을 지향하는 자들이 자기부정의 화살을 스스로에게 돌리는 것은 필연적이다. 현실 체제의 존재방식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자신의 삶의 방식이 모순되는 것이 계급사회의 필연이기 때문에, 모순을 지양하기 위해서는 전사회적인 변혁이 필요하다.’는 것이 전공투의 입장이었다.

한편 미시마는 ‘다자이 오사무, 사카구치 안고 등이 ’타락‘이나 ’가면‘을 역설적 방법으로 삼아 구원하려 했던 인간의 ’진짜 얼굴‘은 천황과 국민이라 이름 붙여진 ’가면‘에 의해 산산조각 났으며, 왜냐하면 타락하고 가면을 씀으로써 가까스로 구원될 인간이 아니라, 문화와 민주주의란 깨끗한 의상으로 치장된 인간은 인간의 진짜 얼굴이 아니었기 때문’ 이란 입장을 견지했다. ‘모든 예술적 영위와 정치적 행동의 ’진실‘에는 인간이 없으며, 1970년 자위대 본부에서 할복한 이도 어떤 가면이 육체를 얻어 스스로를 파괴한’ 것이 그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사회적이고 정치적이고 경제적으로 결정될 문제를 개인의 윤리라는 관념론으로 몰아갈 때, 즉 유물론의 원리를 저버렸을 때 이는 극한의 관념론이 되어 극한의 폭력으로 파산할 수 있는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었으며, 대담으로부터 1년 후 미시마의 할복자살과 전공투의 무장 투쟁 노선화로 이어졌다.


어쩌면 이는 모더니티가 다다르는 종말을 단적으로 보여준 귀결일지도 모른다. 이러한 경과와 비슷한 양상이 19세기말에서 20세기초반의 독일에 있었으며, 그 연장선상에 트럼프의 미국 패권주의를 위시한 국제 현대 사회의 반지성주의가 있다. 각각의 발단과 경과를 살펴보고, 오늘날 이를 어떻게 받아들일지 생각해 보기로 했다.

1장에서는 전진성 선생님의 『보수 혁명─독일 지식인들의 허무주의적 이상』을 기반으로 19세기말에서 20세기초반의 독일 보수 지식인들의 주된 사유와 행동의 경과를 소개한다. 2장에서는 모리모토 안리森本あんり, 사토 마사루佐藤優, 사이토 타마키斎藤環의 저술을 토대로 반지성주의의 역사와 현대 일본에서 일어난 관련 현상을 소개한다. 종장에서는 내가 지켜본 한국의 파시즘의 모습과 그를 대하는 자세를 한미한 졸문으로나마 적어보았다.


1장 근대 독일의 보수 혁명


보수 혁명Konservative Revolution은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와 나치 정권 초기에 이르기까지 독일 보수주의 지식인들이 이끌었던 담론이었다. 1921년 작가 토마스 만Thomas Mann이 <러시아 명시선집>에서 언급했고 거슬러 올라가면 아르투어 묄러 판 덴 브루크Arthur Möller van den Bruck가 1906년 도스토예프스키 전집의 독일어판 서문에서 그를 특징짓는 데 사용했다.

보수 혁명은 그 자체가 ‘건전한’ 담론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것은 독일 지식인 특유의 냉소와 아이러니, 역설, 허무로 가득 차 있으며 건전한 계몽적 이성을 추구하는 식자층에게는 심지어 혐오감까지 유발시킬 수 있는 언어들을 남발했다. 그리고 이 담론에 등장하는 민족과 민족주의, 민주주의, 사회주의, 역사 등의 제 개념은 명칭과 실제 의미 간의 괴리를 보여주고 있으며 따라서 이들은 하나의 완결된 이념으로서가 아니라 오직 불연속적으로 ‘진행해가는’ 부정형不定形의 담론으로서만 다루어질 수 있는, 허무주의의 성격을 내포하고 있다.


사전 지식 1 : 피히테와 헤겔의 독일 그리고 사관史觀


1806년 나폴레옹전쟁에서 프랑스가 독일(프로이센)을 꺾고 승리하자 피히테Johann Gottlieb Fichte는 베를린에서 쾨니히스베르크로, 다시 코펜하겐으로 가게 된다. 이듬해 8월 그는 베를린으로 다시 돌아온다. 이때부터 출판된 피히테의 저작들은 실천적 성격을 지니게 된다. 이러한 그의 만년의 사상의 모습은 그의 『유작』 『전집』 등에 잘 나타나 있다. 1807년 그는 이미 제안되어 있던 베를린대학교 창설계획을 작성한다.

1807~1808년 피히테는 조국이 위기에 처하자, 베를린에서 『독일 국민에게 고함Reden an die deutsche Nation』이라는 우국적 강연을 결행하여 교육재건을 부르짖고 독일국민의 애국심에 호소하였다. 이 연설은 국권 회복과 영광을 위한 유일하고 올바른 길에 대한 실천적 견해들로 가득 차 있다. 그는 1810~1812년 베를린대학교의 초대 총장이 되었다. 1813년 국가 독립을 위하여 독일이 고투하는 동안 『참된 전쟁 개념에 관하여Über den Begriff des wahrhaften Krieges』를 강의했다.

『독일 국민에게 고함Reden an die deutsche Nation』을 통해 피히테는 독일을 패망에 이르게 한 근본 원인을 국민들의 이기심에서 찾고, 이것을 새로운 국민교육으로 깨뜨려야 한다고 역설한다. 이 새 국민교육에 의해 독일에 진정한 민족적 공동체 의식이 깨어날 때, 독일 국민은 나라를 되찾고 세계사적 민족으로서 거듭날 수 있다고 강조한다.

이처럼 그는 우국적인 대강연을 통해서 프랑스문화에 대한 독일문화의 우수성을 설명하고, 이것을 국민 전체에게 알려 국민정신을 함양하는 것만이 독일 재건의 길이라고 내세운다. 그의 주장에 들어 있는 민주주의적・공화주의적 요소 때문에 이 강연 내용은 오랫동안 재판再版이 금지되었다. 하지만 예나전투에서 패한 뒤 틸지트(지금의 소베츠크)에서 맺은 굴욕적인 강화 조약으로 나폴레옹의 지배하에 놓였던 당시 프로이센과 독일의 상황에서는, 오히려 국민정신을 양양시켜 반격을 준비하는 데 정신적으로 커다란 힘이 되었다.


