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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unghoo Kim Dec 25. 2019

허무주의, 반지성주의, 그리고 파시즘

(2) 반지성주의의 원류가 된 미국 선교사史와 일본의 양키ヤンキー

들어가며


오늘날 트럼프 대통령이 지향하는 패권주의 미국의 부활을 두고 곧잘 쓰이는 표현인 반지성주의는 자유를 찾아 아메리카 대륙에 건너간 청교도들로부터 시작해서 그 역사가 오래 되었다. 동일한 개념인데도 어떤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뉘앙스가 달라지는 표현이기도 하다. 보통은 지성인을 자칭하는 사람들이 지성적이지 않은 세태를 비판하기 위해 쓴다고 여겨지지만 그 역사를 들여다보면 그렇게 단편적으로 볼 것이 아니다.

모리모토 안리는 저서 <반지성주의 : 미국이 낳은 열병의 정체>에서 미국 선교사史에서 반지성주의로 나타난 현상들과 그 경과를 차근차근 소개하고 있다. 한편 정신과 의사 사이토 타마키는 자신의 저서와 저술가 사토 마사루와의 대담집 등에서 일본의 반지성주의 사조를 양키ヤンキー(*1)라는 표현을 쓰며 그 양상을 면밀히 관찰한다. 이번 편에서는 미국에서의 반지성주의의 태동과 현대 일본에서 나타나고 있는 양키적인 모습들을 다루어 보겠다.


2장 반지성주의


1 미국에서 시작된 반지성주의


반지성주의anti-intellectualism라는 말을 처음 사용한 사람은 『미국 생활에서의 반지성주의Anti-intellectualism in American Life』를 쓴 미국의 역사가 리처드 호프스태터Richard Hofstadter다. 1963년에 출판된 이 책은 매카시즘이라는 광풍이 휩쓸고 지나간 뒤 미국의 지적 전통을 안팎 양면에서 더듬어가는 내용을 담고 있는데, 출판과 동시에 엄청난 호평을 받았고, 이듬해인 1964년에 퓰리처상까지 수상했다.

미국 반지성주의 역사를 살핀다는 것은 미국 기독교 역사를 더듬가는 것이다. 지성이니 반지성이니 하는 이야기가 기독교와 어떻게 연결된다는 것일까? 더구나 이 ‘지성’에 관해서라면 미국의 기독교야말로 기묘한 모순이란 모순은 다 보여주는 그야말로 모순의 집합체가 아닌가? 미국은 세계에서 내로라하는 첨단 과학기술 국가이면서 노벨상 수상자를 가장 많이 배출하고 다수의 명문대학을 자랑하는 국가다. 그렇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기독교가 특이할 정도로 번창해 일요일이면 사람들이 교회에 모여 바다가 갈라져 길이 만들어졌다든가, 죽은 사람이 부활했다든가 하는 이야기를 더없이 진지하게 들으면서 신에게 예배를 드린다. 기독교를 믿는 사람은 다른 나라에도 많지만 진화론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식의 논의가 사회의 책임 있는 지위에 있는 사람들의 입에서 태연하게 나오는 곳은 미국뿐이다.

이러한 반지성주의는 어떤 토양에서 탄생하고 어떤 주의주장을 내용으로 하고 있는 걸까? 엄청난 가세로 확산된 이유는 무엇이며, 누가 이를 퍼뜨린 주역일까?


(1)


청교도 지도자 존 윈스럽John Winthrop은 1630년에 영국 사우스샘프턴 항에서 출항 전 어떤 설교를 했다고 한다. 설교의 골자는 미국을 신약성서에 등장하는 ‘산 위에 있는 마을’에 비유하며 기쁠 때나 슬플 때나 함께하며 신 앞에 올바르고 겸허하게 나아가자는 취지를 담고 있다. ‘산 위에 있는 마을’ 은 신약성서 중 마태오 복음서에 나오는 표현으로, 여기서 윈스럽은 ‘사람들의 시선이 우리에게 쏠리고 있으니 제대로 하자’ 는 격려를 더불어 하고 있다.

미국사 교과서에는 이 설교가 ‘기독교적인 사랑의 모범’이라는 제목으로 소개되어 있다. 그러나 설교를 끝까지 읽으면 구약성서 신명기의 또 하나의 성서 구절이 등장한다. ‘나는 오늘 생명과 죽음, 행복과 불행을 너희 앞에 내놓는다(...) 순종하며(...) 사랑하고 그가 지시하신 길을 걸으며(...) 복되게 살며 번성할 것이다. (...) 그러나 너희 마음이 변하여 순종하지 아니하면(...) 너희는 반드시 망하리라.(신명기 30장 15-18절)’

즉 너희가 신의 길을 외면하면 너희는 반드시 멸망하리니 지금 여기서 ‘생명과 행복’을 선택하라는 권고다. 이런 식으로 기독교 성서에는 신과 인간의 관계를 계약이라는 개념으로 파악하는 사고방식이 자주 등장한다.

유럽 대륙의 개혁파 신학이 말하는 ‘계약’과 뜻이 다소 달라진, 청교도를 통해 미국에 건너온 ‘계약신학’은 신과 인간 쌍방이 서로 이행해야 하는 의무를 진다는 측면을 강조했다. 대등한 ‘교환’을 통한 호혜관계. 미국 신학자 헬무트 리처드 니부어Helmut Richard Niebuhr는 이런 식의 계약에 대한 이해가 현대 미국 사회에도 깊은 영향을 미친다고 한다. 신학적인 계약 개념의 변화가 인간끼리 주고받는 세속적인 계약까지 변질시킨 셈이다.

레이건 대통령도 즐겨 인용한 윈스럽의 설교는 ‘기독교적인 사랑의 모범’ 이라 소개되어 있지만, 종교학적으로 말하자면 이것은 사실상 아주 초보적이고 현세적인 기복신앙의 단계를 벗어나지 못한다. 그리고 이러한 논리가 미국 기독교의 역사에서 여러 번 사용되었다.


레이건은 재임기까지 마치고 퇴임사에서 ‘우리는 자기 역할을 다 했습니다We’ve done our part.‘ 라는 말을 했다. 레이건과 미국 국민이 자신이 맡은 역할을 제대로 해냈다면, 다음 ’맡은 역할‘을 할 사람은 다름 아닌 신이다. 실제로 신이 우리를 축복해주었기 때문에 이와 같은 성공과 번영, 행복을 누리는 것이 가능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며, 따라서 연설의 결말은 항상 ’미국에 신의 축복이 있기를‘이 된다. 언뜻 보면 고매한 도덕 이념을 내세우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 더없이 단순하면서도 적극적인 실리주의를 숨기고 있다.

신대륙 이주 후 역사를 보면 원주민 추방 같은 ‘미국의 원죄’가 있었고, 따라서 계약이 깨져버렸다는 비판도 가능하다. 하지만 레이건의 연설 속에서는 어디까지나 ‘우리가 노력한’ 것으로 감쪽같이 둔갑할 뿐이다. 노력했기 때문에 신은 우리를 인정하고 축복해준 것이다.

막스 베버Max Weber는 모든 종교의 기저에 이런 ‘신이 사랑과 정의의 신이라면 우리가 이토록 불행하고 힘든 건 어째서인가’ 라는 물음에 답하는 신의론이 있음을 간파했다. 그러나 익히 입에 오르는 고난의 신의론에 앞서 베버는 행복의 신의론을 제기한다. 자신이 우연히 행복할 뿐이라면 조만간 그 행복을 잃어버릴지 모른다. 그래서 행복한 사람은 행복의 정당한 근거와 권리까지 원한다.


불교든 기독교든 무릇 종교라는 것은 일단 인간의 도덕이 파탄나는 지점에서 출발한다. 흔히 범부나 죄인이야말로 구원의 대상이며 신명기처럼 단선적인 도덕론은 성서 안에서도 다소 예외적이다. 그러나 미국의 역사는 오히려 거기서 시작되고 있다. 레이건의 끝 모를 낙관주의는 알고 보면 윈스럽의 설교 저변에 깔려 있는 축복 아니면 멸망이라는 쉽고도 명쾌한 이중 논리를 그대로 답습한 것이다.

미국 정신이란 예나 지금이나 이처럼 곧게 뻗은 선로 위를 힘차게 달리는 기관차 같은 정신이다. 이 나라의 문화가 가지고 있는 솔직함, 소박함, 천박함은 모두 이런 이분법을 전제로 하고 있다. 명료하게 선악을 나누는 도덕주의, 생경하고 거만한 사명의식, 흔들림 없는 정통성 자인, 실험과 체험을 으뜸으로 하는 행동주의, 세계적으로 유명한 노골적인 실리지향, 성공과 번영의 자화자찬, 이런 정신 태도는 교차도 역전도 없이 오로지 앞을 향해서만 내달리는 청년처럼 젊디젊은 역사 이해에 뿌리를 두고 있다. 20세기 미국의 산물인 개신교 내부의 근본주의fundamentalism, 진화론을 거부하는 창조주의, 종말론에서 말하는 의로운 전쟁을 현실 세계에서 실현하려는 미국의 군사외교정책 모두 그 산물이라고 말해도 무방하다.


(2)


반지성주의의 출발점으로 연구자들 간 견해가 거의 일치하는 부분은 독립 전 미국 전역을 휩쓸었던 신앙부흥운동revivalism의 물결이다. 식민지 시대 미국에는 신앙부흥운동의 거센 물결을 예비하는 청교도주의의 극단적인 지성주의가 있었다. 이로부터 신앙부흥운동과 그에 따른 강렬한 반지성주의도 생겨나게 된다.

청교도가 이주한 뉴잉글랜드는 40가구에 1명 정도로 이상할 정도로 인구 당 대학 졸업자가 많았다. 대학 졸업자 대부분은 교회 목사로, 식민지 이주부터 독립 혁명까지 150년 통산 목사의 95퍼센트가 대졸자고, 그중 다수가 석사학위도 가지고 있었다. 그런 현상의 기저에는 청교도주의의 특징이 있다. 종래의 가톨릭과 달리 개신교 교회에서는 일반 신도 스스로 성서를 읽으라고 장려한다. 게다가 청교도주의는 헨리 8세의 어정쩡한 국교회 수립이 성에 차지 않던 사람들이 교회를 한층 더 ‘성서의 가르침으로 돌아가자’는 구호에 맞게 하자는 취지로 시작했다.

하버드, 예일, 프린스턴 세 대학은 청교도 목사 양성을 최우선 목적으로 설립된 대학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특히 하버드는 1620년 메이 플라워 호의 아메리카 상륙 후 16년만에 지어졌다. 초등학교도 아닌 대학의 수요가 우선됐던 이유는 그들이 ‘현재의 목사들이 죽고 빈 설교단’을 걱정했기 때문이다.

초기의 하버드는 학부와 대학원을 합친 전체가 신학교로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해in Christi Gloriam’ 건립되었고, ‘그리스도와 교회에Christo et Ecclesiae’ 바쳐진 대학이었다. 하버드 입학 조건은 1) 라틴어 운문과 산문을 읽을 수 있고 2) 그리스어 동사와 명사 활용이 가능한 사람이었다. 졸업 요건은 히브리어와 그리스어로 쓰인 구약과 신약 성서를 라틴어로 번역할 수 있고 내용을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어야 했다.

한편 초창기부터 하버드 대학교는 오늘날 구현하고 있는 폭넓은 지식을 목표로 하는 일반교양 대학으로서의 면모 역시 지니고 있었다. 실제로 17세기 전체 졸업생 439명 중 중 목사가 된 사람은 266명으로 절반에 불과했다. 애초에 하버드는 사립이 아닌 공립으로 출발했지만, 의회나 사회에서 목사가 되는 졸업생이 적다고 불평하는 사람은 없었다. 심지어 설립 인가장에 ‘신학’ 학위에 대한 언급이 없었고 박사 같은 상급 학위로서 신학이 특별이 중시되지도 않았다.

지금은 목사라면 당연히 신학을 공부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당시의 청교도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성서 해석에 필요한 히브리어를 배우는 이유는 히브리어가 ‘모든 언어의 어머니’이기 때문이었다. 그와 별개로 ‘일반적인 문화 가치’를 겨냥하여 그리스어도 학습했다. 인문주의 교양의 가장 중요한 출발점으로서 일반교양 교육이야말로 청교도 목사에게 필요한 전문교육 그 자체였다. 하지만 교리를 체계적으로 배우는 분야로 가면 ‘신앙문답교육’ 같은 초보적인 강의 외에는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청교도는 열심히 하지 않았다.

즉 하버드 대학교는 특정 교파의 교리를 철저하게 가르친다는 의미에서의 신학교는 아니었다. 대학원도 마찬가지였다. 학생은 기본적으로 석사과정을 마쳐야 한다는 것이 일반적인 기대였고, 석사학위를 하버드 대학교 교육이 끝나는 종결점으로 여겼다. 위에서 언급한 ‘목사의 대부분이 석사학위자’ 라는 사실은 이를 뜻하는 것이다. 그러나 대학원 과정에서도 전문적인 신학 연구는 거의 행해지지 않았다. 석사 수료 시 라틴어로 하는 ‘학위 수료 토론’의 주제도 신학보다는 윤리학이나 형이상학 등이었다. 여기서 말하는 석사는 현대의 ‘교양학 석사’ 로, 신학을 본격적으로 공부하려면 몇 년 더 공부해 신학 학사(B.D.), 또 몇 년을 더 공부해 신학 박사(D.D.)가 되어여 했다. 그러나 전문적인 의미에서 신학을 공부하려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한마디로 하버드의 교육은 목사 양성이라 해도 신학이 아닌 일반교양의 교육이었다. 2대 총장 찰스 촌시Charles Chauncy는 “성서는 구원 이외에도 많은 것을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에 목사가 성서의 진리를 설교하기 위해서는 학예며 학문Arts and Sciences 관련 지식을 가지는 것이 도움이 된다.” 고 설명했다. 개신교 교단의 성직자는 신성한 신분의 예식자가 아니라 설교란 수단으로 교육을 행하는 사람이다.

개신교 교회는 베드로전서에 나오는 ‘만인제사장’ 의 원리에 따라 모든 신도가 스스로 성서를 읽고 직접 그 메시지를 받아들이는 것을 이상적으로 보았다. 인문주의 성서 해석 기법은 일반적인 고전이나 문학에도 공통되는 기법으로 대학의 이러한 지적 훈련이 목사 지망자뿐 아닌 모든 학생이 신사gentleman가 되는 데 적절하고 필요한 내용이라 보았으며, 이것이 청교도 특유의 대학 교육에 대한 이해였다.

18세기 들어 하버드 대학교가 교리적으로 해이해지고 불건전한 자유사상 때문에 타락했다고 비판하는 사람들이 늘어나, 그에 맞서는 형태로 예일 대학교가 설립되었다. 그렇지만 예일 대학교도 영국 국교회라는 해로운 독에 오염되어 타락했다면서 반세기 뒤에 프린스턴 대학교가 설립되었다. 하지만 이들 대학 모두 목사 양성과 일반 교육이라는 두 가지 목적을 모순 없이 받아들였다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다.


한편 수요 측면에서 뉴잉글랜드는 인구당 목사 수가 무척 많았는데, 17세기 중엽 기준으로 버지니아 주는 목사 1인당 신도 수가 3000명 이상이었던 데 비해 뉴잉글랜드는 400명 정도였다. 이 시기 목사는 전문직으로서 존중을 받았다. 가톨릭의 구습을 부정하는 청교도 교회의 목사는 교회 신도 전원의 투표로 직위를 맡았으며, 개별 교회의 초빙 형식이다보니 대부분 평생 같은 교회에 머물렀다.

초반에 언급했듯 ‘계약’을 기조로 한 이주민의 질서는 뉴잉글랜드에서 특유의 형태로 나타났다. 모든 사람은 뉴잉글랜드라는 식민지 전체와, 개별 교회와, 교회 성원 하나하나와 계약 관계를 맺고, 새 신자는 모두가 보는 앞에서 신앙을 고백하고 투표로 입회를 허락받았다. 교회 입회는 입회자로서 신과 새로운 계약을 체결하는 의식이었다.

그들의 생활의 중심은 일요일 예배였다. 남녀노소 모두 노동을 쉬고 교회에 모이며, 정당한 이유 없이 지속적으로 불참시 벌금이 부과되었다. 예배는 아침 9시부터 기도와 성서 낭독, 설교로 진행되었는데 목사의 기도가 길면 길수록 좋은 평가를 받았다. 보통 한 시간 이상 계속되는 기도가 끝나면 두 시간 정도 설교가 지속되었다. 정오를 끼고 오후 두 시까지 하는 ‘강의’ 예배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아동용 설교 같은 것은 없었고, 아이들은 이해 안 되는 내용을 일요일 저녁식사 자리에서 가장에게 질문 받는 게 보통이었다.

이렇듯 청교도 사회는 매우 지적이었다. 그러나 다양한 구성원으로 이루어진 사회가 언제까지나 높은 수준의 지적 통제에 복종하는 상태가 될 리 없었다. 그리고 여기서 오는 부담이 나중에 적잖은 문제를 야기하고 신앙부흥운동의 계기가 되기도 했다.


(3)


미국적인 현상으로 몇 개를 들자면 텔레비전 전도televangelist와 대통령 선거 과정의 정치 쇼가 있다. 이러한 특이한 대규모 대중 동원전과 집단적 열광의 전통의 배경에는 ‘신앙부흥revival’이 있다. 신앙부흥은 청교도 사회의 지적 토양 위에서 개화해 이후 미국 역사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말하자면 미국 사회가 앓는 주기적인 열병과도 같은 것이다. 18세기 최초의 대규모 리바이벌의 파도는 미국 독립혁명을 정신적으로 준비하는 계기가 되었고, 19세기에 다시 찾아온 리바이벌의 파도는 노예제 폐지운동과 여권신장운동에서 지도적 역할을 수행했으며, 20세기에는 민권운동과 소비자운동에 영향을 미쳤다.

개신교 신앙에서의 평등에 대한 주장은 처음에는 정신적인 영역에 국한되어 있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실제 사회에서 평등으로 전환하려는 장기간에 걸친 노력과 연결되었다. 리바이벌은 그 ‘평등’ 이념을 강력하게 일깨우는 역할을 하였다. 이 철저한 평등주의가 반지성주의의 핵심 구성요소다.

반지성주의의 출발점을 찾자면 호프스태터의 “학식 있는 목사들이 완전히 부정되는 최초의 대사건은 18세기 중반 대각성 시기에 일어났다” 는 발언이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신앙부흥이 처음 명확한 기록으로 남아 있는 1734년 매사추세츠 노샘프턴의 목사 조너선 에드워즈Jonathan Edwards가 남긴 이야기는 이렇다. 그해 봄 두 명의 젊은이가 연달아 급사하자 사람들 사이에서 인생의 무상함에 대한 실존적인 불안이 널리 퍼졌다. 게다가 몇 사람의 회심回心이 이어지고, 더구나 품행이 좋지 않던 부인이 극적인 회심에 이르는 등 도시 전체에서 종교적 신심이 급속히 고양되었다. 거리에서도 눈에 보일 만큼 풍속이 개선되었다. 그 외에도 경박한 말과 소음이 줄고 단식을 하고 예배와 기도회가 성황을 이루는 등 도시 전체가 집단 히스테리 상태에 빠진 채 몇 달간 이어졌다. 이를 이끈 아마추어 전도자들 중 특히 눈에 띄는 활약을 한 조너선 에드워즈와 조지 화이트필드George Whitefield는 리바이벌에 관해 완전히 같은 뜻을 가진 협력자였다.