청년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은 프랑스혁명이나 칸트 철학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았다. 사상적으로 이성을 중시한 그는 낡은 사상을 타파하려는 계몽주의나 민주적인 공화주의의 입장에서, 단순히 새로운 시대정신과 민족 본연의 모습만을 탐구했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역사적인 조건이나 상황을 중시하게 되어, 그저 머릿속에서 생각해 낸 이상을 실현할 수 있다고만 생각했던 젊은 시절의 계몽주의와 공화주의의 한계를 자각하게 되었다.

그의 이러한 사고방식의 변화에는 그 자신의 실존적이고 철학적인 사색이 깊어진 이유도 있겠으나, 프랑스혁명 이후의 어지러운 역사적 추이(자코뱅 독재・나폴레옹의 출현과 몰락・빈 체제・7월 혁명 등)에 대한 반성이나, 개인 중심의 근대 시민사회에 내재하는 숙명적인 모순, 또 19세기 초 독일의 상황 등이 크게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독일의 현실에 입각하여 ‘이상(자유)과 현실(권력)을 어떻게 통일시킬 것인가’ 하는 문제를 적극적으로 파고들어 연구하게 되었다. 19세기 초 독일은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 양국을 중심으로 하여 많은 소국으로 분열되어 있었으며, 나폴레옹의 몰락 후 유럽을 지배한 반동주의의 물결(자유주의 운동을 억압하는 빈 체제)에 밀려 아직 입헌적인 국가조차 못되었다. 자유와 통일과 헌법의 문제, 이것이 그 무렵 독일의 과제였다. 거기서 헤겔은, 현실적・객관적으로 눈앞에 전개되고 있는 근대 시민사회를 분석하고 입헌군주제를 긍정하는 입장에 서서 민족(국가) 본연의 모습을 탐구했다. 그가 『법철학강요Grundlinien der Philosophie des Rechts』를 저술하고 국가에 있어 인간 본연의 모습을, 근대 시민사회의 여러 문제를 도입해가며 근본적으로 깊이 연구한 것도 바로 이 무렵(1821)이었다.

이러한 헤겔의 사상은 피히테에게 지대한 영향을 받았고, 피히테에 이어 베를린대학의 철학 교수가 되었고, 사후 피히테 옆에 묻혔다.


사전 지식 2 : 니체의 <비극의 탄생>, 그리고 <즐거운 학문>에서 말하는 ‘영원회귀’


쇼펜하우어를 계승 및 비판한 니체는 <비극의 탄생>에서 그리스 신화의 디오니소스와 아폴론을 참조하여 세계와 존재를 설명한다. 니체에 따르면 세계와 존재는 오직 미학적 차원에서만 정당화할 수 있다. “세계는 대립되는 힘들의 비극이며 철학은 오직 이 비극적 지혜에 관련된 학문인데 이 지혜는 세계를 디오니소스적 어둠과 아폴론적인 빛의 근원적 투쟁으로, 다시 말해 세계를 모든 것을 삼켜버리는 형태 없는 심연인 삶의 토대와 개별자들을 만들어내는 빛의 영역 간의 근원적 투쟁으로 바라보는 통찰에서만 나올 수 있다.” (<비극의 탄생> 中)

<비극의 탄생>은 그리스 문화를 구성하는 두 힘, 즉 경쟁적인 동시에 상보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아폴론적인 힘과 디오니소스적인 힘에 대한 니체의 정의로 시작된다. 아폴론적인 것은 빛과 꿈, 예언과 밝음의 신인 아폴론에게서 기인한 것이다. 반면 디오니소스적인 것은 취기와 열락의 신인 디오니소스로부터 기인한다. 아폴론이 가시적 형태와 이해 가능한 지식, 중용에 관계된 신이라면 디오니소스는 무정형의 흐름과 신비로운 직관, 그리고 극단에 관련된 신이다. 아폴론적인 것이 개별자들의 세계를 대변한다면 디오니소스적인 것은 고립된 개인들의 정체성이 용해되어 인간 존재가 자연의 근본적인 힘과 에너지 속에서 하나가 된 상태를 대변한다. 디오니소스적 열락 속에서 우리는 하나의 존재로 녹아들어 그것의 영원한 창조 속에서 기쁨을 향유한다. 이렇게 디오니소스적인 것을 철학적 파토스로 해석한 니체는 스스로를 ‘최초의 비극 철학자’ 로 명명했다.

소크라테스식 낙관주의를 ‘이성과 본능을 대립적으로 파악하는 점에서 퇴폐적’ 이라 비판한 니체는 “우리는 생성하는 모든 것이 고통스러운 몰락을 준비해야 한다는 점을 인식해야만 한다.”(<비극의 탄생> 中)라 밝히며 허무주의에 대한 논지를 전개한다. 초기 니체가 본 허무주의는 ‘우주적 차원에서 발생하는 존재론적 문제’였으며 이는 사유의 발전과 함께 점차 ‘인류 최고의 가치들이 타락하는 지점에서 발생하는 문화적이고 역사적인 문제’로 구체화되었다.

예술이 고대 그리스인들과 그 생을 허무주의로부터 구해주었다고 믿은 니체는 비극悲劇에 대해 아리스토텔레스가 ‘(카타르시스에 빗대어)공포나 연민 같은 감정을 압축적으로 경험하게 해줌으로써 그런 위험한 감정을 정화해주는 것’이라 한 데서 한 발 나아가 ‘공포, 연민 등의 감정 너머의 파괴로 인한 환희, 우주적 변전의 영원한 환희를 긍정하는 정신을 제시하는 것’ 으로 보았다.

하버마스Jürgen Habermas는 “무아경의 환희를 경험하는 대가로 우리는 개인성을 상실하고 무정형의 자연 속에 용해되는 고통을 감수해야 한다.” 며 비판한다. 한편 독일 철학자 슬로터다이크Peter Sloterdijk는 이런 니체의 주장을 문화적 전위주의로 이해하는 것이 가장 타당하다고 분석한다. 또한 그는 <비극의 탄생>이, 서구 문화의 ‘개인의 정체성을 견고하고 일관성 있는 완성체로 보는’ 전통적 개념을 전적으로 상상적인 것이라 폭로했다고 주장한다.


한편 니체는 영원회귀를 우리가 확보할 수 있는 최고의 긍정 형식으로 생각했는데 이 개념은 이후 많은 현대 사상에 두루 영향을 미쳤다. 카벨Stanley Carvell부터 들뢰즈에 이르는 철학자들이 이 개념을 차용했는가 하면 쿤데라의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The Unbearable Lightness of Being> 역시 이 개념에서 영감을 얻었다.

영원회귀의 가르침은 삶의 내재적 조건과 형식 위에 새로운 중력의 중심을 위치시킨다. 삶을 벗어나려는 우리의 욕망은 우리에게 좀더 고양된 삶의 관점을 제공하고 또 그 결과 우리들이 좀 더 깊이 있고 전투적인 자세로 실제 삶에 돌아올 수 있도록 하는 것이어야 한다. 삶의 긍정이란 과제의 성패는 생이 우리에게 제기하는 가장 힘들고 알 수 없는 문제들을 직시하고 생의 모든 측면을 다 끌어안을 수 있는지 아닌지에 달려 있는데, 종교는 지금까지 인간들에게 현세를 이행적인 단계로서 경멸하고 결정되지 않은 또 다른 삶만을 희구하도록 가르쳐왔다. 그러나 니체는 또한 우리의 모든 지적 에너지와 존재를 삶의 무상함에 바치라고 요구하는 천박한 무신론에 만족한 채 머물 수는 없다고 주장한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오히려 영원한 세계를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유일한 삶인 이 세계 위에 각인시키는 것이다.

니체는 영원회귀를 두고 ‘사유에 대한 사유’ 로 명명한다. 이는 또한 우리가 자신의 행위에 대해 얼마나 자유로운가, 혹시 모든 것은 이미 결정된 것이 아닌가라는 오랜 철학적 문제에 대한 일종의 응답이기도 했다. 니체는 영원회귀가 우리 자신의 모든 행동에 대해 지배력을 확보하는 방법이라고 주장한다.

“사유와 믿음 역시 다른 어떤 무게만큼이나 혹은 그 이상으로 나를 짓누르는 무게이다. 음식과 지역, 공기와 사회가 우리를 조건 짓고 또 변화시킨다고 말들 하지만, 사고방식은 이 모든 것보다 더 크게 우리를 결정짓고 또 변화시킨다. 음식과 주거지, 공기와 사회에 대한 우리의 선택을 결정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사유이기 때문이다”


사전 지식 3 : 도스토예프스키의 사상


19세기 러시아 소설가 도스토예프스키가 살았던 시대는 러시아 역사에서 사상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변화무쌍하던 시기였다. 1825년의 제카브리스트 반란, 1830년대 니콜라이 1세의 강화된 전제정專制政, 1840년대의 서구주의와 슬라브주의 논쟁, 1850년대의 크림전쟁과 게르첸의 농민 사회주의의 등장, 1860년대의 알렉산드르 2세의 대개혁 및 러시아 계몽주의적 사조들과 바쿠닌의 아나키즘 등장, 1870년대의 인민주의 사상들과 인민주의 운동 및 테러리즘의 대두 등이 그의 시대를 특징짓는 말들이다.

도스토예프스키가 살았던 시대는 국가의 권력과 이에 저항하는 인텔리겐치아 간의 첨예한 갈등과, 인텔리겐치아 내부에서의 사상적 노선의 갈등으로 점철된 긴장의 시기였다고 볼 수 있다. 이 와중에서 도스토예프스키는 1840년대 말 급진적인 서구주의적 그룹에 속했다는 이유로 사형 언도를 받았다가 감형되어 8년간 시베리아 유형에 처해지고, 그곳 유형지에서 심오한 사상적 전환을 겪게 된다. 그는 1859년에 유형지에서 페테르부르크로 돌아온 뒤 1860년대에 들어서면서 체르느이셰프스키와 피사레프로 대변되는 당대의 계몽주의적 사조와 논쟁을 벌이며, 스트라호프와 그리고리예프 등과 함께 ‘대지주의’ 라는 이름의 철학적 관념을 내세운다. 1860년대 중반과 후반에 그는 서유럽을 여행, 그곳에서 약 4년 간 체류하면서 서구 자본주의의 모순된 현실을 목격하고 서구 사회를 혐오하게 된다. 1867년에는 바쿠닌의 연설을 들으면서 그가 주장하는 사회 전복과 봉기에 대한 열정을 극렬하게 비난한다. 기반 없는 봉기는 진정으로 대안이 될 수 없다고 본 도스토예프스키는 바쿠닌의 세계관을 유치한 것으로 치부한다. 1860년대 후반부터 집필하기 시작한 그의 대작들은 그의 유럽 여행과 그곳에서의 체류 경험, 당대 러시아 지식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계몽주의적 유토피아 사상, 그리고 인민주의자들의 사회혁명 또는 정치혁명에 대한 사상과의 일대 논쟁을 담은 작품들이라고 할 수 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이들의 사상을 서구의 반신反神주의적이고 인본주의적 사상의 영향을 받은 인신人神 사상이라고 보고, 이에 대립하는 신인神人 사상을 작품 속에 끊임없이 도입하여 논쟁하도록 만든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 세계는 이렇게 당대의 러시아 지식인 및 사회 운동과 별개로 이해될 수 없는 측면이 있다.



(1)


독일 보수주의는 역사적으로 계몽사상과 프랑스 혁명에 대한 투쟁의 과정에서 형성되었으며 따라서 줄곧 서구세계에 대한 저항의식을 키워 왔다. 이 이념은 특히 범인류적 보편성을 지향하는 서구 자유주의를 문제시했으며 그것의 토대인 계몽적 이성과 개인의 자유의 원리를 모두 거부했다.