에드워즈가 1734~1735년의 신앙부흥을 기록한 『성실한 보고A Faithful Narrative of the Surprising Work of God in the Conversion of Many Hundred Souls in Northampton』를 출판할 당시에는 사례자 대다수가 교회에 소속된 신도여서 그때 처음으로 기독교 신앙에 눈뜬 것은 결코 아니었다. ‘리바이벌’, 즉 ‘부흥’ 이라는 명칭처럼 기성 신도가 새로이 신앙의 심화에 이른다는 의미였다. 1741년 에드워즈의 <성난 신의 손안에 있는 죄인Sinners in the Hands of an Angry God>이라는 설교는 교과서에도 실릴 정도로 유명한데, 이를 들은 청중이 실존의 심연深淵을 들여다본 것 같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신음하고 부르짖다가 의자에서 굴러 떨어지다시피 하며 내려와서는 에드워즈 주변으로 몰려들어 “구원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라고 묻고 또 묻느라 그는 설교를 끝까지 마치지 못했다. 이것이 ‘대각성’ 의 시작을 알리는 사건이었다.

이 설교의 유명함 때문에 청교도의 설교 하면 지옥의 불을 거론하며 잔뜩 겁주는, 공포를 조장하고 협박을 일삼는 설교라는 인상이 퍼졌지만, 에드워즈의 사상은 훨씬 넓고 미묘하고 심오하며 기본적으로 신의 우아함과 축복을 이야기하는 밝고 긍정적인 내용이다.


신앙부흥이 일어난 이유를 연구자들은 중산층 상인 계급의 발흥, 정치행정상 대립, 젊은이의 성적인 불안과 초조 등 여러 가지로 이야기한다. 다만 저자가 밝히는 내적 요인은 뉴잉글랜드 사람들의 마음속 깊이 자리 잡고 있는 회심 체험에 대한 강한 희구다. 청교도는 교회의 순화純化를 추구하고, 일정한 요건을 충족시키는 소위 ‘만나뵌 성도聖徒’만으로 교회를 구성하려고 했다. ‘분파’, ‘종파’ 라 불리는 이러한 집단의 형성은 처음에는 진입 장벽이 높고 결속도 견고하지만 점차 느슨해진 나머지 그에서 또 다른 집단이 만들어지며 성장하고 확대하는 과정을 반복한다. 구세계에서는 기존 체제를 비판하는 사람들이었지만 신세계에서는 스스로가 체제를 건설하고 이끌어가는 입장에 있다, 여기서 모순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2세대와 3세대의 계승에서 문제가 본격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기독교 신앙에서 ‘타고난 기독교도’란 한 명도 없기 때문에 예외 없이 특정 시점에 세례를 받고 기독교도가 된다. 어릴 때 유아 세례를 받더라도 언젠가 스스로 신앙고백을 하여야 견신례堅信禮 의식을 거쳐 정식 신도가 된다. 그런데 성인이 되어 청교도가 된 사람은 자발적 결단이라도 그 자식들은 반드시 부모와 같은 신앙 체험을 한다고 말할 수 없다. 회심이 무엇이고 은총이 무엇인지 자발적인 경험이 분명하지 않기에 스스로 단언하여 고백할 수 없는 반쪽짜리 신도(반거충이)로 남는다.

거기다 17세기 매사추세츠에서는 교회의 신도 자격을 가지고 있는 사람으로 시민 자격이 한정되어 있었다. 교회의 정식 신도가 아니면 투표권도 없는 반쪽짜리 인간 취급이었다. 더 큰 문제는 반쪽짜리 신도의 아이는 세례를 받을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지금도 유아세례는 부모의 신앙을 담보로 한다. ‘아이를 기독교도로 기른다’ 는 약속의 선취로서 아이는 세례를 받는다. 그래서 1세대와 2세대 사이와 달리 2세대와 3세대 사이에는 ‘세례를 받지 못해 구원받지 못할 수 있다는’ 두려움이 있었다. 유아 사망률도 높은 시대였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1662년 ‘중도계약’ 이라는 제도를 고안하는데, 말 그대로 성인 회원으로 정식 계약을 맺기 전 중간 단계라는 의미로, 이로써 반쪽짜리 성도도 아이에게 세례를 받게 할 수 있었다. 이 논리는 계승되었기에 뉴잉글랜드 교회는 신앙의 성숙도에 상관없이 지속적인 신도 재생산이 가능한 제도를 확립했다. ‘만나 뵌 성도들의 순수한 교회’를 지상에 건설하려던 청교도들이 큰 타협을 한 것이다.

에드워즈가 부임한 노샘프턴 교회는 전임 목사 때 이 새로운 제도를 신속히 도입했다. 신도의 과반수를 차지하는 중도계약자들은 자신의 바람직하지 않은 상태를 강하게 자각하고 있었고, 온전한 한 사람의 교회원이 되어 정치사회 분야에서도 공헌하고픈 바람이 늘 자리 잡고 있었다. 그 기폭제만을 기다리던 차에 위에서 언급한 ‘대각성’ 이 발발한 것이다.


한편 그들을 둘러싼 외적 상황도 간과할 수 없다. 대각성 이전 1700년대에서 1740년대의 기간 동안 뉴잉글랜드의 인구는 260퍼센트나 증가했다. 인구 증가는 대중매체의 발달을 동반했고 때마침 영국 본토에서 출판허가법이 1695년에 폐지되어 영국령 뉴잉글랜드에서도 이후 40년 동안 식민지 전체에 열두 개나 되는 정기간행물이 발행되고 매사추세츠의 서점업자는 네 배나 증가했다.

그리고 이 간행물들은 목사의 설교나 논문 등의 기사도 실었지만 그보다 더 많이 각지의 리바이벌에 관한 뉴스를 실었다. 당시 전문 특파원 같은 게 없었으니 정보 출처는 행인, 뱃사람, 행상인, 순회설교사, 군인 등이었다. 각 지역의 일반 독자에게 투고도 받았는데 이는 이러한 리바이벌 소식을 읽을거리로 요구하는 수요가 있었음을 의미한다. 에드워즈의 『성실한 보고』역시 이 중 하나였다. 200년 전 루터가 번역한 독일어 성서가 구텐베르크 인쇄술로 널리 유포되었듯 매체와 콘텐츠의 불가분의 연결과 순환이 신앙부흥운동에서도 재현되었다.

일반 대중의 수요에 맞는 정보가 공급되면 그런 정보가 한층 많은 수요를 창출하여 공급에 필요한 경로를 스스로 만든다. 콘텐츠가 매체를 만들고 매체가 역으로 콘텐츠를 육성하고 다시 그것을 전달하는 매체도 한층 발달하는 선순환이 일어나는 것이다.


(4)


미디어 전략을 최대한 효과적으로 활용한 사람이 당대 신앙부흥운동의 또 다른 지도자 조지 화이트필드였다. 신앙부흥운동의 본줄기나 반지성주의의 원형을 탐구하는 측면에서는 에드워즈보다 중요도나 흥미 면에서 한 단계 위라고 사료된다.

감리교의 창시자 웨슬리 형제에게 감명 받아 영국 교회 목사가 된 화이트필드는 형제의 대리인으로 미국에 건너간다. 쩌렁쩌렁 울리는 시원한 목소리에, 적절한 손짓과 몸짓이 섞인 설교가 많은 사람들을 매료시켰으며, 사람들은 그를 ‘신의 연출가Divine Dramatist’라고 불렀다.

일례로 이주한 지 얼마 안 되어 영어를 한마디도 모르는 독일 여성이 화이트필드의 설교를 듣고 감동한 나머지 “평생 이런 큰 깨달음은 처음입니다” 하고 외쳤다는 일화도 전한다. 속내를 들여다보면 신앙부흥운동의 깊이 없고 천박함을 조롱하려는 의도도 엿보이지만 대도시에서 정처 없이 방황하던 이민자들의 불안과 종교에 대한 수요를 잘 말해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화이트필드의 독자적인 ‘설교하고 출판한다preach and print’는 전도 방법은 앞서 말한 인쇄 및 출판 분야와 맞물려 성공을 거두었다. 현지 교회 목사들은 그를 달갑지 않게 여겼지만 화이트필드는 그러한 알력까지도 역으로 이용했다. 벤자민 프랭클린은 이 화이트필드의 든든한 사업 파트너이자 친구였다.

익명의 투서를 통해 화이트필드를 ‘신의 행상인Pedlar in Divinity’이라 비난하는 사람도 있었다. 자기 일을 만들어내고 상품화하고 선전하고 판매하여 집회에 더 많은 사람들을 모았다는 게 비난자들의 생각이었다. 신앙부흥운동과 인쇄업자 사이에 동반 상승 또는 호혜적인 이익 제공이 있었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를 일방적으로 인쇄업자의 비즈니스라고 볼 수 없다. 그렇게 되면 종교 개혁 역시 인쇄업자들의 이윤 추구 음모로 환원될 수 있기 때문이다.

리바이벌 집회는 대도시뿐만 아니라 지방 소도시에서도 거행되었다. 많은 경우 도시의 광장이나 강변, 숲의 공터 등이 집회 장소가 되고, 평일 저녁 등 일요일 이외의 시간을 이용했다. 이런 전통은 현대 부흥집회에서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20세기부터는 야구장을 집회장으로 쓰기도 한다. 왜 일요일 이외의 시간에 야외에서 집회를 했는가 하니 도시 체제를 지배하는 기성 교회 목사들이 반대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유독 화이트필드가 유명했을 뿐 대학을 나온 것도 아니고 교회에서 정식 임명을 받은 것도 아닌 순회설교사들이 대부분이었고 이들은 그저 신앙적 확신 하나에 의지해 어느 날 사람들을 모아놓고 수상한 설교를 하고 떠나는 식이었다.

대학 나온 인텔리가 두 시간 동안 떠드는 난해한 교리 설명보다 평이한 언어와 대담한 손짓 몸짓을 동반하여 일상 신변잡기를 풀어가는 것을 청중은 훨씬 재미있어했다.

물론 기성 교회 목사들도 손 놓고 보기만 하지는 않았다. 당시 목사연합회는 “하버드나 예일 대학교를 졸업한 사람이 아니면 교회에서 설교할 수 없다”(프린스턴 대학교는 10년 정도 뒤에 설립되었다)라고 정해놓았지만, 그런 원칙도 야외에서 멋대로 여는 집회의 경우에는 힘을 쓰지 못했다. 분한 마음에 때로는 이들 무단침입자 면전에서 자격을 물으며 따지기도 했다. 그러나 리바이벌리스트들은 “하느님은 복음의 진리를 ‘안다는 사람들과 똑똑하다는 사람들’이 아니라 철부지 ‘어린아이’에게 나타내신다고 성서에도 나와 있다(「마태오복음서 11장 25절」). 당신들에게 학식은 있을지 모르지만 신앙은 교육의 유무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다. 바로 당신들 같은 사람이야말로 예수께서 비판하셨던 ‘학자 바리새인 같은 부류’ 아니겠는가?” 이것이 반지성주의의 ‘결정적 한마디’다.

기독교뿐 아니라 일반적으로 종교에는 ‘인공적으로 쌓아 올린 오만한 지성’보다 ‘소박하고 겸손한 무지’ 쪽이 소중하다는 기본적인 감성이 존재한다. 신의 진리를 인텔리만 알아서는 곤란하다. 신의 진리는 접하면 누구라도 이해할 수 있는 진리여야 한다. 특히 당시 미국에서는 유럽이라는 구세계와의 대비를 통해 그들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습관이 있었다. 유럽은 지적이고 문화적이지만 퇴폐적인 죄악의 세계이므로, 자신들은 그곳을 벗어나 신대륙에 새로운 세계를 만들었다. 그러므로 인간이 만들어낸 문화적 지식보다는 성서에서 말하는 신성한 태초의 지식으로 회귀하고 싶다는 것이 그들의 바람이었다. 반지성주의는 ‘학자’와 ‘바리새인’, 즉 성서 시대 당시 학문과 종교 권위자를 정면으로 비판했던 예수의 말을 궁극적인 출발점으로 하고 있다.

리바이벌리즘은 이런 의미에서도 일종의 회귀운동이다. 여기서 드러나는 것은 지성과 영성의 대립이 아니라 지성의 헤게모니에 대한 영성의 이의 제기다. 물론 지성 자체에 반대하는 것은 아니지만 영성보다 지성이 중요하다는 가치 판단에 대해서는 격렬하게 반대한다. 그리고 그 근거는 ‘신 앞에서는 만인이 평등하다’는 더없이 근본적인 종교 원리다. 아무리 높은 학문을 손에 넣었다고 해도, 아무리 높은 지상의 권위를 몸에 지니고 있다고 해도, 신 앞에서는 다른 사람과 하등 다를 바 없는 한 사람의 인간이며 죄인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이다. 이렇듯 신 앞의 평등이라는 급진적인 의식에 의해 지상의 학문이나 제도의 권위를 완전히 날려버린 것이 신앙부흥운동이다.


그렇지만 당시 사람들이 신앙부흥 사건을 모두 같은 시각으로 보았다고는 할 수 없다. 신앙부흥운동을 둘러싸고 찬성파와 반대파가 또렷하게 나뉘었고, 전통적인 가치관에 입각해 신앙부흥운동에 반대하는 보수파는 구광파Old Lights, 찬성파는 신광파New Lights라고 불렸다. 대표적인 구광파이자 정식 목사였으며 훗날 하버드 2대 총장이 되는 찰스 촌시는 리바이벌에 고양된 사람들을 허위, 과장, 혼란, 미신 등의 단어를 써가며 신랄하게 비판했다.

확실히 신앙부흥운동에서는 구원의 환희와 절망의 비탄 같은 과잉된 감정 표현, 소리를 지르고 울어대는 예배 중의 아비규환, 경련과 경기 같은 신체적인 징후는 물론 일상생활에도 지장을 초래하는 질서의 문란도 눈에 띈다. 집단적인 흥분이 붕괴와 파국을 초래하는 일도 있었다. 1734-1735년의 신앙부흥에 즈음해서는 회심 체험을 얻지 못했다고 절망해 자살하는 사람까지 나왔다. 이런 과격한 일탈은 ‘반지성주의’라는 말이 탄생하는 계기가 되었던 1950년대 매카시즘과 완전히 같은 전개다.

신앙부흥운동을 이끄는 견인차 역할을 했던 목사와 설교자 중에도 절도 있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이 혼재되어 있었다. 에드워즈와 화이트필드는 대학교육 이수라는 의미에서도 전통적인 목사 자격을 가지고 있었을 뿐 아니라 말할 때 태도나 말투의 차이는 있어도 지적은 절도를 가지고 있던 축에 들었다. 그러나 각지를 떠도는 자칭 ‘설교자들’ 중에는 기적과 치유 능력을 흥밋거리로 내세우는 등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데만 혈안이 된 무리도 있었다.


신앙부흥은 미국 독립혁명 30년 전에 일어났다. 신앙부흥은 각자가 자기 내면을 응시하고 자신의 신앙 상태를 철저히 검토할 것을 요구했다. 그리하여 일단 확신이 생기면 지상의 어떤 권위도 두려워하지 않고 대담하게 도전하기도 하고 반발하기도 하는 정신을 다지게 되었다. 이런 자주독립 정신이 개인의 자각과 평등의식을 기르고, 결과적으로 미국 사회를 독립혁명으로 이끌었으며, 이후 민주주의 발전을 채찍질했으리라는 점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미국의 기독교는 교파에 따른 교리와 성직자가 행하는 의식을 중심으로 한 것이 아니라, 신도 각자가 직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회심과 새로운 삶을 중심으로 하는 실천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 이런 미국형 기독교의 형태를 복음주의evangelical라는 단어로 표현하는데, 이는 교파를 초월한 기독교의 최대공약수인 생활 속의 체험을 대변하는 개념이다.

‘신광파’ 중심인 예일 대학교가 동부와 중서부에서 설립된 여러 대학에 졸업생을 내보내고 그들 여러 대학이 다시 대표적인 지도자를 배출하는 식으로 미국적인 기독교의 골격을 형성하고 있었다. 19세기 신앙부흥 지도자 찰스 그랜디슨 피니Charles Grandison Finney, 드와이트 라이언 무디Dwight Luman Moody, 20세기 대중전도가 빌리 선데이Billy Sunday, 나아가 현대의 화려하기 그지없는 텔레비전 전도자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이러한 미국적인 복음주의 전통을 이끈 기수들이다. 애초에 대각성이 없었다면 미국의 기독교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성장했을지 모른다. 그랬다면 미국의 문화도 정치도 경제도 외교도 지금과 전혀 다른 모습을 보였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신앙부흥운동이야말로 오늘의 미국을 만든 주역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리바이벌리즘은 남부와 서부에도 전파되어 그곳의 문화와 역사를 다양한 방식으로 변화시켰다. 마크 트웨인Mark Twain의 『톰 소여의 모험The Adventures of Tom Sawyer』을 보면 남부의 작은 마을에 신앙부흥파가 찾아와서 잠시 머물다 떠나는 과정이 아이들의 눈을 통해 유머러스하게 묘사되고 있다. 노예해방운동과 여권신장운동도 신앙부흥운동에서 원동력을 얻어 뻗어나간 것이다. 이들 모두 결국은 ‘신 앞의 평등’ 이라는 근본 이념에서 약자들의 권리를 지지하고 촉구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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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지성주의는 종교적 확신을 근거로 한 철저한 평등관에서 시작되었다. 신 앞에서는 학식이 있든 없든, 대학을 졸업한 인텔리든 초등학교밖에 나오지 못한 무식쟁이든, 모두 똑같이 귀중한 인격체다. 종교 개혁을 거치며 막스 베버가 말한 ‘프로테스탄트 윤리’가 탄생하며, 프로테스탄트가 압도적 주류였던 미국에서는 ‘평등’이라는 가치관이 다른 어느 나라보다 강력한 원리가 되고, 그것이 민주주의 원칙에도 부합해 한층 강해졌다. 미국의 국가 이념으로서도 제퍼슨Thomas Jefferson의 『독립선언문』은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창조되었다”고 선언한다.

단 성서에도 ‘모든 사람은 신 앞에 평등하다’고 기록된 바와 달리 실상은 한계가 있었다. 초대 교회의 기틀을 닦은 사도 바울도 그 시대의 가부장적 관습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고 지도자의 권위에 대한 복종을 장려했다. 루터도 영주에 맞서 반란을 일으킨 농민들을 죽일 것을 조언했다. 이는 뉴잉글랜드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본국에 충직한 신하들에 의한 선량한 사회 건설을 목표로 함을 보이고 싶었던 식민지인들은 본국에서 비국교도파decenter라는 점에서 처지가 같던 침례교도와 퀘이커교도를 박해했다.

오늘날 퀘이커교도는 온화한 집단으로 알려져 있지만 17~18세기 당시만 해도 교회형 집단인 청교도와 대조되는 대표적인 종파형 집단으로, 교회의 특별한 존재론적인 의의를 송두리째 부정하는 과격하고 급진적인 성향을 띄었다. 퀘이커교도는 모든 사람을 그대thou라 불렀는데, 이는 신분의 고하와 일절 상관없었다. 그러나 사실 신앙에 근거해 권력에 의기양양하게 도전하는 자세는 가장 명쾌한 반지성주의의 표현이다.


이런 종교적 열성은 정치구조에도 깊은 영향을 미쳤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은 원래 남부 버지니아 출신이다. 버지니아는 식민지 이주 이래 본국과 마찬가지로 영국 국교회를 공정교회로 하고 있었다. 제퍼슨도 매디슨James Madison도 특별히 신심이 독실한 기독교도는 아니었다. 그들은 기독교도라는 사실을 공개적으로 부정하지는 않았지만, 마음속으로는 이신론理神論이라는 합리주의적 종교관을 가지고 있었고, 기성 교회와 목사들에게는 회의와 경멸을 품고 있었다.

공부를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온 매디슨은 공정교회법에 따라 박해받는 침례교 설교자들을 자진해서 변호하는 등 종교적 소수자에 대한 억압에 반발을 느낀다. 훗날 정치가가 되고 다수의 체제파 목사들의 반대를 무릅쓰며 제퍼슨과 함께 공정교회법을 폐지하게 된다. 이들의 노력은 정교분리와 종교의 자유를 명기한 연방헌법의 ‘권리장전’에서도 결실을 맺는다. 매디슨의 확신에 따르면 신앙과 양심의 자유는 “모든 권리의 중심으로, 무엇보다 신성한 것”이고, 어떠한 정치권력도 이를 방해해서는 안 된다.

건국기 미국의 무대 한쪽에는 종교에 열심인 복음주의 기독교 신도, 특히 주류 교회의 박해를 받던 침례교, 퀘이커 등 소수파 기독교 신도가 있었고, 다른 쪽에는 종교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지만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침해하는 것에는 단호히 반대하는 합리주의적인 사상을 지닌 세속적인 정치가들이 있었다. 이들의 협력으로 미국은 인류 역사상 최초의 정교분리 국가로 출발하게 된다.

역사에서 정교분리는 대개 정치가 종교를 몰아내는 형식이지만 미국에서는 정반대로 종교적인 열심히 표명된 결과다. 이는 종교의 경시나 배제가 아니라 개인이 자유롭게 자신의 생각대로 종교를 실천할 수 있게 하려는 시스템이다. 국가가 특정 종교와 종파를 ‘공적인 것’으로 정해두는 동안에는 이런 자유가 절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국가 자체를 비종교화함으로써 개인이 자신의 신앙을 최대한 발휘하고 실천할 수 있는 자유로운 공간을 창출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런 ‘신교의 자유’ 에는 무종교라는 선택지의 가능성을 명확하게 의식하고 있었다. 신앙부흥운동에 자극받아 비공인 교회를 설립했다는 이유로 처벌받은 솔로몬 페인Solomon Paine은 “양심의 자유는 신에게서 받은 만인의 평등으로 불가침의 권리다”라 주장했다. 그 외에도 ‘양심의 자유’에 의한 평등을 내세운 침례교도들이 많은 이의 공감을 얻어냈다.

민주주의라는 시스템은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이 도덕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할 때 비로소 기능한다. 이런 도덕적인 능력은 특별히 교육을 받지 않아도 누구든 자연스럽게 발휘할 수 있는 능력이다. 비유해서 말하자면 태어나면서 사람에게 달려 있는 도덕적인 나침반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스스로 정치를 담당할 능력이 없다 해도 그것이 가능한 사람을 선택할 정도의 지성과 덕성은 가지고 있다. 평균적인 능력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좋은 정치와 나쁜 정치를 분별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렇지 않다면 선거를 해도 의미가 없을 것이다. 이것이 민주주의의 기본이 되는 신념이다.

이런 능력이 이성의 능력과 동일한 것은 아니다. 이성의 능력은 분명 사람에 따라 차이가 있고 평등하게 분배되어 있다고 말하기 힘들다. 그렇지만 그보다 소박한 도덕적인 분별력은 모두에게 공통으로 주어져 있다. 제퍼슨은 제안한다. “시험 삼아 도덕 문제를 하나 내보는 것도 좋다. 농부는 대학교수와 같은 수준으로 좋은 판단을 내릴 수 있을 것이고, 경우에 따라서는 인간의 쓸데없는 규약이며 결정들에 얽매이지 않는 만큼 대학교수보다 나은 판단도 가능할 것이다.” 반지성주의의 성장의 토대가 되는 미국 사회의 철저한 평등주의를 볼 수 있는 대목이다.


미국 사회의 기본 패턴은 교회형과 종파형의 대립이다. 교회형의 정신은 국가와 정부를 지상에 있는 신의 도구로 간주하면서 낙관적이고 적극적인 사회 건설을 지향하고, 종파형의 정신은 지상의 모든 권력을 인간의 죄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존재하는 필요악이라 생각하고 그것에 대한 감시와 경계를 소홀히 하지 않는다. 큰 정부에 대한 종파주의 특유의 경계심은 입법, 사법, 행정의 삼권분립을 토대로 하는 미국의 헌법 이념에도 영향을 주고 있다. 미국에서 권력이란 항상 견제와 균형의 원리 아래 작동해야 한다는 발상이 널리 받아들여진 것은 종파주의가 사회 곳곳에 침투해 있었기에 가능하다. 이는 계몽주의에서 내세우는 개인주의와 합리주의, 회의주의와도 궁합이 잘 맞는다. 모두 지상의 제도와 조직을 절대시하지 않고 각자의 이성과 신앙을 유일한 판단 근거로 하기 때문이다.

미국의 종교 분포가 어떻게 변화한다고 해도 이런 기본적인 짜임새는 변하지 않는다. 가톨릭이든 개신교든, 혹은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무교라고 해도 이런 문제 앞에서는 모든 미국인이 교회형 아니면 종파형 가운데 어느 한쪽으로 행동하기 때문이다. 미국인 다수는 기독교도지만 그들이 모두 자신을 각별히 종교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반복해서 표명하는 정부며 권력에 대한 불신은 정치가 아니라 신학에 근거를 두고 있다. 사람들은 한편으로 정치권력의 개입이 필요함을 인정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가능한 한 작은 쪽이 좋다고 생각하며, 더불어 가능하면 자신은 그것과 관계를 맺지 않고 살고 싶어 한다. 그것이 미국적인 이상이다.

일찍이 영국인 비평가 길버트 키스 체스터턴Gilbert Keith Chesterton은 미국을 “교회라는 영혼을 가진 나라”로 묘사했지만 반은 옳고 반은 틀린 말이다. 미국이라는 나라는 ‘교회’라는 영혼과 함께 그것을 끊임없이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는 ‘종파’라는 또 하나의 영혼도 가지고 있다. 권력에 대한 뿌리 깊은 의심을 가진 반지성주의는 이런 종파주의 특유의 감성에도 잘 맞아 한층 강해지는 결과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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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반지성주의를 이해하려면 인간의 이성이 자연계 안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생각할 필요가 있다. 노먼 F. 매클린Norman F. Maclean이 쓴 자전적 소설 <흐르는 강물처럼A River Runs Through It>은 숲이 우거진 몬태나의 시골 마을에 살던 작가와 가족의 모습을 인생의 황혼녘에 젊은 시절을 되돌아보며 담담하게 이야기한다. 영화화에는 젊은 시절 브래드 피트가 출연한다. 영화는 다음과 같은 말로 시작된다. “우리 집에서는 낚시와 종교는 둘이면서 하나였다.” 장로교 목사인 아버지는 신앙과 제물낚시로 두 아들을 교육한다. 낚시라 해도 아무 낚시나 다 좋은 것은 아니다. 낚시는 제물낚시여야만 하는데 강의 환경과 계절에 맞춰 정교한 가짜 미끼를 만들고 자신을 자연 속에 완전히 융화시켜야만 물고기를 낚아 올릴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숭고한 예술이고 종교와도 같은 헌신을 요구한다.

신학적으로도 정통파 목사였던 아버지는 인간은 원죄 때문에 본래 받아야 하는 은총을 받지 못하고 타락하고 말았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인간은 신이 정한 질서로 돌아가고 거기에 복종함으로써만 제대로 물고기를 낚을 수 있다. 그렇지만 예술은 항상 완성을 추구하며, 성서에서 가르치는 대로 완전한 것은 무상해 이 세상에 오래 머물지 않는다. 노먼의 동생은 제물낚시 솜씨가 예술적으로 완성된 아름다움의 극치에 도달했다고 생각하던 어느 날, 도박 문제에 휘말려 폭력적으로 살해된다.

마지막에 아내까지 죽고 홀로 노년이 된 노먼은 석양이 비친 채 도도히 흐르는 강물에 플라이를 던진다. 깊이 들여다보면 성서의 이미지가 암시되고 있을 수도 있다. 강은 태고의 시작인 에덴동산에서도 흐르고(「창세기」2장 10절) 다가올 종말의 도시 예루살렘에서도 흐른다(「시편」46장 4절). 즉 강은 세상의 시작과 끝에서 완전성의 상징이다. 그런 완전성에 안기는 것이 자연 안에서 제물낚시를 하는 것이며, 타락한 인간이 신의 질서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 영화에는 공교롭게도 미국적 정신의 소재所在가 그대로 드러난다. 그 모습에는 종교적인 감성이 깊이 각인되어 있다. 낚시하는 동안 사람은 자연 안에 오로지 홀로 존재하며 세상사도 걱정 따위도 없다. 산과 강, 물고기와 자신, 이것들이 오롯이 존재를 드러내며 자연 속에서 대등한 파트너가 된다. 마치 예배 중에 홀로 신과 마주하는 경험과 같다. 정적 속에서 바라보는 대상은 사람이 아니라 신이며, 기도 역시 홀로 신 앞에 서서 내면의 단독자로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는 시간이다.

영화의 영상은 언어로 다 표현하지 못하는 것을 이야기하는 수단이다. 그러므로 이 말을 들으려 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영상이 그저 지루한 산과 강의 풍경으로밖에 비치지 않는다. 동부의 대형 출판사, 즉 인텔리를 대상으로 한 지적 생산물을 만드는 출판업자에게는 이 내용이 질리도록 ‘나무만’ 나오는 단조로운 소설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지만 ‘들을 귀를 가진 사람’에게 영상이 담아내는 몬태나의 웅대한 산과 강은 직감을 한층 예민하게 연마하도록 해주고, 온 땅에 울려 퍼지는 침묵의 소리를 듣게 해주는 더없이 좋은 도구가 된다.

노먼은 가장 사랑했던 사람, 즉 동생이나 아내를 이해하는 것은 결국 불가능했다. 그렇지만 머리로 이해하지 못한다 해도 마음으로 사랑할 수는 있다. 세상에 남겨진 자신은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그들의 기억과 더불어 살면서, 그들이 지금 이곳에 함께하는 것 같은 생생한 존재의 힘을 체험한다. 그것이 신앙이고, 그의 존재 이유이며, 변함없는 사랑이다.


이러한 자연에 대한 몰입과 종교적 감성의 융합은 엄밀히 말해 성서적인 세계 이해를 그대로 모방하고 있지는 않다. 이처럼 독자적으로 발전한 미국의 풍부한 종교성은 오히려 동양의 애니미즘 같은 자연관과 통하는 특징들도 있다. 자연과의 연속성을 중시하는 종교적 감성은 유럽에도 있지만 그 배경이 되는 상황이며 사상은 양쪽에 차이가 있다. 미국에서 이런 성향이 명확히 드러난 것은 19세기로, 근원을 찾자면 앞에 나온 조너선 에드워즈의 미묘하고도 심오한 세계관에 도달한다. 그리고 그가 태어나고 정확히 100년 후 태어난 랠프 월도 에머슨Ralph Waldo Emerson이 말하는 기질, 자연법, 도덕법, 선의의 우주, 상징, 비교, 대응 등의 개념에는 모두 에드워즈의 사상이 각인되어 있다.

에머슨이 보는 자연 세계는 바로 <흐르는 강물처럼>의 노먼의 세계다. 우주의 삼라만상은 서로 반응하며 호응한다. 이 우주에는 말로 표현되지 않는 언어가 도처에 넘치도록 가득하다. 그것을 서양에서는 ‘로고스’라 부르고 동양에서는 ‘다르마’라 부른다. 둘 다 우주를 관통하는 이성을 표현하는 동시에 조화, 생명, 정의, 왕도 등을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이런 말없이 부지런히 오가는 서로 간의 부름이 발현되는 장이 바로 인간의 ‘영혼’ 이다. 영혼은 자연과 신, 우주와 정신의 연결점이다. 그리스 시대부터 내려오는 “너 자신을 알라”라는 말은 에머슨에게 와서 “신과의 신비한 일체성을 알라”로 바뀐다. 자신을 아는 것이 신을 아는 것으로 연결되는 이유는 이를 통해 양자가 하나가 되기 때문이다. 사람은 자기 영혼을 아는 동시에 그것과 하나가 되어 있는 신을 느끼고 깨닫는다. 그것을 에머슨은 ‘내면의 신God-within’이라고 부른다.

철학사에서는 이런 주장을 통상 ‘초월주의Trenscendentalism’ 혹은 ‘초절주의’라 부르지만 이런 명칭에 집착하면 에머슨 사상의 중요한 요점을 놓칠 수 있다. 칸트Immanuel Kant의 초월철학이라는 틀은 사실 이와 거의 무관하다. 간단히 말해 에머슨의 신은 기독교적인 세계관에 가깝지만 성서에서 말하는 인격신人格神은 아니다. 오히려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이 말하는 ‘우주 만물에 내재하는 정신이며 대령大靈’이다. 인간의 영혼은 자연의 일부가 되어 그 ‘정신’에 참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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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머슨은 ‘이성’이라는 말을 많이 사용하지만 이것도 엄격한 학문적 의미와는 무관하다. 그에게 이성이란 시와 꿈과 예술을 본령으로 도덕과 종교의 진리를 직관하는 능력이다. 실험이나 증명 같은 과학적인 방법은 이성에 유해할 뿐이다. 인간은 경험과학이나 역사적 전통에 의거하지 않고 자기 자신의 직관에만 의거해 신과 자연을 응시하고, 우주와의 원초적인 연결성을 깨닫는 존재다. 그에게 도시 문명으로의 이행에 따른 자연과의 연속성 상실은 지성의 부패를 의미한다. 그는 하버드 대학교처럼 지식인이 모이는 도시를 혐오했다. 반대로 전원과 자연은 유연하고 향긋한 이성이 살아 숨 쉬는 장소였다. 도시에서는 자신의 책략과 지혜가 세상살이를 좌우하기에 자신을 대단하게 생각하지만, 자연의 숭고한 아름다움을 보는 자는 그것을 만들어낸 위대한 힘의 존재를 인정하고 그것에 감복하는 겸허한 마음을 가진다.

정신의 겸손과 평화는 자연의 아름다움 안에서 신성神性을 감득하고, 창조자를 통해 마음의 눈을 뜸으로써 얻을 수 있다. 이 때문에 에머슨은 ‘서책’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것을 경계한다. 서책은 읽을거리로는 물론 가치가 있지만 어디까지나 과거의 생각이고 예전 사람들에게 맞는 진리에 불과하다. 진정한 학자는 타인의 권위나 사회의 예법, 세간의 평판 등에 의존해서는 안 된다. 여기서 에머슨 특유의 반지성주의가 분명하게 드러난다.


에머슨에 따르면 유럽은 미국이 도망쳐나온 ‘구세계’이며, 불순물이 침전한 퇴적물이고, 과거의 죽은 전통이다. 그런데도 미국은 언제까지나 과거를 회고하고 선조의 묘비를 세우고 그들의 이야기를 글로 쓰고 있다. 이런 유럽에 대한 지적 예속을 떨쳐버리고 자기 자신의 눈으로 세계를 보아야 한다는 게 그의 주장이었다. “일찍이 유럽 사람들은 신과 자연을 자신들의 눈으로 직접 보았다. ‘신세계’에 사는 우리도 마찬가지로 우주를 직관하자. 과거의 말라비틀어진 전통에 얽매일 필요 없이 구폐舊弊를 타파하고 자연의 생명이 말을 걸어오는 계시를 손수 받아들이고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빛 아래서 시와 철학을 마음껏 창조하자” 이게 그가 주장하는 바였다. 그에 따르면 ‘국민’이란 “각자가 모든 사람에게 영감을 주는 신령에 의해 자신도 영감을 받는다고 믿을 때 비로소 존재할” 수 있다.

흥미롭게도 에머슨이 사용하는 ‘이성’이라는 단어는 ‘신앙’이라는 단어로 치환해도 완전히 의미가 통한다. 에머슨 사상의 기저에는 종교개혁의 좌파라고 불린 종파주의자와 공통되는 철저한 평등주의가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유럽의 지적 권위에 어떤 권위도 못 느끼듯 교회의 존통도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이에 맞먹는 개인의 생동하는 이성과 신앙, 여기서 에머슨 사상의 저류를 흐르는 반지성주의라는 물줄기가 지표로 용솟음쳐 나온다.

지성이든 신앙이든 예전부터 내려오는 권위와 결부되는 형태는 모두 비판하고 타파해야 한다. 그래야만 새로운 시대에 걸맞은 지성과 신앙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비판과 타파의 대상은 유럽이기도 하고, 기성 교회이기도 하고, 대학교나 신학부, 정부이기도 하다. 반지성주의의 본질은 이런 종교적 사명이 뒷받침하는 ‘반권위주의’다.


에머슨처럼 하버드를 졸업한 작가 헨리 데이비드 소로Henry David Thoreau도 그의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 속박되지 않고 자유롭게 살아야 한다는 정신으로 물질문명을 비판하면서 보스턴 근교 월든 숲으로 들어가 이를 직접 실천한 인물로 유명하다. 그의 저서 『월든』에서 볼 수 있듯 ‘초절주의자’에 속하는 소로도 숲에는 신적인 무언가가 거하고 있다고 생각해, 그곳에 살면 인간이 원죄를 짓고 타락하기 이전의 자연, 즉 낙원에 사는 순수하고 무구한 아담처럼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소로는 정의롭지 못한 미합중국의 제도와 정책에 반대하고, 특히 노예제도와 멕시코 전쟁에 반대하는 의미로 납세를 거부해 투옥되기도 했다. 소로의 이런 ‘시민불복종’은 간디Mahatma Gandhi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에머슨의 표현을 빌리자면 소로는 설교단이 없는 설교자였다. 또한 그는 학자이면서도 학문을 규탄한다. 엄숙한 양심을 강조하는 한편, 무사태평한 무정부 상태를 권장한다. 비유하자면 그는 “하버드 대학교를 졸업한 허클베리 핀” 같은 존재다. 모순도 많고 그만큼 해학적인 구석도 있는 인물이지만, 본서의 주제인 반지성주의에서는 이런 모든 측면이 중요하고 의미를 가진다. 앞뒤가 맞지 않는 것 같지만, 생각해보면 그가 하버드 대학교를 졸업한 인텔리이기 때문에 기존 인텔리 집단을 비판할 능력도 있었을 것이다. 이런 모순은 현대의 미국 반지성주의자에게서도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8)


19세기의 미국 국토 확장을 배경으로 제2차 신앙부흥운동이 발흥한다. 주 청중은 서부 개척지의 거친 이주자들로 고상한 체하는 기존 기독교도와는 완전히 다른 무리였다. 이 시대 감리교와 침례교가 미국에서 크게 성장한다. 감리교는 ‘감독제’와 ‘순회목사제’라는 기동성 있는 제도가 그 원동력이 되었다. 청교도는 목사를 파견하고 전근시키는 감독제의 상하관계를 가톨릭적이라며 싫어했지만 감리교 교회는 몇 년마다 새로운 목사를 볼 수 있었다. 순회목사제는 지금까지의 신앙부흥운동의 주역인 ‘자칭’ 순회설교자를 정식으로 인정해 채용하는 제도로, 말을 타고 각지를 돌아다니는 목사로 임명해 넓은 지역을 담당하게 했다. 감리교 설교사들은 스스로를 ‘호사스러운 예배당에서 성냥을 켜는 교양 있는 목사’ 보다 ‘배운 것도 없지만 세상에 신앙의 불을 지피는 사람’ 이라 자부했다.