헤르더나 슐라이어마허 같은 낭만주의자들이나 피히테나 헤겔 등의 이상주의 철학자들은 그 대안으로 국가나 민족Volk과 같은 역사적 공동체를 내세웠다. 이들에게 개인의 자유에 대한 강조는 서구적 관념의 지배력을 확장시키는 것에 불과했다. 자유는 오직 역사적으로 형성된 고유한 공동체의 ‘유기적’ 틀 속에서만 실현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들은 이러한 ‘역사주의적’ 세계관을 증진시키고 서구문명의 보편지향적-추상적 이념으로부터 수호해내는 것이야말로 독일 민족에게 주어진 사명이라고 믿었다.

19세기에 독일 보수주의를 이끌었던 주역은 이른바 교양시민계층Bildungsbürgertum이라 불리는 독일 특유의 사회 계층이었다. 이 계층은 전통사회에서 독일의 정신적 가치들을 보호하고 계발시키는 역할을 수행함으로써 사회적 권위와 그에 따른 일정한 경제적 기득권을 유지할 수 있었다. 독일 교양시민계층에게 철학자 칸트가 제시했던 서구 문명Zivilisation과 독일 문화Kultur의 이분법적 대립구도는 하나의 가치규범으로서 오래도록 영향력을 가졌다.

문명이 경제, 기술, 사회조직 등 외면적 진보의 결과를 지칭한다면 문화란 내적으로 자각된 인간들이 진・선・미를 구현해가는 창조적 세계를 일컫는다. 전자가 세속적 안락을 추구한다면 문화는 정신적인 가치를 추구한다. 이러한 문화 개념은 분명 독일의 유서 깊은 신인문주의 전통에 뿌리박고 있었다. 서구적 공리주의에 반대하여 종교적, 지적, 미적 요소들이 조화를 이루는 전인적 교육Bildung의 이념이 그것의 핵심이었다.

이와 같은 발상에 입각해 볼 때 프랑스 혁명과 산업화의 물결을 통해 독일에 흘러들어온 서구문명은 독일문화의 건강한 정신성을 파괴하는 암적 요소로 비쳤다. 종교적 심성을 잃어버린 채 한낱 펜대로 급조한 인위적 인간상을 쫓거나 이로써 유발되는 공허감을 헛된 물질적 만족을 통해 메꾸려 하는 새로운 경향은 바로 서구문명의 유입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생각이 이 계층에게는 공통된 것이었다. 이들은 이러한 현상을 흔히 ‘문화의 조락’이라고 불렀는데, ‘부르주아 - 본래적 의미의 시민인 공민公民이 아니라 사인私人 - 이야말로 그것의 주범이라고 생각되었다. 독일 보수주의 지식인들은 주로 이와 같은 교양시민계층에서 배출되었다.

1870년대 독일 제국의 성립 이래 가속화된 근대화의 물결은 보수주의의 발전에 촉진제로 작용하였다. 근대화는 역사적으로 유례없는 ‘변화의 가속화Jacob Burckhardt’를 낳았고 이 과정 속에서 전통적인 교양시민계층의 소외 현상이 발생하였다. 이 계층은 독일 사회의 구조적 변화 속에서 산업가와 기술자 또는 신관료층에 의해 점차 주변부 계층으로 밀려나게 되었다. 독일제국의 성립 후 겨우 몇 십년 동안에 주로 이 계층 출신의 인텔리겐치아 대다수는 존재의 위기를 겪는 상황으로까지 내몰리게 되었다. 이들은 이제 거의 (알프레드 베버의 표현에 따르면)‘정신적 프롤레타리아트’로 전락하게 되었다. 19세기말 이래 독일 지식인 사회에서는 이른바 문화비관주의Kulturpessimismus가 팽배하게 되었다. 이 독특한 정신 태도는 새로운 지배력을 획득한 근대 문명에 대한 엄격한 도덕적 회의에 기반하고 있었다. 당시 많은 전통적 성향의 지식인들은 부르주아 사회의 ‘세속화’ 경향에 대하여, 또한 ‘대중화’와 ‘물질만능주의’에 대해서 보수주의적 입장에 선 문화비판을 감행하였다.

문화비관주의는 19세기 말까지는 주로 고립된 개별 사상가들에 의해 주도되었다. 독일풍Deutschheit의 숭배로 유명했던 파울 드 라가르데Paul de Lagarde라든가 네덜란드 화가 렘브란트의 화풍을 순수한 독일 - 북방적nordisch – 정신의 제현으로 이상화하였던 ‘렘브란트적 독일인’ 율리우스 랑벤Julius Langbehn과 같은 인물들이 그 대표적 예이다. 20세기에 들어서며 문화비관주의는 새로운 주역들을 발견하였다. 독일 제국 건설기 이후에 탄생한 교양시민계층의 새로운 세대가 그들이었다. 이들 청년들은 빌헬름 제국 시대의 부르주아적 지배 문화 - 아버지의 세계 - 를 가상과 인위성이 참다운 생을 질식시키고 있는 세계로 간주하고 이에 대항하여 그들 나름의 새로운 문화가치를 창조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아버지는 자유주의적이고 아들은 보수주의자라는 흔치 않은 상황이 연출되었다.

오스트리아의 보수주의 작가 후고 폰 호프만스탈은 당대의 청년들을 감동시켰던 1926년 뮌헨 대학에서의 유명한 연설에서 생과의 연결을 잃은 문학・예술의 상아탑을 비판하였다. 그에 따르면 독일 문학이 제시하여야 할 가치는 더 이상 작가 개인의 정신적 자유가 아니라 오히려 민족적 연대였다. 이 연설의 말미에서 호프만스탈은 자신의 문학이 이념적으로 지향하는 바를 ‘보수 혁명’이라는 개념으로 정식화했다. 보수 혁명은 하나의 정치적 강령이라기보다는 이처럼 자유에 대해 연대의 우위를 추구하는 예술가의 관념적 지향점이었다.