감리교 집회에서 서민적이고 이해하기 쉽게 이야기하지 않으면 금세 청중의 야유가 날아들었다. 설교는 학교에서 공부한다고 잘하는 것이 아니다. 신학을 공부하면 목사가 된다는 발상은 목사를 의사나 변호사 같은 세속적인 직업과 같은 선상에 놓고 생각하는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예수가 무식한 어부 베드로를 교회의 초석으로 삼았듯 신은 배운 것 없고 소박한 자연인을 도구로 사용한다.’ 반지성주의의 기개란 이런 것이다.

앞서 말한 <흐르는 강물처럼>에서 주인공 노먼이 장로교 목사인 아버지에게 “감리교가 뭐예요?” 묻자 “글을 아는 침례교도Baptists who can read”란 대답이 돌아온다. 실제로 감리교 전도사들은 찬송을 많이 애용했다. 신앙의 언어가 보기 좋게 담긴 가사를 적어 놓으면 가는 곳마다 가락이 달랐지만 신을 찬미하는 훌륭한 찬송가가 되었다. 종교개혁 당시 루터도 당시의 유행가며 연가의 선율을 자유롭게 들여와 찬송가로 만들었다. 종교곡과 세속곡의 경계는 전문가에게도 구분이 어렵다고 하지만 당시 전도자들 중 그런 걸 신경 쓰는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말만으로는 전달하기 힘든 내용을 풍부한 서정성을 통해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음악의 특정을 전도자들은 효과적으로 활용했다.

‘읽을 줄조차 모르는’ 침례교도도 이 시기에 급성장했다. 침례교 교회에는 감리교 같은 중앙집권적인 전국 조직도, 감독도, 임명받아야 하는 순회목사도 없었다. 서부에서 침례교 성장에 공헌한 이는 평범한 개척자 농민으로, 직접 노동을 하며 생활하던 도중 어느 날 신의 ‘부름’을 받아 무리에게 설교를 시작했다. 초기 침례교는 목사가 교회에 고용되어 급료를 받는 것이 뭔가 이상하다는 주장을 했기 때문에 신도이며 전도하는 사람은 개척지에 최적이었다. 대신 그들은 설교 훈련도 안 받고 준비를 한 적도 없고 책을 읽을 여유도 없이 무리에서 인정받아 목사가 된 거라 바로 옆 동네만 가도 통용되지 않았다. 목사 선임, 교회 운영 전반을 개별 교회 신도에게 전적으로 위임하는 이런 방식을 ‘개별교회주의’라 하며, 같은 침례교도라도 중앙의 권위든 교회든 정부든 인정할 이유가 없는 종파의 유전자가 고스란히 살아 숨 쉬고 있었다.

스스로 성서를 읽고 해석하고 신앙의 확신을 얻는 것은 신으로부터 직접 주어졌기에 교회 본부나 직업 목사의 권위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다. 좋게 보면 개개인의 자존감을 높이고 민주주의 정신의 토대를 형성한다는 의미가 있지만 나쁘게 보자면 대단히 독선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세계관에 틀어박힌 사람이 나오기 쉽다. 미국의 반지성주의는 어느 쪽으로든 발전할 수 있는 맹아를 가지고 있었다. 그래도 신앙부흥운동은 교파를 초월해 미국 기독교 전체에 ‘복음주의’ 가 자리 잡게 했으며, 소박한 성서주의와 낙관적인 공동체 사고, 그리고 보수적인 도덕관을 지닌 이들은 교파 간의 장벽을 초월해 일상적인 가치관을 공유하고 정치나 투표에서도 비슷한 움직임을 보이는 경우가 많다.


반지성주의라는 표현은 1952년 대통령 선거를 배경으로 생겨났다. 공화당의 후보는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영웅 드와이트 아이젠하워Dwight Eisenhower로 명성 덕에 대통령 후보가 되었지만, 지적으로는 프린스턴을 나온 우수한 인재인 민주당의 후보 아들라이 스티븐슨Adlai Stevenson에게 상대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대중의 선택은 역사가 말해 주듯 아이젠하워였다. ‘지성에 대한 속물근성의 승리’로 일컬어지는 반지성주의의 고조를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조지 W.부시가 연임에 성공한 것도 매번 지적 능력이 두드러지는 상대 후보에 비해 소탈해 보였기에 가능했다.

이런 경향이 처음 나타난 것은 1828년 대통령 선거의 ‘글쓰기 잘하는 애덤스Adams who can write’와 ‘싸움 잘하는 잭슨Jackson who can fight’의 정면 승부였다. 잭슨Andrew Jackson은 열세 살부터 형과 함께 독립전쟁에 참여한 군인이며 뉴올리언스 전투의 영웅이었다. 1824년 대선에서 애덤스를 포함하여 4파전을 치렀으나 선거인투표에서 아무도 과반수가 안 나와 하원으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클레이가 애덤스를 지지하며 승패가 갈렸다. 그러나 일반투표에서는 잭슨이 최다 득표자였다. 어릴 때부터 전장을 전전하다 고향에 돌아와 변호사 활동을 하다 테네시의 주 승격에 따라 연방의원, 상원의원, 주 재판소 판사가 된 잭슨에 비해 애덤스는 아버지가 제2대 대통령이었고 유럽 유학과 하버드 교수 재직 경력도 있는 인텔리였다. 정치 경력 면에서도 오리건 공동통치권 획득, 플로리다 할양 등 실력이 입증된 대통령이었다.

건국기 미국은 귀족 지식인이 국가 지도자가 되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였고, 지성이 권력을 가지는 것은 누구에게나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생각되었다. 초대 대통령 워싱턴의 오른팔 해밀턴Alexander Hamilton에 따르면 국가의 안정과 발전은 국가의 이해가 사회 상층에 있는 사람들의 이익과 일치할 때만 가능하다. 소수의 출신 좋고 부유한 사람이 나머지 일반 대중을 지배하는 정치, 즉 민주정치가 아니라 귀족정치야말로 미국에 적합하다는 신념이었다.

애덤스의 재선 실패의 단초는 인텔리의 발상으로 국립대학이며 천문대를 만들어 미국의 학예를 발전시키려는 시도를 연방정부가 부과하는 관세로 조달하려다가 엄청난 반대에 부딪힌 것이었다. 애덤스의 주장은 세계의 지적 선진국들을 보아온 경험에 따른 것이었지만 듣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매우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다. 연방정부의 예산계획 및 중앙집권화와 연결되며 이 일이 ‘지성과 권력의 결합’으로 비쳐 반지성주의가 발동하는 최대 요인이 되기에 이르며 결국 재선에 실패한다.

잭슨의 승리에 따라 미국 정치 지도자의 무대는 보수적인 부유층이 지배하는 귀족주의에서 잭슨식 민주주의로 서서히 이동한다. 대통령직에 있으면서도 잭슨은 자신이 인민과 가까운 존재라는 점을 가능한 한 부각했다. 그는 보통 사람들이 정치에 참여하고 선거를 통해 자신의 의사를 정부에 전달함으로써 민주주의가 발전하는 모습을 국민에게 생생히 보여주었다. 또한 특권계급의 기득권에 강한 반감을 표시하여 평등과 자유경쟁의 근본 원리로 이를 타파하려 했다. 권력의 자기증식을 막는 것이 반지성주의의 사명으로, 이런 점에서 반지성주의는 사회의 건전함을 보여주는 중요한 척도가 된다.

호프스태터는 잭슨 대통령의 시대를 ‘신사의 쇠락’ 이라는 말로 특정지었다. 이전까지는 애덤스 가문으로 대표되는 고상하고 교양 있는 귀족 출신들이 정치를 움직였는데, 이제는 대중민주주의에 밀린 신사가 필요 없게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어쩌면 필요없게 되었다기보다는 불리해졌다고 말해야 할지도 모른다. 상류 계급 출신이나 지식인이라는 특징이 오히려 마이너스 요소가 된 것이다.


대중은 새로운 유형의 영웅을 원하는 기대감과 지적 권위에 대한 내밀한 반감을 늘 지니고 있다. 반지성주의는 대중의 이런 잠재적인 감정에서 양분을 얻어 성장한다. 미국 소설가 마크 트웨인에 따르면 영국인은 코믹comic을 좋아하고, 프랑스인은 위트wit를 좋아하는 반면, 미국인이 바라는 것은 유머humor라고 한다. 코믹과 위트는 그 내용 자체가 웃음을 유발하기 때문에 누가 이야기해도 재미있지만, 유머는 이야기의 줄거리보다는 소위 ‘말재주’를 즐기는 것이므로 이야기를 재미있게 잘하느냐 못하느냐에 따라 크게 차이가 난다.

앞의 1952년 대선으로 돌아가서, 아이젠하워와 대결했던 스티븐슨은 유머가 아니라 위트 쪽에 속하는 인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유머에는 토속성이 있고 단순해서 쉽게 익숙해진다. 이에 비해 위트는 지적으로 날이 서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다보니 때로 사람의 마음에 상처를 내기도 한다. 지적으로 세련된 만큼 귀족 취향으로 들릴 수도 있다. 그리고 여기서 사기꾼con man 전통으로 이어지는데, 아무리 나쁜 계략을 꾸미는 악한이라도, 혹은 온통 거짓으로 도배하는 사기꾼이라도, ‘권력자를 거꾸러뜨리는’ 멋진 모습을 보이면 갈채를 받는다. 어디까지나 대중의 감성에 충실하게 행동했기 때문이다.


(9)


반지성주의는 단순히 지성에 대한 경멸과 동의어가 아니다. 그것은 지성이 권위와 유착되는 것에 대한 반발이고, 무엇이든 스스로 다시 판단할 것을 요구하는 태도다. 그러려면 자신의 지성을 연마하고, 논리며 구조를 끌어내는 힘을 기르고, 무엇보다 정신의 담력을 충분히 단련하지 않으면 안 된다. 세상에서 일반적인 ‘권위’로 통하는 무엇이 있으면 설령 혼자라도 맞서서 상대한다는 각오와 배짱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반지성주의는 종교적인 확신을 배경으로 성장할 수밖에 없다.

미국 신앙부흥운동과 반지성주의의 완성은 야구 선수 출신의 스타 설교자 빌리 선데이에서 결실을 맺는다. 그는 자신을 ‘2센트짜리 타블로이드 신문’, 하버드, 예일, 프린스턴의 지고한 지성을 ‘5달러짜리 백과사전’ 으로 비유하며 “그러나 대중은 타블로이드 신문을 산다.” 고 자신감을 내비쳤다.

프랑스 정치철학자 토크빌Alexis Charles Henri Clérel, viscomte de Tocqueville에 따르면 사람은 누구나 스스로를 완성에 가깝게 무한히 성장시킬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믿음은 귀족주의 인간관에서는 나올 수 없다. 각각의 사람에게는 신분과 직업, 출신에 따라 지켜야 하는 ‘분수’가 있고, 그것을 초월해 능력을 꽃피운다든가 하는 것은 부적절하며, 그런 것을 바라서도 안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미국에는 그런 선천적인 계급 구별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선데이처럼 가난한 무명의 고아원 출신이라도 미국 전역에 이름을 떨치는 슈퍼스타로 출세할 수 있는 것이다.

사회에 나와 실제 비즈니스에서 성공하는 데는 높은 수준의 지성이 필요하지 않다. 정규 학교교육이나 세련된 교양교육 등이 도움은커녕 오히려 장애가 될 때도 있다. 카네기 역시 교양이며 지성을 경멸하는 말을 공공연히 하고 다녔다. 그가 보기에 대학에서는 그리스어며 라틴어 같은 “인디언 말처럼 도움이 안 되는” 언어를 배우기도 하고,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같은 야만인끼리의 시답잖은 싸움에 대한 상세한 내용을 배우느라 시간 낭비를 한다.

이러한 ‘자수성가 이상’의 기저에는 ‘과거 유럽의 세계’ 에 대한 미국 청교도들의 저항 정신이 한몫했다. 과거란 부패가 퇴적된 것에 다름 아니며, 신세계인 미국은 그로부터 탈피해 건설된 이상 국가이므로 구체제의 지적인 정신은 유해할 뿐이라는 사고관 말이다.

그렇지만 19세기 말에 이르러서는 이런 자수성가 이상이 서서히 시대와 맞지 않게 된다. 산업 규모가 급속히 확대되면서 도제의 수작업이며 직인의 경험지식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스탠퍼드나 밴더빌트 같은 사람은 마침 양쪽 시대를 모두 경험했기 때문에 교육 없이도 성공할 수 있었지만,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면서 교육을 받지 못한 것에 은밀한 열등감을 느끼게 되었다. 그렇다 보니 그들은 수중의 거금을 투자해 대학을 설립하는 일에 힘을 쏟았다. 카네기 역시 카네기맬런대학교의 설립자이다. 선데이 역시 그 자신이 이미 ‘기업형 전도’ 의 시범자로 남부럽지 않을 부와 권력을 가졌지만 ‘목사 임명’에 집착하는 열등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들의 이런 면모의 이면에는 초장에 말한 ‘계약’ 의 개념, 즉 세속적인 성공을 통해 자신이 옳은 길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음을 실감하고픈 욕망이 있었다. 세속적인 성공은 그 자체가 목표가 아니라 자신의 생활방식이 올바른지 여부를 가늠할 일종의 바로미터가 되었다. 선데이에게 신앙이란 도덕적으로 올바른 상태고 세속적인 성공을 가져다주는 것이었다. 세속적인 성공은 곧 신의 축복을 얻고 있다는 증표였다.

그러나 이는 달리 말하자면 ‘승인욕구’가 더할 나위 없이 강했다고 할 수 있다. 처음부터 자신을 긍정하고 처음부터 충분한 사랑을 받지 못해 다른 사람의 ‘승인’에 연연한 것. 이건 이 시대 미국의 특징이기도 했다.


(10)


지성intellect은 지능intelligence과 어떻게 다른가? 똑똑한intelligent 동물도 기계도 있지만 지성적인intellectual 동물이나 기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즉 지성은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능력이다. 지성이란 단순히 무언가를 이해하고 분석하는 능력이 아니라, 그것을 자신에게 적용하는 자기반성 작업을 포함한다는 점일 것이다. 지성은 그 능력을 행사하는 행위자, 즉 인간이라는 인격과 자아의 존재를 시사한다. 지능이 높아도 지성이 낮은 사람은 있다. 지적 능력은 높지만 그 능력이 자신이라는 존재의 존재방식에까지 적용되지 못하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범죄자에 지능범知能犯은 있어도 지성범知性犯은 없다. 인텔리의 어원 인텔리겐치아intelligentsia는 사회 개혁에 관심을 가진 좌익 지식인을 가리키는 단어로 처음 등장했다. 그러나 지식인은 자주 스스로 그런 권력이나 제도의 일부가 된다. 그러므로 지식인으로 산다는 것에는 아무래도 모종의 모순이 따르기 마련이다. 그들은 자기 자신은 계급적 엘리트이면서 민주적인 대의를 믿는다. 한편으로는 민주제 사회의 장점을 믿으면서 그것으로 인한 문화의 대중화나 비속화를 혐오한다. 자신이 대중을 교육하고 계몽하는 입장에 있는 것을 자각하면서도, 한편으로 교육과 계몽이 지나치게 진행되면 자신들과의 차이가 없어져 버리지 않을까 걱정하고 두려워한다.

지성을 이렇게 보자니 반지성도 단순히 지식 작용 일반에 대한 반감이나 멸시가 아닌 ‘지성의 자기반성이 결여되어 있다는 문제의식’이다. 지성의 부지불식간 월권행위, 부당한 권위 확장을 민감하게 확인하고 견제하자는 것이다. 지성이 본래 있을 대학이나 연구소에 집적되어 기능에 전념하면 반지성주의가 크게 대두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들이 정치 권력과 유착하거나 전문분야 이외의 영역에서 권위로 군림하며 월권행위를 하면 강한 반감을 일으킨다. 즉 반지성주의는 지성과 권력의 고정적인 유착에 대한 반감이다.


반지성주의가 성립하려면 비판 대상이 되는 질서와 어딘가 다른 곳에 자신의 토대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이때 필요한 것은 단순하게 현행 질서의 위와 아래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제3의 다른 질서로 몰아가는 힘이다. 자신이 속해 있는 동일한 가치질서의 상하를 뒤집을 뿐이라면 그것은 단순한 분노 표출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지 않고 다른 좌표축에 서서 새로운 시점을 제시해야 한다. 그 좌표축은 기존 가치질서와 교차하고 교섭하는 부분도 있지만 본래는 다른 축이어서 그것이 흔들림 없는 확신의 원천이 되는 것이다. 이처럼 기존 질서와 다른 차원의 토대를 가지고 있지 않으면 반지성주의는 성립되지 않는다.

지성과 권력의 유착은 어떤 사회에서도 답답한 폐색閉塞감을 가져온다. 이런 유착에 금을 낼 발판을 마련하려면 우선 상대에게 지지 않을 우수한 지성이 필요할 것이다. 동시에 지성과는 어딘가 다른 세계에서 자신에 대한 근본적인 확신 근거를 얻어야 한다.


2 일본의 반지성주의 분석


(1) 사이토 타마키가 말하는 양키ヤンキー의 여성성


일본어로 양키ヤンキー라는 개념이 있다. 외양과 행동거지를 정리하면 ‘교복을 늘이거나 줄여 입고, 염색 등 튀는 머리를 하고, 특유의 시쳇말을 남발하며, 부릅뜬 눈으로 여럿이서 골목을 휘젓고 다니며, 유행에 뒤처지는 것을 끔찍이도 싫어하는’ 족속들이다. 나는 이 어휘를 두고 국내 아마추어 번역자들이 으레 그러듯 ‘양아치’ 라는 한국어 개념으로 번역할까 고민하다가 음절을 그대로 옮겨 적기로 결정했다. 둘은 엄연히 다른 환경에서 다른 양식을 지니고 있는 집단 혹은 개체이기 때문이다.

사이토는 『세계가 토요일 밤의 꿈이라면~양키와 정신분석~世界が土曜の夢なら~ヤンキーと精神分析~』에서 일본 특유의 반지성주의적 행태를 양키라는 키워드로 함축한다. X JAPAN 등의 양키 문화가 일본 대중문화에 깊이 녹아든 걸 가리키며 “되도록 많은 국민을 (이 테마에)끌어들이려면 양키적 방식을 논하기를 피할 수 없는 게 사실이다”(8p)라 밝힌다.

사이토의 ‘양키’ 에 대한 정신분석은 서브컬처 계에서 그의 지명도를 높인 저서 『전투미소녀의 정신분석戦闘美少女の精神分析』에서 진행한 오타쿠 연구의 연장선상에 있다. 여기서 사이토의 지론 중 하나는 “오타쿠와 일반인 사이에 본질적인 차이는 없다” 였다. 오타쿠와 양키의 결정적 차이로 보이는 것들이 경우에 따라 말끔히 없어지는 덧없는 것일 수 있고, ‘다름’을 지나치게 입에 담다 보면 결국 자기애로 귀착할 수밖에 없다고도 그는 생각한다.

사이토는 “일단 단순히 불량 기질을 나타내는 것만으로 표현을 염두하진 않았음을 분명히 한다”. 이는 이미 불량이나 비행만의 의미를 넘어선 일본의 집단 기질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다음과 같이 양키의 주요 특징들을 정리한다.


- 배드 센스

키치Kitsch라는 미학 어휘로 대강 정리되는 특유의 괴악한 기호嗜好와 감성의 소비


캐러キャラ를 통한 커뮤니케이션

일본식 코미디의 역할극에서 유래한, 자신에게 부여된 정형화된 페르소나를 통한 관계맺기


기분파와 기합 정신

논리정연함보다 즉흥적이고 기백을 중시함


리얼리즘과 로맨티시즘의 공존

현실을 지향하면서도 낭만에 얽매이는 모순


가쿠에이角栄적 리얼리즘

정치인 다나카 가쿠에이田中角栄의 반지성주의적 행보를 모티프로 한 행동 양식


운문적 미의식과 여성성



여기서는 양키의 가장 핵심적인 특징인 여성성에 관한 장章 두 개를 통째로 번역하여 옮기기로 한다. 모리모토와 비교하면 사이토나 사토는 반지성주의의 ‘반권위’보다는 ‘반지성’에 주목하여 다소 비판적이고 회의적인 측면에 집중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 * * * *


여성성과 어머니로서의 미국


양키의 여성성


전 장에서 나는 양키 문화에 수반되는 화양절충和洋折衷(일본과 서양의 절충)의 문제를 논하며 일본문화의 특성 즉 변환자재変幻自在(자유자재로 발생, 소멸, 변화)의 표층과, 그렇기 때문에 불변하는 심층의 문제를 지적했다. 나아가 “표층과 심층이라는 파악보다 유동적인 ‘형태’ 와 고정적인 ‘구조’ 로 이해하는 것이 한층 설득력 있다고 보고, 예시를 들자면 시라스 지로白洲次郎의 ‘화혼양재和魂洋才(구미의 문물을 받아들이되 일본의 정신을 유지)’의 관점으로 파악하려고 했다.

그를 양키적이라 보는 것이 적절한지의 여부는 둘째 치고 미국과 일본을 잇는 경계선상에서 그처럼 실로 경계적인 존재가 활약할 수 있었다는 사실史實 자체가 흥미롭다. 그들과 같은, 업적(무엇을 했느냐)보다 삶의 방식(어떻게 살았느냐)이 주목받기 마련인 존재가 일본의 변모를 지탱해왔다고 한다면, 거의 같은 입장의 존재로 내가 생각하는 사카모토 료마坂本竜馬가 그렇듯 그들은 말하자면 변혁의 상징과 같은 존재로서 늘 세상이 필요로 했던 건지도 모른다.

전 장에서 나는 다음과 같이 밝혔다. “미국에 범해진다는 것은 곧 보편성에 범해지는 것을 의미한다.” 굳이 이런 강한 표현을 쓴 데는 까닭이 있다. ‘범해진다’ 는 체험이 단순한 폭력의 피해 이상으로 ‘임신’의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는 데 주목하자. 우리는 미국에 ‘범해진’ 결과로 미국적인 것에 대해 양의적 감정을 ‘태내’에 품게 되지 않았는가. 그것은 예를 들자면 코카콜라나 맥도날드라는 ‘보편성’을 사랑하며 반미를 이야기하는 태도 같은 전형적인 ‘분열’ 로 표출된다.

여기서 한층 더 ‘미국의 그림자’의 분석에 착수하기 전에 잠시만 옆길로 빠져 보기로 한다. 바로 ‘양키의 여성성’을 둘러싼 논의이다. 작가이자 지인 아카사카 마리赤坂真理에 따르면 ‘양키는 여성적’이라고 한다. 이를 듣고 의외라고 생각할지 ‘그럴 수 있다’ 고 생각할지는 의견이 갈릴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양키에 대해 폭력성이나 경파硬派(쿨해 보이려 하는 냉소적 마초주의)의 이미지를 가진 사람들은 이런 표현에 위화감을 느낄지 모른다. 내 경우 순간 허를 찔린 기분이 들면서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그의 의견에 전면적으로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의 설명에 따르면 양키들은 어쨌든 ‘관계성’을 중요히 한다. 상하관계뿐 아니라 이성과의 관계, 특히 가족을 소중히 하는 경향이 있다. 이런 관계성을 향한 배려가 그들을 여성적으로 보여준다는 이야기다.

이 지적은 실로 옳다. 그러나 물론 이것만으로는 설명이 너무 부족할 테니 내 나름대로 보충해보겠다. 어째서 관계성을 향한 배려가 그 자체로 여성적이라 불릴 수 있을까? 이는 젠더를 어떻게 파악하는가 하는 문제와 깊이 관련되어 있다. 지극히 단순하게 말하자면 나는 남성의 욕망을 ‘소유원리’, 여성의 욕망을 ‘관계원리’로 파악하고 있다(물론 예외도 있다). 이 차이는 가령 결혼에 무엇을 바라는가 하는 점을 생각해 보기만 해도 명확해진다. 일반적으로 여성은 결혼을 ‘새로운 관계의 시작’이라 생각한다. 대조적으로 남성은 결혼을 ‘성애관계 중 하나의 귀결’이라 생각한다. 물론 예외도 있지만, 나는 이러한 차이가 꽤 본질적인 것이라 생각한다. 남성은 성애관계를 ‘소유’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결혼은 보다 확실한 소유 형식과 다름없다. 말하자면 소에 인두장을 찍어 목장의 울짱 안에 가둬 두는 것과 같다. 그래서 많은 남자는 허니문 기간이 지나가 버리면 점차 부부 관계의 유지를 태만히 하게 된다. ‘낚은 물고기에 먹이는 주지 않는다.’는 것.

여기엔 사실 남성 특유의 어리광이 있다. ‘일단 소유된 여성은 소유자를 결코 배신하지 않을 것이다’라는 별 근거도 없는 어리광 말이다. 심지어 남성은 설령 결혼한 후라도 불륜관계 등으로 복수의 이성 관계를 원하는 경향이 있다. 여기서도 ‘소유물을 늘리고 싶다’ 는 욕망의 반영을 미루어볼 수 있겠다. 또 그렇기 때문에 하렘이나 일부다처제 등이야말로 ‘남자의 꿈’ 인 것이다. 한편 여성은 결혼 상대와의 관계를 소중히 기르며 보다 이상적인 파트너로 성장하길 기대한다. 그래서 관계성의 유지가 중요하다. 물론 여성 쪽이 불륜으로 치닫는 일도 있겠지만 남편에게 절망한 게 계기인 경우가 많다. 그렇지 않아도 기본적으로 여성은 일대 다의 성애관계를 그다지 강하게는 원하지 않는다. 여성은 관계성의 양보다 질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특히 육아는 부부관계의 질을 높이는 기회지만 관계 유지에 무관심한 남성은 곧잘 육아를 부인에게 떠넘기고 만다. 이러한 의식의 차이가 점점 부부간의 엇갈림의 틈새를 넓혀간다. 하긴 최근에는 ‘애 키우는 남자’가 인기라 하니 이런 상황도 조금씩 개선될지도 모른다.

지금까지의 논의에 대해서는 졸저 『관계녀 소유남関係する女 所有する男』 에 자세하게 기술했으므로 의문이나 관심이 있는 분들은 그쪽을 읽어 주시면 기쁘겠다. 양키의 관계원리에 대해서는 이걸로 대강은 이해하셨는지. 어쨌든 그들은 동료와의 유대를 소중히 한다. 또 가족을 소중히 한다. 양키의 가족주의는 그들이 사랑받는 큰 이유 중 하나다. 기무라 타쿠야에서 카메다 삼형제에 이르기까지 그들은 의외일 정도로 늘 가족주의적이다. 양친을 존경하고 파트너와의 인연을 소중히 하며 자식을 이보다 더할 수 없을 만큼 사랑스러워한다. 그들이 동료를 소중히 하는 의식조차 어딘가 가족주의의 연장으로 보이는 면모가 있다. 이런 경향을 ‘여성적’이라 부를 수 있다면, 과연, 확실히 양키는 여성적인 존재이다.


타카하시 아유무高橋歩는 누구인가


양키와 여성성과 가족주의라는 문제와 관련해 여기서 언급해두고픈 인물이 있다. 그의 이름은 타카하시 아유무이다. 세상 물정에 어두워서인지 내가 그의 이름을 알게 된 건 꽤 최근의 일이다. 삼 년 정도 전이었으니. 그에 대해 모르시는 분들도 있을 테니 여기서 간단하게 설명해 두기로 한다. 타카하시 아유무는 1972년생으로 자칭 ‘자유인’이다. 주식회사 A-Works의 CEO이며 이외에 주식회사 PLAY EARTH의 경영자이기도 하지만, 공식 사이트에 따르면 가족 넷이서 세계 일주를 끝낸 후, 현재는 하와이에 거점을 두고 있다고 한다. 20세에 영화 『칵테일カクテル』을 동경해 대학을 중퇴하고 동료와 아메리칸 바 ‘ROCKWELL’S’를 개점한다. 23세에 동료와 생츄어리 출판サンクチュアリ出版을 설립하고 25세에 자전 『매일이 모험毎日が冒険』을 출판. 26세에 결혼하고 ‘모든 지위를 리셋하고’ 아내와 둘이서 ‘세계 대모험’ 여행에 나선다. 2000년대 이후에는 오키나와에 이주하여 동료와 ‘비치 록 하우스ビーチロックハウス’를 개점. 이어서 해당 점포를 아지트 삼아 ‘산다는 것의 멋짐을 온 세계에 발신하는’ 프로로젝트 ‘섬 프로젝트島プロジェクト’를 개시한다. 그의 자유로운 삶의 방식은 많은 젊은이들의 공감을 사, 지금에 이르러서는 20대 젊은이들에게 타카하시는 카리스마적 존재이기까지 하다.

안타깝게도 긍정적인 설명은 여기까지다. 여러 보도에 따르면 요미탄촌読谷村에서 경영되던 비치 록 하우스는 소음이나 쓰레기 문제 등으로 주민들과의 사이에서 논란을 일으켜 2005년에 폐점했다. 2001년에 개시한 ‘무인도에서의 파라다이스 건설을 목표로 한’ 섬 프로젝트는 미야코지마시 이케마지마宮古島市池間島의 등교 거부자나 히키코모리(은둔형 외톨이) 청소년을 위한 프리 스쿨(이케마지마 자연학교) 건설계획으로 구체화되었지만 지역 주민들의 반대 운동으로 2003년에 부득이하게 철거되었다고 한다.

방금 전에 말한 것처럼 타카하시는 자아 탐색형自分探し系(*1) 젊은이들의 카리스마이며 그런 젊은이들에게는 대표작 『매일이 모험』은 바이블이라고 한다. 단 오키나와에서 일어났다는 여러 논란도 있어 그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의견만 있지는 않다. 또 류큐신보琉球新報에 게재된 이케마지마 자연학교의 기사(2003년 10월 5일자)가 사실이라면 비판당해도 어쩔 수 없는 일면이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적어도 이 프로젝트에 ‘등교 거부나 은둔형 외톨이’ 지원이 포함된 게 그의 진심에서 나왔다면 이것은 전문가로서 도저히 간과할 수 없다. 이 기사에도 ‘카페나 숙박시설의 설치는 자연학교의 당초 목적과는 거리가 멀고, 섬을 부흥시키는 아니라 도민생활을 무너뜨리는 것’ 이란 비판이 게재되어 있다. 과연 ‘등교 거부나 은둔형 외톨이’의 전문가가 프로젝트에 참가하고 있었을까? 경우에 따라 제로베이스에서 시작하겠다는 생각은 없었을까? 섬 프로젝트를 추진하기 위한 립 서비스 차원의 좋은 구실로 ‘등교 거부나 은둔형 외톨이’를 내세운 건 아닐까?

참고로 타카하시에 관한 기사 어디에도 ‘양키’란 글자는 찾을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명한 듯 그를 양키 취급하는 건 옳은 것일까? 그러나 이에 대해선 그가 직접 이런 증언도 했다. “중학생이 되고 저는 양키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분노를 사긴 했지만, 어딜 같이 놀러간다든지 하는 일도 없어졌습니다. 그렇지만 양키로 살며 집에서는 진연 세미나進研ゼミ(*2)를 들었고, 매일 저녁 7시엔 가족이 식탁에 둘러앉는 타카하시 가의 규칙만은 지켰습니다.” (ACROSS「高橋歩/TAKAHASHI AYUMU インタビュー」 http://www.web-across.com/person/d6eo3n0000003xto.html)

가족을 생각하는 양키라니 웃기지도 않다고 생각했는가? 그러나 내가 보기엔 양키만큼 가족을 생각하는 젊은이도 드물다. 그런 의미에서 타카하시는 넓은 의미에서 본서의 대상인 양키에 거의 해당한다고 말할 수도 있다.


행동주의와 가족주의


여기서 타카하시의 에피소드를 소개한 것은 꼭 비판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다. 최근 출판된 그의 어록 『꿈은 도망치지 않는다. 도망치는 건 언제나 자신이다.夢は逃げない。逃げるのはいつも自分だ。』(サンクチュアリ出版)을 읽으면 그의 인생관을 잘 알 수 있다. 여기에는 내가 이전부터 주목하고 있는 ‘양키적 리얼리즘’이 응축되어 있는 듯 보이기에 몇 개인가 인용해 보겠다. 본서의 내용은 크게 나누어 두 개의 가치관으로부터 성립한다. 하나는 ‘행동주의’다. 가령 이런 식이다. “중요한 건 용기가 아니라 각오다. 마음을 정했으면 모든 게 움직이기 시작한다.” “진심이 이긴다. 뜨거움으로 이긴다. 바이브로 이긴다!” “거창한 것 따위 말하지 않고 자기 분수에 맞게 조용히 살아가느니 거창한 것을 말하고서 ‘이야, 입 밖에 내 버렸다. 이제 돌이킬 수 없다구.’ 라 하며 혼자서 노력하는 쪽을 나는 아름답다고 생각하며, 예술アートart을 느낀다.” “Believe your 닭살. 닭살이 돋을 정도의 감동 같은 건 흔하게 겪는 게 아니다. (중략) 훌륭한 사람의 말 따위보다 자신의 마음 깊숙한 곳을 흔든 말이 훨씬 진실하고 거짓이 없지. 그래서 커다란 선택을 채근 받을 때 나는 나의 닭살을 믿는다.” “일본의 정치가들에게 불만이야? 자,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정치가가 되자.”

일관되게 반복되는 건 어쨌든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뜨거움과 기합으로 할 수 있는 데까지 해 보라는 행동주의다. 앞 장에서 거론한 ‘기분파’를 최우선의 가치관으로 하는 갸루ギャル(*3)들의 문화를 상기해도 좋다. 반면 전체 상황을 냉정히 판단하여 치밀한 예측과 계산에 기반을 두고 행동한다든지 하는 자세는 일관되게 경멸당한다. 그의 말을 빌리자면 판단보다도 결단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반지성적이라고까지 말하면 과한 표현일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이러한 ‘감성에 기인한 투기적 행동주의’야말로 그의 미학이며 그것에는 분명히 ‘양키적 리얼리즘’이 각인되어 있다. 그러나 나에겐 그의 인생철학에 그의 진짜 인생이 생생하게 반영되어 있다고 소박하게 믿을 생각은 들지 않는다. 그에게 한정된 건 아니지만 성공한 사람의 철학이란 대부분은 필히, 성공한 뒤에 원래 생각에 덧붙여져 나온다. 그래서 일반인에게는 의외로 응용이 안 먹히는 것이다.

타카하시 역시 늘 ‘뜨거움’이나 ‘닭살’만 가지고 행동해 왔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집착하는 것 같지만 ‘섬 프로젝트’의 목적에 (그의 저작을 읽은 이상)그의 인생에도 흥미에도 무관계하다고밖에 생각이 안 드는 ‘등교 거부’나 ‘은둔형 외톨이’의 지원을 거론한 사실 때문이다. 거기엔 당시 우연히 매스컴에 오르내린 ‘은둔형 외톨이’ 붐에 편승하려는 냉철한 계산이 눈에 비치지 않는가. 이것이야말로 그가 꺼리고 싫어하는 마케팅적 발상의 전형이 아니었나. 무엇보다도 그래서 여지없이 철수하게 되었다면 ‘마케팅으론 잘 풀리지 않는다.’ 는 그의 인생철학이 옳았던 것이 되겠지만 말이다.

그러나 타카하시 자신에게는 이러한 모순은 모순으로서 의식되지 않는 듯 보인다. 오히려 그러한 판단도 포함하여 ‘자신의 인생은 늘 그때그때 상황에 따른 내기’이며 ‘그때마다 간신히 이겨내 왔다’는 것이 허울 없는 그의 자기 이미지이며 그 자신의 이야기일 것이다.

그것이 그의 미학이라면 굳이 이러쿵저러쿵 말하는 건 괜한 참견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성공한 양키의 인생교훈이 대개 비슷비슷하기 마련이라는 사실은 이런 미학적 판단에 기인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을까.

‘감성적 행동주의’에 이어서 오히려 그 이상으로 중요한 것이 그들의 ‘가족주의’이다. 다시 그의 어록을 인용해 본다. ‘나는 지단을 정말로 리스펙트하고 있다. 세계에서 가장 축구를 사랑하던 남자가 월드컵 결승전이라는 무대에서 누이의 험담을 듣고 박치기를 했다고. 주장으로서 조국을 짊어지고 출장하고 있는 녀석이 말이야. 조금 짜릿하다든지 할 정도가 아니야. 최고로 뜨겁고 멋진 일이야.’ ‘가령 아무리 세상을 위한다는 사람이라도 가족을 희생하여 주변 환경을 위한 일이니 세계 평화를 위한 일이니 동분서주한다면 전혀 감동이 안 된다. 가족은 말하자면 사람의 원류다. 원류가 더러워진 하천에서 깨끗한 물은 흐르지 않지. (중략) 세계는 가족들이 모여 이루고 있다. 가족이 제대로 되지 않으면 자기 발밑이 무너져 있는 것이기에 아무것도 쌓아올릴 수 없다. 세계 평화니 말하며 자기 가족이 붕괴하고 있으면 의미 불명이지. 자기 가족도 지키지 못하는 녀석한텐 일본이고 세계고 평화고 없다.’ ‘동료도 중요. 일도 중요. 가족도 중요. 하지만 삼자택일을 하라면 모두 날려버리고 가족을 고른다.’