물론 여기서 간과하지 말아야 할 점은 보수 혁명이 추구하는 ‘연대’가 우매한 대중들의 집단적 결속을 의미하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그것은 오히려 새로운 사명감에 도취된 개별 예술가들 - 지식인 - 간에 이루어지는 ‘정신적’ 연대였다. 이러한 의미의 연대란 개인주의와 집단주의 사이의 이상적인 공간에서만 가능한 사실상 비현실적인 원리였다. 보수 혁명은 근대적 혁명 이념들이 고취시켰던 바와 같이 ‘역사적 진보’를 위한 혁명이 아니라, 그와는 정반대로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혁명이었다. 19세기의 통례적 어법으로는 도저히 이해될 수 없는 이 기묘한 혁명 개념은 소구 근대 문명에 대한 독일 보수주의자들의 필사적 반격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것은 작가 - 예술가의 심미적 의식의 발로로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으며 담론의 해체에 이르기까지 특유의 관념성을 탈피하지 못했다.


(2)


Es wird Krieg. Du wirst sehen, wie das einschlägt! Es wird den Leuten eine Wonne sein, schon jetzt freut sich jeder aufs Losschlagen. So fad ist ihnen das Leben geworden. - Aber du wirst sehen, Sinclair, das ist nur der Anfang. Es wird vielleicht ein großer Krieg werden, ein sehr großer Krieg. Aber auch das ist bloß der Anfang. Das Neue beginnt, und das Neue wird für die, die am Alten hängen, entsetzlich sein.

‘전쟁이 시작되는 거야…… 어떤 형태로 시작되는지 이제 곧 알게 될 거야. 모두들 크게 기뻐할 테지. 사람들은 전쟁이 터지기를 바라고 있어, 그토록 모두들 생활이 따분한 거야. 그러나 싱클레어, 이제 곧 알게 되겠지만 이건 한갓 시작에 지나지 않아. 아마 큰 전쟁이 될 테지. 어마어마한 대규모의 전쟁이 도래할거야. 하지만 그것 역시 시작에 지나지 않는 거야. 새로운 것이 시작된다네. 그 새로운 것은 낡은 세계에 집착하는 무리에게는 모골이 송연하도록 가혹할 거야.’ - Herman Hesse, Demian 中


전쟁은 보수 혁명 담론을 분출시킨 결정적 계기였다. 1914년 발발한 제 1차 세계대전은 독일 보수주의의 역사에 있어서 시대적 획을 긋는 사건이었다. 도스토예프스키와 니체에 몰두하여 부르주아 세계에 대한 낭만주의적 반역을 꿈꾸던 청년들에게 전쟁은 이들이 순수한 모험심을 넘어서서 정치화되는 출발점이었다. 그들의 시각으로는 부르주아 세계에는 더 이상 미래가 없었다. 이에 반하여 보수주의자들이 꿈꾸어 왔던 진정한 공동체란 개인이 유기체적 전체를 위해 자발적으로 복무할 수 있는 그러한 것이었다. 전쟁 중 참호 속에서의 동지애의 경험은 에고이즘으로 타락된 빌헬름 시대를 타파하고 새로운 민족공동체Volksgemeinschaft를 건설할 수 있다는 이상을 갖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개인과 공동체의 운명적 일체성이야말로 이른바 1914년의 이념들Ideen von 1914이 지향했던 바였다.

그러나 전쟁 체험의 실제적 양상은 갈수록 변모해갔다. 최초의 현대적 총력전으로서 제 1차 세계대전은 가공할만한 것이었다. 이 전쟁이 보여 준 조직된 대량 살상은 전전戰前의 순수한 이성을 무력하게 만들어버렸다. 작가 에른스트 윙어Ernst Jünger가 이 전쟁을 ‘무無에 의한 대숙청’으로 묘사한 것은 결코 과장만은 아니었다. 제 1차 세계대전의 체험은 19세기를 지배했던 모든 가치의 전도를 초래하였다.


‘전쟁은 우리의 아버지이다. 그것은 참호의 작열하는 품 속에서 우리를 새로운 종족으로 탄생시켰다. (...) 청년은 세계의 가장 참혹한 지역에서 낡은 세계가 종결되고 새로운 세계가 쟁취되어야 한다는 인식을 획득했다.’ - Ernst Jünger, Einleitung zu Friedrich Georg Jüngers 中


새로운 보수주의 담론 지형의 형성에 선도적 역할을 수행했던 것은 무엇보다 에른스트 윙어의 전쟁 문학이었다. 최전방에서 수차례나 부상당한 경력을 소지한 역전의 용사였던 그는 전후에 자신의 체험을 일련의 문학 작품을 통해 재구성해내는데 성공했다. 문학 비평가 칼 하인츠 보오러는 1978년 그의 저서에서 윙어의 초기 작품들을 ‘전율Schrecken의 미학’으로 특정했는데 이는 매우 적절한 것이다. 윙어의 전쟁 문학은 참혹함과 기괴함, 무의미와 혼돈, 절망과 냉소, 그리고 병적 쾌감과 묵시록적 환영으로 가득 차 있다. 그것은 현대 전쟁의 체험이 남긴 악몽을 치유하려는 시도였다.

과연 무엇을 위해 그토록 많은 희생을 치루어야 했던가? “전쟁이란 학교에서 획득된 가장 가치 있는 것은 생은 그 내적 핵심에서 파괴 불가능하다는 인식이다.” 윙어에 따르면 전투 행위를 통한 ‘내적 체험’이야말로 시련 속에서 얻어낸 가장 소중한 것이었다. 수없이 흐른 피의 대가는 승전과도 맞바꿀 수 없는, 인간 자신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었다. 그것은 19세기의 낙관적 휴머니즘을 거부하는 20세기적 인간론의 대두였다. 윙어의 ‘새로운 인간’이란 나약하고 타락한 부르주아와는 다른 전적으로 새로운 인종으로서 폭력과 파괴를 겁내지 않는 일종의 ‘세련된 맹수’이다. 그들은 승리를 위해서가 아니라 전투 자체를 위하여 싸운다. 윙어는 이처럼 패배에 절망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직시하여 끝까지 투쟁하는 정신 자세를 영웅적 현실주의der heroische Realismus라 명명했다.

윙어는 전우들의 죽음과 그들의 포기된 청춘을 무의미 속에 사장시키지 않기 위해 그것에 나름의 내적 필연성을 부여하고자 했다. 폭풍(Sturm, 1923)에서 작가는 역사적이고 문명적인 시간으로부터 탈출하여 자연의 영원성으로 시점을 변경한다. 전쟁이 몰고 온 파괴는 마치 열대 지역에 몰아치는 허리케인처럼 자연적인 것이었다. 그것은 새 생명의 탄생을 위해 필수불가결한 것이었다. 그는 그의 작가적 상상력을 통해 제 1차 세계대전을 묵시록적 환영으로 묘사해나갔다. 가공할 첨단 무기가 내뿜는 화염은 피의 희생을 통해 세상을 정화시키는 의미를 갖는다. 현대 기술의 위력에 대한 공포는 그것을 자연적인 파괴와 탄생의 순환으로 심미審美 화함으로써 잠식될 수 있었다.

제 1차 세계대전의 체험은 종전의 낭만주의적 반反근대주의를 왜소하게 만들었다. 보수 혁명론자들은 무엇보다 근대 기술 문명의 현실성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기술이 근대 문명을 넘어설 수 있는 수단이 될 수도 있음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것은 그들이 반근대주의 자체를 철폐한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현대 기술에 대한 극단적 찬미는 그것의 파괴력에 대한 공포와 무력감의 표현이기도 했다. 보수 혁명은 결국 그 명칭이 암시하듯 근대성에 대한 인정과 부정의 이중성이 불안정한 평형을 이룸으로써 야기된 담론이었던 것이다. 그것은 바이마르 시기의 독일이 처했던 문화적 위기의 한 증상이었다.


(3)


바이마르 시기 보수 혁명 담론에 참여했던 지식인들은 통일된 대중 정당을 수립하지 않고 다양한 분파의 토론 서클이나 정치 집단 그리고 출판조직들에 산재되어 활동하였다. 그들의 정치적 토대는 공산당과 나치당이 표방하는 대중 운동에 공감하지 않는 반 공화국 세력들이었다. 그들은 사회・정치적 구조변화보단 현실적 상황의 정신적 극복에 주된 관심을 쏟았으며 ‘독일국가인민당Deutschnationale Volkspartei’으로 대표되는 ‘구보수주의’에 대해 새로운 보수주의를 주장하였다는 점에서 공통분모를 지니고 있었다.

보수혁명론자들은 크게 ‘청년보수주의자’ 집단과 ‘민족혁명가’ 집단으로 구분할 수 있다. 청년보수주의자die Jungkonservativen는 비교적 보수주의 원형에 접근하였으며 참전세대에 비해 비교적 구세대에 속했던 분파로서 가장 주도적인 인물은 아르투어 묄러 판 덴 부르크Arthur Müller van den Bruck와 하인리히 폰 글라이헨Heinrich von Gleichen이었다. 청년보수주의에 속하는 조직으로는 유월회Juni-Klub, 독일 신사회der Deutsche Herrenklub 그리고 행동 그룹Tat-Kreis과 독일 민족체Deutsches Volkstum 그룹을 들 수 있다.

청년보수주의가 주로 중장년 세대의 보수주의자들에 의해 이끌어지고 근본적으로 기득권 계층에 호소하였다면 소위 ‘민족혁명가들die Nationalrevolution ren로 일컬어지는 세력들은 참전세대가 주축이었고 이에 따라 ’보수‘보다는 ’혁명‘에 강조점을 두기 시작했다. 여기에는 윙어 형제Ernst-Friedrich Georg Jünger와 같은 ’최전방 전사’의 이데올로기였던 신민족주의Neonationalismus와 그에 영향을 받은 청년 조직인 ‘동맹’ 단die Bündischen이 대표적이다.

한편 민족볼셰비키는 보수 혁명 담론의 모순적 성격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준다. 이 분파는 볼셰비키 러시아와의 연대만이 독일 민족을 베르사유 조약 이후 강요된 정치・경제적 질곡에서 해방시킬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라고 상정했다.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을 주장하며 민족적 과제와 사회적 과제의 결합을 시도했던 그들은 그러나 민족적, 국가적 관심을 상위에 둠으로써 실제로 독일 공산당과 제휴하지 않았다. 오히려 대표자 에른스트 니키쉬Ernst Niekisch는 극단적 비합리주의와 생기론에 입각하여 구프로이센의 군국주의적 공동체를 이상화했고 이는 급진적 사회 혁명의 요구와 딜레마를 빚었다.

보수 혁명론자들은 확고하게 정리된 이론에 입각한 통일된 당파로 집결된 것이 아니다. 바이마르 공화국의 정치・사회적 진행 과정에 수반된 갖가지 논쟁점에 따라 끊임없는 이합집산을 반복하며, 한편으로는 당파를 초월한 민족적 이해를 대변한다 자처하면서도 각자의 교조적 이데올로기에 함몰되어 분파주의를 넘어서지 못했다. 사실상 보수혁명은 문인과 예술가, 또는 비주류 사상가들의 담론이었다고 보는 게 온당하다.

당시 보수주의자들은 특이하게도 ‘혁명’을 옹호하기 시작했다. 1차 세계 대전에 건 모든 관념적 의미가 패전 후 새로운 대상을 요구하자 그들은 11월 혁명에서 ‘커다란 가능성’을 발견했다. 말하자면 혁명은 독일이 서구를 대상으로 감행한 전쟁의 연장이었다.

그렇게 보수 혁명론자들은 공화국의 의회민주주의 체제를 공격한다. 서구의 ‘개인의 자유, 즉 무정부 상태’ 가 아닌 독일의 ‘공동체, 결사체의 자유’ 라는 관념으로 그들은 무장했다. 그러나 이는 단순히 전통 편향이 아닌 나름 새로운 정치관이었다. 헤게모니를 차지하기 위해 그들은 과거 항상 부정적 의미로 사용하던 개념을 자신들의 이론적 진영에 끌어들였다. 예를 들어 민주주의 개념을 민족적 통일성을 지향하는 원리로 두둔하며 바이마르 공화국을 그와 상호 대립적으로 파악했다. 그 실체는 본래의 의미를 완전히 상실한 채 인종결정론적 색채가 짙은 민족주의의 원리로 탈바꿈되었다. 본래적 의미의 민주주의와는 사실상 정반대의 소수 엘리트에 의한 권위주의적 지배 체제에 가까운 것이다.