본래라면 종종 모순을 야기할 터인 행동주의와 가족주의도 그의 안에서는 일체화되어 있다. 가족이 한 덩어리가 되어 꿈을 실현하는 이야기가 세간에 호평을 받는 사례는 이전에도 언급한 카메다 삼형제 등이 있다. 타카하시 아유무가 카리스마적 존재로 여겨지는 근거 중 하나가 그를 지탱하는 가족에 있다는 데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대체 무슨 말일까.

공동체의 카리스마가 만약 독자적인 남성이었다면 하렘화가 이루어질 것이란 예상을 쉽게 할 수 있다. 그렇기에 카리스마의 가족주의란 일종의 금욕적인 자세로서 고평가된다. 그의 가족주의가 진짜인지 거짓인지는 아무래도 상관없다. 다만 타카하시가 젊은이들의 카리스마적 존재가 되기 위해선 그 가족애가 ‘연출상으로도’ 필요했다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여기서 생각해보고 싶은 건 ‘자기 탐색’ 유형의 카리스마인 타카하시의 존재가 과연 부성적이냐 모성적이냐 하는 문제이다. 이 물음에 관해선 이미 대답이 나와 있다고 보아도 좋다. 자신의 감성을 믿고 행동하는 것, 가족의 유대를 소중히 하는 것, 그것이 이러한 카리스마의 규범이라면 어떤 부성적 원리와도 닮아 있지 않다.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부정 = 거세되고 준거되어야 할 룰과 규범을 우리에게 강요하는 존재야말로 부성이라면 타카하시의 모습은 그 대척점이기까지 하다. 애초에 어록에도 이리 쓰여 있다. ‘거세되지 마라. 바라는 것을 잊지 마라.’ 라고. 그렇다, 타카하시의 카리스마성이란 철저히 모성적인 것이다.

여기서 겸사겸사 가볍게 언급해두고 싶은 점이 하나 있다. 타카하시의 미의식에 관해서이다. 그가 처음에 동료와 연 아메리칸 바의 이름을 기억하시는가. ‘ROCKWELL’S‘다. 점내에는 미국의 대중화가 노먼 록웰의 그림이 걸려 있었다고 한다. 아마 이곳에 타카하시가 동경하는 ’미국‘이 있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다시 그의 『꿈은 도망가지 않아~’』의 책장을 열어 본다. 책 여기저기 록 스타나 파일럿 등을 분한 백인 아이들의 사진이 배치되어 있다. 사진가의 약력이 보이지 않지만, 어차피 이 사진들은 직접적으로 록웰 풍의 모티프를 연상시키지 않을 순 없을 것이다. 그렇다. 미국적인 순수함innocence. 무구하고 순진한 미국. 그것은 이 모성적 카리스마의 출발점이며 여전히 그 동경의 대상이라는 말이다.


무라카미 하루키와 미국의 그림자


그나저나 나는 전 장에서 양키의 ‘화양절충’에 대해 언급할 때 ‘일본의 스타일을 기본으로 하여 서양을 소화 흡수한 표현이야말로 화양절충에 다름 아니다’ 라 밝혔다. 그러나 물론 이것만으로는 충분한 표현이라고 할 수 없다. 왜냐하면 거기에 ‘무라카미 하루키’라는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 특히 초기 작품은 미국 문학의 농후한 영향이 느껴진다. 이 점에 대해 다른 의견은 없을 것이다. 그의 데뷔작 『바람의 소리를 들어라』는 가공의 작가 데렉 하트필드의 설정도 그렇고 마치 카트 보네가트 주니어(당시)의 바스디슈를 연상시켰다. 그러나 무라카미의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은 물론 일본인이다. 즉 무라카미 하루키의 초기 작품 역시 일종의 화양절충이라고 말할 만한 성질을 갖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라카미 하루키를 ‘양키적’이라 간주하기는 어렵다. 초기 작품에 한해서도 어떤 ‘양키 냄새’도 나지 않는다. 물론 소설의 스타일도 기여했을 것이다. 그의 소설은 화양절충이라 하기 보다는 미국 소설 그 자체와 너무 닮아 있다. 즉 ‘절충’이 지나치게 결여되어 있다.

혹은 무라카미의 소설에 통주저음basso continuo처럼 흐르고 있는 ‘상실’의 모티프 역시 양키적인 테마하고는 동떨어진 것이다. 양키적인 픽션이란 트라우마조차도 마지막에는 긍정적으로 묘사하는 방식이며 이는 휴대폰 소설을 읽으면 잘 알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면 새삼 다시 묻지 않을 수 없다. 양키 문화의 배경에 미국의 그림자가 져 있다 치면 그것은 어떠한 ‘그림자’인가.

카토 노리히로加藤典洋의 (문자 그대로)『アメリカの影미국의 그림자』라는 제목의 데뷔작은 문예비평에 경제적 시점을 끌어들였다는 점에서도 선구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여기서 이야기하려는 건 그 점이 아니다.

카토는 이 평론에서 비평가 에토 쥰江藤淳이 당시 문단의 평가와는 반대로 무라카미 류의 데뷔작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限りなく透明に近いブルー』를 부정하며 타나카 야스오의 데뷔작 『어쩐지 크리스탈なんとなく、クリスタル』을 칭찬한 기묘한 행동에 대해 해석하려 한다. 카토는 『한없이~』에는 ‘양키 고 홈!’ 이라는 ‘정동情動적인 내셔널리즘의 외침’ 이 들어 있어서 반미 정서를 공유하는 문단에 받아들여졌고 그래서 에토는 이를 거절했다고 파악한다. 그러나 『어쩐지~』는 어땠는가. 이쪽은 결코 ‘양키 고 홈!’ 이라 말하지 않는 기지基地 소설이며 ‘일본은 미국 없이 해나갈 수 없다’ 는 금기를 건드린 소설이었기에 문단에 거부되었다. 반대로 에토는 이 소설이 자신의 ‘친미애국親美愛國’이라는 ‘밀교적 내셔널리즘’과 일치했기에 호평한 것이다. 적어도 카토는 그렇게 해석했다.

이치카와 마코토市川真人는 최근 화제가 된 저서 『아쿠타가와상은 어째서 무라카미 하루키에게 주어지지 않았는가芥川賞はなぜ村上春樹に与えられなかったか』에서 상술한 카토의 논의에 입각하여 무라카미 하루키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상황을 정리한다.

“무라카미 류와 타나카 야스오는 각각 기지촌에서 미군 병사나 콜걸에게 둘러싸여 사는 청년과 소비사회화한 도쿄의 거리에서 브랜드 상품에 둘러싸여 사는 여대생을 묘사하여 한편으로는 ‘굴욕’으로서, 또 한편으로는 ‘의탁’으로서 자신과 미국의 관계를 작품화했습니다.”

그러나 무라카미 하루키가 의도한 건 이 중 어느 쪽과도 별개의 전략이었다. 그는 우선 일본문학을 패러디했다. 하지만 그에 삽입되는 ‘신선하고 독창적인 소재’에는 ‘미국’이 선택되었다. 그것도 전통적인 ‘미국 문학’ 이 아니라 키치kitsch함과 눈속임fake으로 대표되는 ‘팝 아트’로서의 미국이었다. 그것은 거의 ‘아메리칸 팝 아트로서의 일본’을 발견하는 일이었으며 그를 수용한 일본인으로서 미국을 ‘의태’하는 것이었다. 그는 결국 ‘무의식중에 미국적인 일본’에 대한 비평적 작업이기도 했다.

양키 문화는 소박한 메타 단계나 눈속임fake에는 상성이 좋지만 거기에 코미디를 넘어선 복잡한 비평성을 끌어들이려 하면 오히려 양키 속성에서 멀어지게 된다. 이러한 특성을 염두하면 무라카미 하루키가 얼핏 양키처럼 보이진 않는다는 사실은 당연한 건지도 모른다.

덧붙여 여기 이름이 거론된 세 작가 중 누구도 양키의 인상은 빈약하다. 그것은 그들이 현실을 꿰뚫어 보며 비평적으로 대하려 하는 문장가들이라서 그럴 것이다. 거기다가, 굳이 말하자면 거의 소설을 쓰지 않은 타나카는 둘째 치고 무라카미 류는 양키의 묘사가 상당히 능숙하다고 본다. 그의 소설 『테니스보이의 우울テニスボーイの憂鬱』은 양키 자체가 등장하지 않는 양키 소설로서 선구적인 걸작이었다.

그것은 그렇고 이치카와는 책에서 ‘아버지’의 상실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에토 쥰이나 카토 노리히로의 논의를 근거하면 ‘아버지’를 둘러싼 문제는 전후 일본의 주체 = ‘나’ 라는 의식의 근간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애시당초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가 당돌하게 써낸 『8월 15일』의 쇼와昭和천황의 옥음방송과 뒤이은 인간 선언은 곧 부성의 상실(과 그때까지 아버지로서 군림하고 있던 자가 허구였다는 고백)이며, 한편으로는 교육에 따른 계급 이동(의 꿈)이 생겨나, 이를 야기한 부끄러운 아버지와 그 아버지에게 의존하는 패러독스는 끊임없이 이어졌습니다. 그러한 상황에 대체재로서 전후의 ‘강한 아버지로서의 미국’이 등장합니다만 『한없이 투명한 블루』나 『흉내지빠귀가 있는 마을モッキングバードのいる町』을 시작으로 많은 소설이 미국을 자신에게서 떼어낸 대상으로 파악하며 ‘(미국이)없어도 해나갈 수 있다는’ 태도를 연출하여 독자들 역시 그런 식으로 수용하여 ‘한정하고 승인하는’ ‘강한 아버지’ = 미국을 (실은 내면화되어 있음에도)자신의 외부에 구축하려 들기에 이르렀습니다. (...) 늘 그 기저에는 ‘아버지’의 존재/부재의 여부가 흐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아버지’의 존재/부재 여부를 일관되게 추궁해 온 것이 당시 아쿠타가와상 수상작이었다면 일관되게 ‘아버지가 되지 않는 주인공’을 그려 온 무라카미 하루키가 아쿠타가와 상을 수상하지 못하는 건 당연하다. 그의 소설은 ‘아버지가 되기를 거부하고 어머니에게 매달리는 것도 뒤로한 채(중략) 독립된 개체이며 자유로운 존재이길 갈구한’ 소설이었다. 이치카와는 문단이 그러한 소설에 아쿠타가와 상을 ‘줄 수 없었다’ 고까지 말하고 있다.


어머니 미국


여기서 주목해야할 대목은 ‘아버지 미국’이란 개념이다. 지금까지의 논의에 입각하면 적어도 일본의 전후 문학에서 미국적 부성의 문제를 무시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일본에 드리운 ‘미국의 그림자’란 곧 부성을 둘러싼 문제일까. 그것은 문학의 바깥에서도 그렇게 기능하고 있던 것일까.

그럴 리 없다. 타카하시 아유무의 동경이 ‘노먼 록웰의 미국’을 조준하고 있었다면 그는 적어도 미국의 부성적인 부분과는 그다지 관계가 없다. 오히려 ‘순진무구한 개척자’로서의 미국이자 그러한 순수함의 그릇으로서의 미국적 모성이 그의 동경의 정체가 아니었을까. 즉 그에게 아메리칸 드림이란 어디까지나 순수한 충동에 기반한 ‘자기를 내던진 도박’을 성공시키는 것이며 그 전제로 그러한 도박을 전면적으로 수용해 주는 무구한 모성으로서의 미국이 상정되었던 게 아닐까. 이런 식으로 생각하면 나는 적어도 몇 가지 수수께끼가 풀리는 듯 하다. 어째서 초기의 불량 청소년은 리젠트 스타일이었는지, 어째서 야자와 에이키치는 미국을 목표로 했는지, 어째서 일본의 양키는 기꺼이 디즈니 캐릭터나 MIKI HOUSE를 몸에 걸치고 다녔는지, 그리고 어째서 미국에서 경제적으로 성공한 일본인의 모습이 수시로 ‘일본식으로’ 양키스럽게 보이는지 말이다.

그것은 미국이라는 모성 즉 ‘무구할 것’을 조건으로 지고한 승인을 부여하는 ‘모성의 범주topos’로서의 미국이 늘 무의식 속에 참조 규격으로 자리 잡은 게 아니면 무엇일까. 여기서 처음에 던져 둔 질문 ‘양키의 여성성’에 대한 대답의 일부 역시 얻을 수 있을 듯하다. 양키들이 스스로 ‘무구한 미국’이라는 환상을 내면화하며 동경과 더불어 미국에 대치할 때 그 관계는 한없이 엄마와 딸의 관계에 근접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지배관계이지만 아버지의 그것처럼 ‘규범에 의한 지배’가 아니다.

양키들에게는 전쟁의 기억도 점령의 굴욕도 그다지 큰 트라우마나 콤플렉스의 기원은 되지 않는다. 그들에겐 어떤 의미에서든 미국은 부성을 대체하지 않는다. 이는 그들의 가치관을 보면 쉽게 파악할 수 있다. 가령 미국주의Americanism를 자유, 평등, 개척 정신, 민주주의 등으로 내세운다면 이들이 양키들의 규범 같은 것으로 장착되었다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물며 미국주의의 배경인 청교도주의protestantism는 양키 문화에서 그 흔적조차 보이지 않는다. 이 정도로 규범에 영향을 끼치지 않았는데 부성이라고는 부를 수 없다.

오히려 그들은 소박하게 미국적인 신체(로큰롤, 리젠트, 바이크 등)에서 반항을 위한 양식을 수입한 게 아니었나. 한때 폭주족이 스무 살까지의 과도기적 생활양식으로 자각되었듯, 이런 미국적인 신체는 눈속임으로써 연기하며 ‘한때의 순수함’을 연출하게끔 무의식 중 선택된 양식이 아니었나.

즉 생활양식조차 아닌 과도기적 신체성만을 미국에서 수입해서 양키 문화가 이루어졌다고 고찰하면, 역시 미국과 양키의 관계성은 어머니와 딸의 관계성에 근접하다는 이야기가 된다. 왜냐하면 어머니와 딸의 관계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매개하는 ‘규범’ 대신 ‘관계성’으로 매개되기 때문이다(이 부분에 대한 세부적인 논의는 졸저 『엄마는 딸의 인생을 지배한다母は娘の人生を支配する』를 참고해 주시길 바란다)

이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양키와 미국의 관계는 양의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백인을 심하게 꺼리는 양키가 있는 반면 타카하시 아유무처럼 역사적 경위도 정치적 갈등도 없었던 것처럼 한결같이 아메리칸 스타일을 동경하는 양키도 있다. 이는 자신의 신체에 어머니의 신체가 이미 설치되어버린 데 따른, 딸의 어머니에 대한 양의적 감정과 닮은 게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내가 검증하고 있는 ‘양키적 리얼리즘’ 역시 이러한 ‘양키적 신체’가 흔적을 남긴 것이라는 가능성이 있다. (후략)


* * * * *


양키들은 모성으로 회귀한다


우리 안에 있는 모성원리


전 장에서 나는 은둔형 외톨이 ‘지원’활동을 칭하며 당사자에게 폭력을 휘두르기에 이른 나가타・스기우라 자매를 도마 위에 올리며 그들의 일관성이 결여된 지원 논리에 대해 검토하고 거기에 일종의 ‘모성’이 있음을 지적했다. 다시 말해 ‘폭력적 오지랖’이란 형태의 모성이라고 말이다. 다른 의견도 있겠지만 ‘은둔형 외톨이’ 그 자체는 기본적으로 무해한 존재이다. 가족이나 사회에 부담이 된다는 의견도 있겠지만 그 정도로 부담이라면 보살핌을 일절 하지 않으면 된다. 그거야말로 당장은 질병도 장애도 아닌 ‘비사회적 존재’에 대한 부성적 처우로서는 하나의 정답이다.

그러나 나를 포함해 은둔형 외톨이의 치료나 지원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말할 것이다. “내버려두면 큰일이 날 것이다” “누군가 개입하지 않으면 가족이 붕괴한다.” 같은. 심지어는 “내가 안 하면 누가 하겠어” 라고도. 적어도 내겐 그런 의식이 있고, 그런 의식의 문제성도 어지간한 사람보다는 잘 이해하고 있을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하고 나서 부성적인 대응보다 모성적인 대응이 나의 윤리적 판단에 부합하다고 ‘정한’ 것이다.

전 장에서 도마 위에 올린 긴파치 선생 시리즈金八先生シリーズ 중에서도 굴지의 명장면 ‘졸업식 전의 폭력’의 클라이맥스를 최근에 재평가해보았다. 몇 번을 봐도 이 회차의 연출은 훌륭하다고밖에 말할 수 없다. 낸시 세키ナンシー関가 적절하게 지적했듯 경찰관의 입장인 사람이 이걸 보더라도, 보는 동안에는 체포되는 카토에게 감정이입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하야미즈 켄로速水達郎는 이 장면을 두고 블로그에서 흥미로운 지적을 했다. 대사가 없이 슬로 모션의 체포 장면에 음악이 흐르는 연출은 영화 『딸기 백서いちご白書』의 마지막 (학생들이 점거한 학원에 경찰대가 돌입하는 장면)의 연출을 본보기로 했다는 게 골자이다. 확실히 하야미가 지적하는대로 ‘긴파치 선생’의 연출가는 70년대 말의 교내 폭력을 60년대 말의 학생운동에 빗댄 것처럼 보인다.

거기다가 그는 비극적인 감정을 고조시키는 나카지마 미유키中島みゆき의 악곡 ‘세정世情’과 『딸기 백서』에서 쓰인 밝은 악곡 ‘서클 게임サークル・ゲーム(조니 미첼 작곡)’을 대비시켜보인다. 같은 양상의 연출인데도 그것이 불러일으키는 효과는 극히 대조적이다. 적어도 보고 있는 동안은 누구든 체제에 반발하여 저항하지 않고 체포되어 연행되는 카토에게 감정이입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긴파치 선생’. 하지만 조니 미첼의 노래가 불러일으키는 효과는 이와는 정반대다. 『딸기 백서』의 경우 설령 학생에게 감정이입하던 관객조차도 악곡을 들으며 객관적인 입장으로 돌아와 학생운동을 흡사 청춘의 공연한 소란과 같은 입지에 두게 되어, 그런 젊은 나날과의 씁쓸한 결별에 마음이 흔들리게 된다.

감동이라는 점에선 물론 ‘긴파치 선생’ 쪽이 위다. 그러나 『딸기 백서』의 시점이 보다 열정적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후자는 주체에서 일단 정서나 관계성을 떼어내고 대신 비판적・분석적 시점을 적용하지 않을 수 없는 ‘부성’이 느껴진다. 그렇다, 잇는 모성과 절단하는 부성의 대립은 여기에도 있다.