따라서 개념의 편입은 그들의 반민주주의 포기를 의미하는 것이 결코 아니었고, 그들이 원한 건 그저 모든 종류의 정치적 이데올로기를 불신하고 혁명적 결단을 호소하는 것뿐이었다. 보수 혁명론자의 정체는 이데올로기 대신 행동을 요구하면서도 스스로 추상적인 언어 게임에 몰두해 있고, 민주주의를 혐오하면서도 그것을 자신들의 이념으로 독점하려는 이들이었다. 이러한 모순은 지식인층에 대한 그들의 비판적 언급에서 더욱 뚜렷이 드러난다. 그들에 따르면 ‘지식인은 자신의 머리로 현실을 재단함으로써 결국 현실의 한 곳에 지그시 몸담고 있지 못하는 존재이기에 신뢰할 수 없고, 새로운 세계의 주역은 더 이상 ‘세계를 책상물림과 혼동하는’ 지식인들에게 맡겨져서는 안 되었다‘. 이러한 자기 희화화는 공화국에서든 미래의 세계에서든 자신들이 주체가 될 뚜렷한 정치적 대을 발견할 수 없었음을 말해준다.


(4)


보수혁명 담론은 역사적 진보 이념에 저항하는 데 선도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그들은 역사에서 어떤 이념이나 정신적 가치를 찾지 않고 끊임없이 반복되는 자연적 힘에 주목했다. 물론 이때의 자연은 어떠한 낭만주의적 감정의 찌꺼기도 남지 않은 음산한 곳, 에른스트 윙어의 전율의 미학이 가시화시켜 주었듯, 현대 기술에 의해서 완전히 파괴된 도시, 사지절단된 육신, 파인 대지가 뒤엉킨 차디찬 죽음의 영상이었다. 모든 것은 곧 대자연의 일부로 환원될 것이었다. 이처럼 보수 혁명론자들의 반진보주의는 낭만주의의 우울한 귀족 외투를 벗어던지고 얼음같이 차가워진 알몸뚱이를 드러냈다. 그들에게 역사는 더 이상 장밋빛 진보도 슬픔에 젖은 몰락도 아니었다. 그것은 오직 적나라한 파괴와 부활의 자연 변증법이었다. 값싼 인간적 감정은 거기에 개입될 여지가 전혀 없었다.

그들은 세계대전의 풍파를 겪어낸 세대였다. 스스로가 역사적 대전환기에 위치해있다고 느끼게 되었을 때 보수 혁명론자들은 거센 변화의 흐름에 대한 저항으로서 부르주아적 의미의 ‘역사’를 넘어선 보다 근원적인 부동의 질서에로 시선을 돌렸던 것이다. 이때 그들에게 영감의 원천이 되었던 것은 니체의 ‘동일자 영구회귀’ 사상이었다. 묄러 판 덴 브루크는 <제 3제국>에서 말한다.

“우리의 본성에는 어떤 영원한 것이 있다. 그것은 항상 재구축되는 것이며 일시적으로 중단되기도 방향을 바꾸기도 했던 모든 과정은 그것으로 환원될 수밖에 없다. (...) 보수주의는 홀로 영원하다.”

그들의 초역사적 사고는 단지 근대적 역사관뿐만이 아니라 역사 자체를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것이기도 했다. 보수혁명론자들의 역사상이 최초로 그리고 가장 체계적으로 표현된 것은 오스발트 슈펭글러의 <세계사의 형태론Morphologie>에서였다. 그것은 자연주의 – 생물학적 유기체론 – 의 함의가 짙은 순환론적 시간관에 기초하여 구성되었으며 개인의 이성 대신 집단적 운명을 전면에 내세웠다. 그것은 한마디로 역사적 진보에 대한 부르주아적 낙관주의를 거부한 것이었다.

슈펭글러가 미래에 대한 낙관주의를 거부하며 끝까지 역사의 영역에 머물렀던 반면 ‘민족혁명가’ 에른스트 윙어는 신화의 도래에 대한 기대를 숨기지 않았다. 앞서 살펴보앗듯이 윙어는 제 1차 세계 대전의 체험을 통하여 모든 가치의 전도를 예고하였다. 그의 전쟁문학에 등장하는 제반 기호들, 즉 불과 피, 무無, 맹수, 새로운 인간 등에서는 20세기 총력전이 야기시킨 정신적 충격의 징후를 엿볼 수 있다. 이러한 정신적 충격이야말로 20세기의 최전방 전사들을 부르주아적 의미의 역사와 단절시킨 계기였다.

윙어는 가공할 전쟁을 통해 그간의 부르주아적 일상을 지배했던 역사적 시간으로부터 도피할 수 있는 가능성을 확신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최전방에서의 체험은 생과 사를 가르는 순간의 우연성에 의해 규정되었으며 인간적 이성보다는 동물성이 지배하는 것이었다. 역사적 시간은 여기서 그 한계에 도달하였으며 대신 좀 더 자연적이며 무한정한 ‘운명의 시간’ 이 도래하였다. 이제 개개의 우연적 사건들은 진보의 만유인력이 작용하는 역사 세계의 대기권을 벗어나 새로운 행성 궤도로 진입하였다. 신천지인 이 운명의 행성에서는 ‘선형적 연속성’ - 진보 – 대신 자연의 리듬에 따른 ‘영원한 순환’ 의 역학 법칙이 지배하였다. 시간의 진행이 역사가 아닌 운명으로 사유됨으로써 역사적으로 볼 때 무의미하기 그지없던 모든 우연적인 것들은 나름의 운명적 의미를 획득하게 되었다. 전투에 임한 병사는 ‘전적으로 단순한 감정 상태 속에서 그의 존재가 영원한 순환 속으로 편입되고 개별자의 죽음이 전혀 의미로운 사건이 아니라는 인식을 갖게 된다’.