우리들의 ‘학생운동’에 대한 인식은 당시부터 ‘살짝 부끄러운 공연한 소란’이었을 터이다. 그러나 기본적인 구도는 변하지 않을 터인 긴파치 선생의 개인 vs. 권력이라는 대립 장면에서 우리들은 역시 카토에게 감정이입하고 만다. 어쩌면 옛날이나 지금이나 학생운동을 지탱한 사고방식mentality이란 그 상당 부분이 이런 게 아니었을까. 교장을 감금하여 사죄시키는 카토의 행동은 어떤 사정이 있든 용인될 게 아니다. 그가 경찰에게 체포되고 연행되는 건 일단 당연하고 그에 대한 논의의 여지는 거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장면을 보는 순간만은 누구나 ‘그런 정론은 어찌되든 상관없다’ ‘카토를 구해라’ 는 마음이 되고 만다. 이는 실로 우리들 안에 있는 양키적 모성이 발동한 순간이 아닐까.

내가 양키의 모성을 강조하는 건 그것이 어디까지나 감정과 관계의 우위를 점하며 이러한 반지성주의의 양식을 결코 무너뜨리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적어도 양키 논리의 극단에 있는 건 틀림없는 (사상과는 관계없는)모성이다. 단 그것은 타카하시 아유무의 장에서 강조했듯 ‘미국적인 것’을 강제로 모성화하고 그와 대비되는 무구함으로서의 ‘불량성’을 매개로 하여 귀결로서 확립된 모성 원리이다. 그런 의미에서 양키≒모성화된 미국이라는 해석마저 성립할 수 있다.


아이들boys의 ‘여성성’


그런데 진작부터 양키에 지대한 관심을 표해온 작가 아카사카 마리赤坂真理는 그 ‘여성성’이나 ‘모성’에 대해서도 일찍이 지적해 왔다. 그 혜안에 경의를 표하며 그것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지 지금부터 검토해보려 한다. 애당초 양키가 여성적이라 하는 판단은 어디서부터 온 것일까. 우선 생각할 수 있는 건 그 관계원리이다. 6장에서도 말했듯 남녀의 행동원리의 표면상의 차이를 야기하는 원인으로서 여성의 관계원리와 남성의 소유원리라는 요인을 들 수 있다. 이런 식으로 실제 욕망의 벡터에 대해 남녀의 차이가 분명히 있다는 사실을 우선 인식해 두자. 덧붙여 이 원리에는 얼마든지 예외나 혼종이 있을 수 있다. 내가 지적하고 있는 것은 어디까지나 일반적 경향일 뿐이다. 이러한 사항들을 염두하고 생각하자면 표면적으로는 남성원리 그 자체로 보이는 양키 문화에도 실은 지극히 여성적인 측면이 있음을 눈치챌 수 있다.

여기서 우선 양키 문화의 ‘관계 원리’에 대해 생각해보자. 알려져 있듯 양키 사회는 수직 사회다. 선배 후배의 관계는 이후의 인생에서도 계속 따라다닌다. 이는 얼핏 보면 남자 사회의 특징으로도 보인다. 그러나 내 생각에는 관계성의 기저에 일정한 사상이라든지 규칙 같은 게 있는 집단의 존재 양식이야말로 남성적이며 부성적인 것이라 본다. 그렇기에 종교적인 숭배cult나 파시즘 혹은 공산주의에 기반한 사회의 양상이야말로 남성형 사회의 극점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이러한 집단에서는 반드시 관계보다도 원리가 우선된다.

여성형 사회란 무언지 상정해보자면 이념이나 규칙과는 다른 형태로 엮인 인간관계를 기저로 하는 것일 터이다. 거기에서는 원리보다 관계가 우선된다. 그런 의미에서 가령 지연만을 근거로 하는 촌락공동체나 혈연을 근거로 하는 친족 공동체 등의 존재 양식이 부계냐 모계냐에 상관없이 ‘여성형’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렇게 보면 양키 사회는 말할 것도 없이 후자에 포함될 터이다. 이러한 양키 집단의 존재 양식에 대한 사회학적 분석도 몇 있다. 거기서 종종 참조되는 문헌이 폴 E. 윌리스Paul E. Willis의 『해머타운 아이들Hammertown Boys』, 이하 『해머타운』이다. 양키론에서는 중요한 선행연구인 난바 코우지難波攻士의 『양키 진화론ヤンキー進化論』도 이 고전적인 명저에서 힌트를 얻어 쓰였다. 『해머타운』에서 다루는 대상은 영국의 노동자 계층의 청소년이지만 이 계층이 어째서 재생산되는지의 문제를 들여다보면 확실히 일본의 양키 문화에 응용 가능한 부분이 많다.

『해머타운』의 내용에서 중요한 부분만 간추려 이야기해보자면 다음과 같다. 노동자 계층의 아이들(the lads=boys)의 대부분이 부친과 같은 가혹한 육체노동으로 향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종래 흔하게 들어 왔듯 이 계층의 아이들은 보다 상위 계층 가정의 아이들에 비해서 학업 성적을 향상시키기도 어렵고, 결과적으로 저임금의 직업밖에 고를 수 없다는 이유가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자발적으로 육체노동을 선택하고 있다. 윌리스는 영국의 어느 도시(가칭 ‘해머타운’)의 학교의 현장 학습을 기반으로 그 구조를 풀어나간다.

아이들boys은 학교 문화에 반항한다. 혹은 학교 문화가 체현하는 가치 규범 일반도 거부한다. 오히려 그들은 육체노동에 종사하는 ‘진정한 남자’들의 문화를 동경한다. 그곳에는 남존여비, 가부장적 가치관이나 여성스러움을 부정하는 마초macho가 있다. 반反학교문화는 이러한 육체노동의 세계에 지극히 친화적이기도 해서 그들은 자발적으로 아버지가 있는 직업 세계에 들어간다. 게다가 반학교문화를 몸에 익히는 것 자체가 직업세계에선 적응력으로 기능한다. 확실히 양키에 관해서도 그 독자적인 메타사회의 규율에 익숙해진다든지 여행의 통솔자로서 리더십을 키운다든지 하는 경험은 반드시 블루칼라에만 해당하는 게 아니라 일본의 사회조직 적응에 도움이 될 것이다. 우리들이 ‘전직 양키’에 호의를 갖는다면 그 중 몇 할은 이러한 높은 적응도에 대한 신뢰에 있다고 본다. 확실히 우리는 그들이 동세대 젊은이들보다 세상 물정에 밝고 또한 보통내기가 아니며 틀림없이 시련에 강하리라는 인상을 갖고 있다.

이야기를 돌려서 아이들boys에게는 여성이 사이에 끼어 있는 걸 부정하는 동성사회적homosocial 관계성이 있다. 이는  미국의 성gender 연구자 이브 세지윅Eve Kosofsky Sedgwick이 창안한 용어지만 역시 간단히 설명하자면 동성애 혐오homophobia와 여성혐오misogyny를 기반으로 성립하는 남성끼리의 강한 연대 관계를 말한다. 종종 체육회계(중・고등학교의 운동부 혹은 대학교의 운동 서클 선후배 관계를 총칭하는 연고)를 예시로 들지만 양키 문화에도 그대로 들어맞는 면모가 있다. 물론 동성애 문화gay culture 중에도 양키 성향이 있는 점이나 양키 집단이 반드시 여성을 배제하진 않는다는 점은 고려되어야 하지만 일반적으로 그들은 이성애주의heterosexism의 신봉자이며 여성에게 육아나 가사노동을 당연한 듯 할당하는 의미에서의 남존여비 경향이나 가부장제에도 친화성이 높다.

또한 양키 집단은 고향 지향이나 전통 지향이 강하다. 지방 축제의 주요 인력이 그들임을 생각하면 이것도 당연하다. 고향 지향은 정치적으로는 보수의 입장과 연결되며 지향성이 한층 철저해지면 우익 활동으로 이어지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배해사排害社나 재특회在特會(재일교포의 특권을 용서하지 않는 시민 모임)와 같은 보수계 집단에 양키 경험자가 많다는 이야기도 근거 없는 이야기는 아니다.

고향 지향이나 동성사회와 관련해 흥미로운 점은 양키와 J리그의 관계이다. 아까 언급한 하야미즈 켄로에 따르면 축구의 서포터 그룹 중에는 폭주족에서 전향한 그룹도 적지 않다고 한다. “마침 90년대 중반은 한창 폭주족이 격감하고 J리그가 시작될 무렵이었습니다. 그러한 전직 폭주족 서포터 팀은 여성 멤버를 들이지 않는 규칙이 남아 있는 듯합니다. 폭주족도 여자 엄금이 기본이었으니까요. 그래서 관전하려면 멤버의 여자 친구란 입장으로밖에 들어갈 수 없는 세계라고 합니다. 그야말로 『휴대폰 소설적ケ─タイ小説的』에서 쓴 ‘지방 남성중심의 상조 조직과 소외된 여성의 모습’이라는 휴대폰 소설의 구도 그 자체죠. (『オタク/ヤンキーのゆくえ』第2回 (全3回) 東浩紀 × 速水建郎 http://d.hatena.ne.jp/idora/20080922/p2)

이러한 사실 전부는 양키 집단의 마초이즘machoism을 나타내는 특징이며 오히려 그들의 극단적인 남성성의 발로가 아닐까 하는 지적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계속 말하지만 내 생각에는 남성적 집단이라 부를 수 있는 건 규범이나 원리를 기반으로 결집한 집단이다. 여기까지 되풀이하며 이야기해왔듯 양키 집단은 의도적으로 반지성주의의 양식을 보유하고 있다. 거기엔 늘 원리보다도 관계성이 우선된다. 덧붙여 ‘인의仁義’나 ‘연공서열’로 시작하는 윤리관은 양키 문화에서도 중시되는 경향이 있지만 그 뿌리는 말할 것도 없이 유교이다. 유교는 기본적으로 대인 스킬을 주축으로 한 윤리체계이며 이념 이상으로 관계성을 중시하는 의미에서 양키 문화에 친화성이 높은 것도 당연하다.

이렇게 생각하면 양키 문화의 여성성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관계성 우위의 집단은 역시 여성적이라 형용될 터이다. 사실 동성사회의 문제로 보아도 실제로 여성 집단에서 똑같은 양상의 관계성이 종종 보인다는 지적도 있다. 또 마초이즘은 기본 이념보다 ‘마초의 겉모습’ 쪽을 중시하는 경향이 강하고, 이 역시 본질 이상으로 외견이 우선된다는 의미에서 여성적인 요소를 간파할 수 있다. 무엇보다 내가 보기에 동성사회도 마초이즘도 여성적인 발상이다. 꽤 특수한 고찰이라 받아들이기 힘든 사람도 있을 테니 이 논의는 이 이상 깊이 들어가지 않겠다.


모성과 가족주의


양키의 관계주의에 대해 말하자면 그것은 규모가 큰 집단보다는 좀 더 작은 개인이나 가족의 단계에서 발휘될 가능성이 크다.  그들의 사회가 관계성 우위로 작동하는 건 이미 파악한 대로이지만 그 이상으로 특징적인 건 그들이 거의 예외 없이 가족주의적이란 점이다. 성애관계에 적극적이며 더불어 의외로 일편단심인 면이 있다든지 하는 점도 양키의 특징이다. 평균적인 젊은이들 중에서도 가장 혼기가 빠른 것도 소위 ‘속도위반 결혼’ 이 많은 것도 이 계층일 것이다. 아이가 생겨버리면 적어도 겉치레는 ‘가족=목숨’이 되기 마련인 점은 타카하시 아유무의 사례에서도 알아챌 수 있다. 거기다 그들은 의외로 효자인 경우도 많다.

특히 어머니의 존재는 모든 양키에게 지극히 ‘무겁다’. 그들의 자전 등을 읽으면 그런 감각이 여실히 전해진다. 기묘하게도 그들의 자전을 읽고 있자면 대체로 ‘아버지’의 그림자가 옅다. 좋아하든 싫어하든 압도적인 존재감과 영향력을 발휘하는 건 꼭 ‘어머니’ 쪽이다. 양키와 모성을 두고 내가 가장 먼저 연상하는 건 배우 우카지 타카시宇梶剛다. 그가 열일곱 살 때 관동 최대라 불린 폭주족 블랙 엠페러ブラックエンペラー의 총대장이었다는 사실은 매우 유명하다. 그가 비행에 빠진 배경에는 모친에 대한 반발이 있었다. 모친 시즈에静江는 아이누 민족으로 타카시가 초등학생일 무렵부터 아이누에 대한 편견이나 차별과 싸워 그 전통적인 문화를 전하는 활동에 분주했다. 곤란한 타인에게는 손을 내밀어도 가족은 돌아보지 않는 어머니에게 타카시는 반발하여 열세 살에 가출한다. (우카지 타카시 『불량품不良品』 中) 그러나 그가 갱생할 계기 중 하나를 만든 것도 어머니였다. 폭주족 사이의 항쟁으로 소년원에 들어간 그에게 어머니가 넣어 준 한 권의 책 『채플린 자전』이 계기가 되어 그는 폭력을 버리고 배우를 지망하게 된다. 염원을 이루어 배우가 된 아들은 이제는 어머니의 활동에 협력할 정도로 바뀌었다.

원래라면 아버지와의 불화와 화해로 그려질 법한 드라마가 어머니와 아들 사이에서 펼쳐진 것이다. 물론 우카지의 사례가 특이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러한 관계는 양키 문화권에선 지극히 당연하게 볼 수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 남성 중 마더콤이 많은 건 당연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여성의 사례로 적절한지는 모르겠으나 일단 질풍노도의 역사를 커밍아웃하는 탤런트 스즈키 사리나鈴木沙理奈의 저서 『사리나의 본성沙理奈の素』에는 그의 양친을 존경하는 말이 자세하게 적혀 있다. 단 굳이 어느 쪽이냐 한다면 어머니 쪽에 비중을 두고 있다만. “뭐랄까, 멋져요. 엄마의 육아법이랄까 가정을 만드는 모습이요. 엄마로선 딱히 의식해서 한 게 아니라도 아들 셋에 딸 하나인 남매에게 별로 기대하는 것도 없었고 들들 볶는 말도 일절 안 했어요. ‘하고 싶은 건 뭐든 해도 좋지만 부모에게 빌붙거나 도움을 바라는 건 생각하지 말고 자기가 책임져’ 같은. (중략) 그런 엄한 면모를 보이며 길러줘서 어머니껜 굉장히 감사하고 있어요. 저는 오빠들처럼 엄하게 길러지지 않았지만 그래도 고민 같은 걸 상담할 때도 굉장히 엄한 대답을 해 줬어요.

일전에도 ‘정말 너무 바빠서 몸이 못 버티겠어. 이런 상태로는 좋은 일 같은 건 못해. 그만두고 싶어.’ 라고 했더니 ‘그래 우는 소리 할끼면 고마 때리치라. 싫다는 거 붙들어매놓고 억지로 하란 사람 없다 아이가? 불팽이나 투덜대쌀끼면 이짝으로 돌아와 오사카에서 일해라 마! 고만두고 싶은 거 꾸역꾸역 해싸는 기 훨씬 부자연스러우니끼니.’

첫마디부터 가장 할 말 없는 부분을 쿡 찌르더라고요. 그런 말을 들으니 반론할 말이 없다고 문득 깨달았어요.

‘미안. 역시 그만두고 싶지 않아. 한 번 더 힘낼게.’ 라고 울면서 사과했어요. 그랬더니 ‘네가 납득이 갈 때꺼정 네 하고 싶은 대로 하믄 되는 기다. 하지만 무리해서 할 건 없데이. 돌아올 곳이 있다 아이가.’ 라 하더라고요. (중략) 저한테는 당신께서 미움 받을 말 한 마디 하는 게 제일 효과적이란 걸 알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그 말 안에는 애정이 듬뿍 차 있어서, 못 당해내겠어요, 정말.”

그의 말을 옮겨 적으며 어딘가 강한 기시감을 느꼈다. 모친의 이 말은 전 장에서 언급한 나가타 유리코長田百合子의 말과 너무나 공명도가 높지 않은가. 예를 들어 ‘빌붙지 마’ 란 말과 ‘돌아올 곳이 있다’ 는 말은 모순이 아닐 수 없지만 ‘애정이 듬뿍 차 있다’는 해석에서 보면 맥락이 통하는 교육방침으로 보인다. 아마 나가타의 교육이념도 적어도 초기엔 이런 식으로 ‘정’의 측면에서는 맥락이 통하는 듯 보였을 것이다. 그들의 발언은 나와 같은 짓궂은 정리를 취하지 않으면 각각의 문맥에서 이해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모순은 아니게 될 것이다.

내가 제멋대로 ‘양키 문화권에서의 지성파’라고 생각하는 배우 아이카와 쇼哀川翔의 자전 『나, 불량품俺、不良品。』에도 모친에 대한 기술이 있다. 무엇보다 아이카와 자신에게 비행의 역사는 없지만 광의적 차원의 양키 문화권에 소속된 존재라는 점에는 이론異論이 적다고 보기 때문에 여기서 소개해둔다.

“내 이 성격이랄까 사고는 역시 어머니의 영향이 크다고 생각한다. 아버지가 죽고 어머니가 하염없이 훌쩍이고 있었다면 난 이런 성격이 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정말 속마음이 어땠는지는 모르지만 어머니는 항상 힘이 넘쳤고 시원시원했으니까. 나에 대한 교육방침도 ‘거짓말하지 말 것 / 남을 상처 입히지 말 것 / 남의 것을 뺏지 않을 것’ 이었고 지키지 않으면 안 됐지만 그것 말고는 딱히 뭘 하든 상관없다고 했다. (중략) 당연하지만 그 훈계의 범위는 꽤 넓다. 철저히 지키려 하면 꽤나 힘들다. 힘들지만 분명 인간으로서 중요한 지침이다. 그것만 지켜도 충분하다고 할 만하다. 우리 아이들에게도 그렇게 가르치고 있다. 그래서 난 어머니는 존경하고 있다.”

또 아이카와는 자기 자신의 가족에 대해서도 독특한 신념을 내비치고 있다. “일일이 규제하지 않고 아이들에겐 마음대로 하라고 말하고 있다. 잘못된 판단을 저지르면 내가 슬며시 들어선다. 그때 말을 듣지 않으면 ‘나가!’ 라고 한다. ‘나가지 않으면 때리겠다.’ 라고. 뭐, 아이의 훈육 방침에 대해서 머리 아프게 생각하지 않는데, 내 집에서 문제없으면 어딜 가든 살아나갈 수 있게끔 하자고는 생각하고 있다. 그도 그럴게 집이란 사회에 나서기 위해, 통용되기 위해 여러 가지를 가르치는 곳이니까. 커서 집 나가서 ‘우리 집구석 참 대단했어.’ 라 말해도 좋다. 미리 호되게 홍역을 치르면 그 뒤엔 몸에 밴 게 있으니까 보통 사람처럼 살아도 문제없지 않겠는가.” “우리 집은 ‘가정’의 느낌이 아니다. 그보다는 ‘가족’, 아니 ‘가족’ 보단 ‘무리’다. 같은 집단에 속한 무리. ○○족. 같은 정신이라 해도 되고 같은 피가 흐른다고 해도 의미는 통한다. (중략) 무리는 ‘누군가 죽어도 누군가 살아남는다.’ 같은 피의 농후함이 느껴진다. ‘이어받는 자’라고 할까. 그래서 결속이 굳다. 무리는 뭐랄까 ‘있는 그대로의 형상이라 어쩔 수 없네.’ 싶은 강함이 있는, 실상實像. 모이기만 하면 뭐든 무리가 된다, 모일 장소를 찾아서. 무슨 민족이라든지 폭주족이라든지 다들 모여 있잖아. 우리 집도 거실에 모두 모여든다. 마음이 놓이니까 모인다. 모두가 같은 곳에 있고 싶어 한다. 아이들은 공부도 거실에서 한다. 세상에는 한 지붕 아래서도 가족이 모두 뿔뿔이 흩어진 집이 많지만 난 그런 거 용납하지 않으니까. 밥도 제 시간에 오지 않으면 없다.”