윙어에게 현대 세계의 양상은 역사의 종말을 나타내고 있었다. 1차 세계 대전이 경험하게 해 주었던 바, 불을 뿜는 가공할 현대 무기와 피로 뒤범벅이 된 우리의 비인간적 삶은 상호 교차되는 징후를 보여주고 있었다. 첨단의 현대 기술과 가장 원초적인 생의 영위는 그 상반된 외양에도 불구하고 공통적인 리듬을 들려주고 있었다. 양자는 모두 역사적 시간으로부터 멀리 벗어나 있으며 몰개성적이고 ‘총체적인’ 면모를 드러내었다. 기계적 운동과 자연적 운동은 비역사적 – 또는 초역사적 – 진행 형식을 따른다는 점에서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보수 혁명론자들은 역사의 진보에 대한 부르주아적 관념을 거부하였으며 더 나아가 역사 자체를 의식적으로 거부하였다. 이러한 반역사적 사고야말로 독일 보수주의를 특징짓는 몰정치성과 급진적인 문화비관주의의 20세기적 표현인 것이다.


(5)


보수 혁명론자들은 나치 시기와 전쟁의 시기를 거치며 현실적인 의미에서나 정신적인 의미에서나 모두 파멸했다. 그러나 2차 세계 대전의 종결과 더불어 과거의 보수 혁명론자들은 회생을 위한 절호의 기회를 맞이했다. 나치 시기에 보수 혁명론자들은 대부분 수혜자 측에 속하지 못하였다. 그들 중 나치를 거부한 이들은 심한 박해를 받았고 나치를 지지했던 이들도 결국에 가서는 거의 예외 없이 숙청당했다. 다행스럽게도 그들은 자기 변호를 위한 좋은 구실을 가지고 있었다. 이제 보수 혁명론자들은 다시 평상적 보수주의자로 돌아왔다. 그들은 혁명의 깃발을 거두고 보수주의의 본령을 사수하는 데 사력을 다하게 되었다. 독일 보수주의의 회생은 자신을 서구 자유민주주의에 동화시키고 공산주의를 새로운 주적으로 설정함으로써 비로소 가능했다. 바야흐로 냉전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과거의 보수 혁명론자들은 2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에 만연했던 염세주의와 자포자기의 물결을 타고 조심스럽게 신생 독일 연방 공화국 – 서독 – 의 이념적 부두에 안착했다. 그들은 이제 민족이나 국가 등과 같은 집단적 정체성에 호소하는 대신 개인의 자유를 최상의 가치로 역설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보수적 자유민주주의자로 탈바꿈되어갔던 것이다.

서독 체제에 편입되면서 보수 혁명론자들은 근대 문명에 대한 비판을 재개하였는데 이는 더 이상 집단적 주체에 대한 호소로 귀결되지 않고 오히려 개인의 자유에 대한 요청과 결합되었다. 그들의 시각으로는 현대 기술산업사회는 고유한 메커니즘에 의해 총체성의 경향을 노정하고 있으며 개인을 소외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이러한 문화비판적 시각은 서구 문명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지기보다는 냉전의 시대에 오히려 동구의 공산주의에 대한 비판을 낳았다. 공산주의야말로 근대성의 부정적 요소가 결정화되어 나타난 체제였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1950년대에 서구 지식계를 풍미한 전체주의totalitarism 개념 속에 잘 반영되어 있다.


*****


장 폴 사르트르는 1965년 9월에서 10월에 거쳐 일본 도쿄와 교토에서 세 차례에 걸쳐 <지식인을 위한 변명> 이란 제목의 강연을 연다. 그는 여기서 지식인을 ‘내적인 모순에 사로잡힌 존재’ 로 묘사한다. 지식인은 자신의 특수한 계급적 이해 관계와 의식상의 보편주의 사이에서 끊임없이 갈등한다는 것이다. 사르트르가 보기에 지식인의 갈등은 본원적으로 지배 계급의 자기 모순에서 유래한다. 지배 계급에 의해 혜택받으며 실용적 지식 전문가가 된 이들은 자신의 지적 산물이 보편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특수한 계층에 봉사하고 있음에 절망하게 된다. 결국 지식인은 ‘보편과 특수의 영원한 상호부정’ 이라는 현실 사회의 분열된 모습을 내면화한 존재라는 것이다. 사르트르가 제시한 대안은 지식인의 앙가주망engagement이었다. 지식인이 사회의 모순 해결에 참여하는 것은 그것이 자신의 내적 모순을 해결하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독일의 보수 혁명론자들은 헤겔적 의미에서의 역사의 종말, 즉 완성된 근대의 정신적 상象이 지나가고 오늘날 보듯이 지식인의 특수성과 계급적 권위가 유명무실해지는 과도기에 저항한 마지막 지식인들이다. 그리고 그 귀결은 철저한 자기모순과 자기 파괴였다.

사르트르가 말한 대로 지식인은 ‘현실 사회의 분열된 모습을 내면화한 존재’ 이며 사회의 모순 해결에 참여하며 자신의 내적 모순을 해결한다는 관점도 있지만 이 역시 충실하게 지식인 개인의 존재적 관점에서 바라본 것이다. 본문에 나온 당대의 보수 혁명론자 중 내가 이름을 알고 있던 사람은 한두 명 정도이다.

사변 속에서 영원하고자 했으나 두 차례의 세계 대전과 이후의 세계상이라는 백 년 남짓한 역사 속에서조차 그 존재는 턱없이 유약했을 뿐이었다. 역사에서 결국 그들은 전전戰前 독일의 이름 모를 지식인 A로 남게 될 것이다. 니체의 사상을 지향했음에도 니체가 말하는 영원의 발끝에도 다다르지 못한 걸 존재의 비극으로 볼지 역사의 편린으로 볼지는 남겨진 사람들이 마저 생각해 볼 과제일 것이다.


참고문헌


보수 혁명 – 독일 지식인들의 허무주의적 이상 (전진성)

미시마 유키오 對 동경대 전공투 1969-2000 (미시마 유키오 外 / 김향 옮김)

도스토예프스키 (살림출판사)

비극의 탄생 / 즐거운 학문 (F.W.니체 / 동서문화사)

독일 국민에게 고함 (J.G.피히테 / 동서문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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