‘맘대로 해라’ 는 말이 바로 뒤이어 ‘때리겠다’ 가 된다든지 ‘있는 그대로의 형상’을 긍정하는가 싶더니 ‘난 그런 거 용납하지 않으니까’ 가 되는 등 여기서도 표면적으로는 맥락이 통하지 않는 면이 있다. 가족을 무리라 칭하듯 아이카와는 가족의 공간을 일종의 자연스러움을 겸비한 특이한 공간, 말하자면 윤리의 자생 공간과 같은 장소로 생각하고 있는 듯하다. 거기서 중시되는 건 어디까지나 ‘거짓말하지 않기’ ‘남을 상처 입히지 않기’ ‘남의 것을 빼앗지 않기’처럼 관계성을 배려하는 사항들이다.


여성원리의 근간으로서의 ‘남성성’


이러한 예시들은 얼마든지 들 수 있지만 지금은 이 정도로 해 두자. 내가 반복해서 강조해 두고픈 건 양키의 가족주의에 동반되는 ‘모성’의 압도적이라 할 만큼의 우위성이다. 전 장까지 언급한 요시이에 히로유키義家弘介나 나가타 유리코의 교육방침 혹은 양키 문화에 지극히 친화성이 높은 긴파치 선생의 반지성주의나 관계 원리와도 매우 깊숙이 연결되어 있다. 보다 뻔한 단계에서 생각하면 적어도 성공한 양키들은 곧잘 모친의 영향이나 존재감에 큰 비중을 갖고 이야기하기 쉽다는 경향이 있다. 바꿔 말하면 그들이 정면에서 아버지와 대결하는 일은 거의 없고, 그러한 대상으로서의 아버지를 이야기할 일도 없다. 다소 거칠게 정리하자면 많은 양키 성공자들은 일절 ‘아버지 죽이기’을 겪지 않고 오히려 어머니의 정신적 비호 아래 성장을 이룬 것처럼 보이기까지 하다.

여기서 기묘하게 생각되는 점은 만약 그 정도로 뛰어난 모성 아래 자랐다면 어째서 그들은 응석 = 비행의 시기를 겪지 않으면 안 됐던 걸까 하는 본질적인 문제이다. 어머니를 그렇게 존경하고 있다면 가령 ‘남에게 폐 끼치지 말 것’ 이란 기본 원리를 어째서 엄수하지 않는가. 아마 그것은 모성원리의 비본질성 즉 ‘보편성의 결여’ 와 관련된 듯싶다. 이게 무슨 뜻일까. 남성원리 혹 부성원리에는 보편적인 ‘남성성’이란 본질을 얼마나 잘 전달하는가가 중요하게 된다. 이것은 가르치고 가르침 받는 것 이상으로 그 원리 하에 아버지는 아들을 억압하고 이윽고 성숙해진 아들에게 아버지가 대상으로서 죽임당하며 획득되는 것이다. 거기서는 서로의 불화 그 자체가 교육의 기능을 완수한다.

그러나 모성 원리에선 그러한 보편성은 없다. 어째서인가. 정신분석적으로 생각하면 ‘여자다움’을 적극적으로 가리키는 관념은 거의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머니가 딸에게 전하려는 ‘여자다움’은 관념보다도 신체적인 동일화로밖에 전달할 수 없다. 이것은 ‘여자다움’이란 것이 ‘남자다움’과 달리 늘 인간관계 안에서만 표현될 수 있는 외관상의 특성이기 때문이다. 여자아이의 훈육은 사회적 규칙을 가르치는 게 중심을 이루는 남자아이의 경우와는 크게 다르다. ‘여자다움’이라 불리는 것의 태반은 귀여운 머리 모양이나 화장, 여자다운feminine 의복 혹은 정숙한 몸가짐처럼 신체 = 외관에 관한 요소들로 구성되어있다. 경우에 따라 ‘다정함’ ‘어른스러움’ ‘순종적’ ‘수동성’ 등이 추가된다.

여기서 무엇이 배려되어있는가. 상대에게 불쾌함을 일으키지 말 것, 호감을 살 것, 좀 더 분명하게 말하자면 ‘상대에게 사랑받을 것’이다. 즉 여자다운 신체성이란 타자의 욕망을 끌어내는 신체성을 의미한다. 그러나 반복하지만 이러한 여자다움에는 보편성도 본질도 없다. 애당초 시대나 문화가 다르면 여자다움의 양상도 달라지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그건 어디까지나 각 가정의 사적 공간에서 전해지는 것 외에 다른 게 아니다. 사적 공간에서 신체를 통해 행해지는 관계성의 교육의 좋은 사례로 카메다 삼형제의 아버지를 떠올리는 건 이상한 연상일까. 하지만 어머니의 부재를 보상할 필요가 있다고는 해도 카메다 일가의 깊은 신뢰관계와 대외적인 응석받이의 모습에는 일종의 양키성에다가 특이한 구조를 엿볼 수 있다.

밀착형 모성이 집구석 호랑이内弁慶의 군상을 야기하는 데 반해 자립을 지향하는 모성은 바깥에서만 호랑이外弁慶가 되게 할 가능성이 농후하다. 삼형제의 아버지 카메다 시로亀田史朗는 부자 관계에 대한 질문에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남의 집은 남의 집이야. 내가 이러쿵저러쿵 말할 거리도 아니지만 말이야. (중략) 근본적인 건 부모가 심어주는 게 아니겠나. 과연 아이의 길은 부모가 생각해 주면 안 되는 거려나. 요즘 세상은 길이 잔뜩 있으니까 아이는 어느 길이든 가고 싶어한다고. 편하고 즐거운 길이 있다면 거기로 가고 싶겠지. 그걸로 괜찮겠어? 그건 부모가 이끌어 주는 게 아니겠어?” “(아들들에게 자신의 꿈을 밀어붙였다는 의식은 있냐는 질문에) 밀어붙였느냐 묻는다면 그래 밀어붙였지. 그렇지만 이건 일이니까. (중략) 밀어붙였다고 하면 어감이 나쁘겠지만 예를 들어서 말이야, 진학 문제 역시 그렇잖아. 부모가 어느 정도는 정해주지 않으면 안 되잖아. 아이의 길을 부모가 정해주지 않으면 아이의 판단만으로는 난해한 면이 있잖아. 아직 겨우 열다섯 언저리니까 말이야.” (『복서 카메다 코우키의 세계ボクサー亀田興毅の世界』 中)

이걸 세간을 의식한 겉치레로서의 번지르르한 말보단 어느 정도 그의 본심이라 믿는 이유는 그들의 부자관계가 옆에서 보기에도 지극히 친밀한 유대로 묶여 있는 듯 보이기 때문이다. 거기 있는 건 거듭 말하지만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대립이 아니다. 오히려 어머니와 딸의 관계성과도 닮은 비호 의식 혹은 신체 면에서 아이의 정신을 지배하려 하는 모성적 경향, 더 나아가 자기 인생을 처음부터 다시 살 것을 자식에게 바라는 모성적 동일화의 욕망이 아닐까.

이런 현상은 아마 양키 문화권에서 드물지 않을 터이다. 만약 그렇다면 하나의 가설이 성립한다. 양키 문화란 남성 원리의 가치 규범을 여성 원리의 방법론으로 전달하고 확산함으로써 성립해 온 게 아닐까. 카메다 부자의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그들이 노리는 ‘복싱 세계 챔피언’ 이란 목표는 분명 남성적 가치관이 뒷받침하고 있다. 하지만 그를 노리는 과정의 방법론은 철저히 모성적이다. 거듭 말하지만 신체의 독자적 컨트롤 내지 카메다 일가의 독자적인 가치관 교육 거기다 아버지 자신의 인생을 다시 살게 하는(아버지의 꿈을 아들이 이루는 것) 욕망이 얽힌 것까지 온통 모성적 요소가 발견된다.

세계 챔피언을 남성 원리 아래 노린다면 우선 아버지와 아들의 대립을 피할 수 없다. 게다가 아들은 어디까지나 개인의 욕망으로서 챔피언을 노리는 모양이 될 것이다. 말할 것도 없이 남성 원리의 발로 중 하나는 가족주의에 저항하는 개인주의여야 할 것이다. 거기에 ‘길러 준 아버지를 위해’ 같은 의리나 인정이 조금이라도 얽혀 있다면 더 이상 남성 원리를 유지하기는 어렵게 된다.

이 가설이 맞다면 지금까지 양키 문화권에서 관찰된 몇 가지 기묘한 현상들에 대해서도 납득할 만한 설명이 가능해질지도 모른다. 어째서 양키는 여성용 샌들을 신고 싶어 하는지, 어째서 양키들의 차 안에는 여러 팬시용품이 쌓여 있는지, 어째서 양키 패션에 귀여운 캐릭터 상품이 위화감 없이 녹아드는지, 그리고 어째서 양키는 디즈니를 좋아하는지.

험악한 인상의 외견을 옆에서 지탱하는 이러한 팬시성의 양상이야말로 적지 않은 비뚤어짐이나 극단성을 끌어안는 여성성 내지 모성 원리의 상징이 아니었을까. (하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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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사이토 타마키가 말하는 양키와 전후 일본의 정서


양키의 정체와 그들의 지향성에 대해서는 필요한 만큼 전달되었다고 보고, 이제 그들이 실제 일본 사회와 정치에서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짚어볼 필요가 있겠다. 다음 장에서 다룰 한국 사회의 모습과 비교하며 읽는 것도 재미있을 것이다. 흔히들 큰 맥락에서 한국이 일본을 십 년 내지 십오 년 간격을 두고 따라간다고 하는데, 최소한 이 반지성주의의 국면에서는 태생적이라 해도 좋을 정도의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번에 소개할 글은 사이토가 여러 분야의 현직자들과 대화한 내용을 정리한 대담집 『양키화하는 일본ヤンキー化する日本』에서 아이치현립대학愛知県立大学 준교수(부교수) 요나하 쥰輿那覇潤과 대화한 <보조바퀴를 달고 있던 전후 민주주의補助輪付きだった戦後民主主義>이다. 상기 내용에 언급한 양키의 특징 중 ‘운문적 미의식’을 염두하며 읽기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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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조바퀴를 달고 있던 전후 민주주의


양키 도시 나고야에서


사이토  요나하 씨는 고향이 나고야가 아니신지요?

요나하  초등학교부터 주욱 도쿄에서 자랐고 나고야에 온 건 현직(아이치 현립대학)을 맡은 07년도부터입니다. 그때부터 이 풍토의 친숙함은 무언지 고민했습니다만 이번에 사이토 씨의 책을 읽고 ‘나고야는 양키 도시가 아닌지’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웃음)

사이토  나고야에는 그런 면이 있지요. 흔히 ‘위대한 시골’이라 하는데 제가 보는 이미지는 야마모토 마사유키山本正之 작사・작곡에 츠보이 노리오つボイノリオ가 부른 명곡 ‘나고야는 좋구마! 오랜만이야名古屋はええよ!やっとかめ’입니다. 그걸 들으면 한번 살아보고 싶은 친숙함이 생기지요.

요나하  음식이 좀 더 알기 쉬운데 된장味噌(우동, 돈까스)이라든지 약간 매운 파스타ピリ辛あんかけ라든지 지나칠 정도로 진한 조미료가 하나씩 있지요. 전국에 전개된 체인점으로는 카레 전문점 ‘코코이찌방야CoCo壱番屋’가 나고야에서 시작되었는데 “사이좋은 부부에게 가게를 맡긴다”는 창업자의 방침이 성공 이유라고 합니다. 서로 사랑하는 부부라면 다소 힘들어도 기합으로 넘길 수 있다면서요. 양키의 ‘가족 정말 사랑해家族マジLOVE’ 같은 분위기랄까요.

사이토  일본에서 양키 문화가 가장 크게 기여하는 부분은 음식 문화라고 생각합니다. 가계 라멘家系ラーメン도 그렇고 홋카이도의 스프 카레도 그렇고요. NHK ‘클로즈 업 현대クローズアップ現代’에서 소개되어 물의를 빚은 ‘이자카야 고시엔居酒屋甲子園’도 단상에서 꿈이나 희망의 운문poem을 서로 풀어놓는 축제입니다. 그건 그렇고 코코이찌방야가 부부에게 초점을 맞춘 건 ‘역시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전부 그렇다고 말할 순 없겠지만 꿈과 가족애를 소중히 하는 양키 패밀리는 일본의 주류 성향이니까요.

요나하  나고야론의 고전인 시미즈 요시노리清水義節의 『메밀국수와 키시멘蕎麦ときしめん』도 나고야는 ‘촌락적 도시’라서 일본다움을 가장 응축한 ‘일본의 모형’이라 하고 있습니다. 소쿠리에 담긴 메밀국수가 아닌 키시멘처럼 듬뿍 담긴 국물 = 주위의 공기(분위기)에 녹아들게 한다나요. (웃음) 또 시바 료타로司馬遼太郎의 『길거리를 가다街道をゆく』도 최종권이 아이치 현입니다만, 편집자 노트에 따르면 나고야에는 ‘도시의 미학이 없다’ 는 말을 했다고 합니다. 사람이 점잔을 빼거나 치장하지 않고서는 말이지요.

사이토  상징적인 이야기군요. 들으면 들을수록 ‘쾌감 원칙 전부 올려라’ 는 인상으로 다가옵니다. 장어를 3단계로 맛보는 히쓰마부시ひつまぶし가 그런 전형일까요. 쾌감 원칙에서 합리성을 투철히 하면 음유성이나 상징성과 같은 문화가 쇠퇴하는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요나하  무라카미 하루키의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色彩を持たない多崎つくると、彼の巡礼の年』의 나고야 묘사도 화젯거리였습니다만, 그 전에 발표한 『지구를 분리하는 방법地球のはぐれ方』의 나고야 여행기에서 그야말로 똑같은 이야기를 했습니다. “음식 문화도 한 종류씩 순서대로 안주를 맛보는 게 아니라 ‘된장 조림 오야코 새우튀김 우동味噌煮込み親子えび天うどん’처럼 짙은맛이 나는 걸 전부 집어넣은 게 안주로 나오고, 과거의 경관을 말소하고 부설한 대로뿐이라 골목이 없어 문화로서의 기억이 거리에 없다. 그래서 이야기라는 게 구동하지 않는다.” 고 논설하고 있지요.

사이토  골목 문화는 일종의 인텔리 취향이란 면모가 있어서 그게 없는 나고야는 더욱 양키적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데서도 인텔리와 양키와의 대립구조가 보이는 듯합니다. 그리고 골목 하니까 골목에 집착하는 나카가미 켄지中上健次는 가장 양키적인 행보의 작가였다고 생각하는데요, 논리와 지성에 편중된 사람이라는 의미에서는 역시 그렇지 않습니다.

요나하  짐짓 이 작가들을 대표하는 낡은 의미의 소설은 인텔리가 아니면, 다시 말해 자기 자신을 한층 높은 경지에서 반성하는 자의식이 아니면 쓸 수 없으니까요. 양키라면 휴대폰 소설이 되어버리고요. 하지만 그러한 ‘인텔리는 이해할 수 없지만 그래도 현재 일본에서는 주류인 존재’를 설명해준 게 사이토 씨의 양키론의 논의였다고 생각합니다. 가령 정치적으로는 ‘자민당 말고 다른 정당을 뽑은 적 없는 사람’ 같은.


인텔리파와 양키파의 전후정치사


사이토  자민당은 원래부터 정체불명이었다고 생각합니다만 (이제) 인텔리의 부분은 완전히 소멸했지요.

요나하  총리대신으로 만두를 만든다든지 인텔리로선 견딜 수 없는 센스지요.

사이토  고이즈미 내각 시대의 존재가 그만큼 컸다는 이야기겠죠.

요나하  사이토 씨는 무라카미 류村上隆 씨와의 대담에서 양키가 프로듀서고 오타쿠가 크리에이터면 가장 히트할 거라는 이야기를 하셨습니다만 정치에서 그를 행한 게 고이즈미 개혁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시원시원한 기질의 양키 두목처럼 보이는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郎 씨가 퍼포머performer고 이치만 따지며 계산하는 타입의 타케나카 헤이조竹中平蔵 씨가 정책을 만들었으니까요.

사이토  고이즈미 씨는 불가사의한 사람인데, 양키 취향의 발언을 하는가 싶으면 행동은 전혀 양키스럽지 않습니다. 배짱으로 일을 처리하는 문화를 구축한 사람도 고이즈미 씨입니다. 대훈위국화대수장大勲位菊花大綬章 위훈자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曾根康弘 씨에게 ‘이제 당신 정년이니까’ 라며 최종 선고를 내린 것도 그가 아니고서야 못할 일이었죠. 저는 지금도 자민당의 전통 파괴자란 부분은 고평가하고 있고 2009년의 자민당의 대승을 예비한 것도 고이즈미 정권이었다고 생각합니다.(웃음)

요나하  확실히 고이즈미 씨는 전반기에도 고독하고 ‘혼자 외식하러 다닐 것 같은ぼっち飯上等’ 분위기가 오히려 오타쿠 같았지요. 모리 요시로森喜朗 씨처럼 분위기 메이커根回し上等인 사람이 양키란 말씀이신지요?

사이토  전형적으로 그렇죠. 애초에 다나카 가쿠에이가 수상이 된 순간 양키 문화의 주류화는 결정된 거나 다름없다고 하겠습니다. 그의 언동을 ‘촌락 사회적’이라 비판하는 건 간단한 일이지만 사실 쟁점을 잘못 짚은 거죠. 『열도 개조론列島改造論』의 주장은 유신과 마찬가지로 보수의 벡터를 보다 철저히 긋기 위한 변혁입니다. 구조를 온존하기 위해 표층을 점점 바꾸어 나간다, 그거야말로 그야말로 양키적이지요. 이런 반지성주의적인 수상이 서민의 압도적 인기를 얻고 말았으니 모리 씨 같은 사람도 완전히 그 계보를 답습하는 거고요.

요나하  전후정치사에서는 ‘관료파와 당인(일반인 출신의 당원)파’라는 표현을 주로 씁니다만 실제로는 ‘인텔리파와 양키파’가 아닐까 싶습니다. 사실 당인파의 뿌리 중 하나는 전쟁 전에 원외단院外團이라 불린, 국민 출신 의원代議士(현재의 중의원 의원衆議院議員)이 보디가드 겸 수행원으로 부리던 완력이 강한 부하들이 모인 집단이었으니 그야말로 진짜 양키지요. 요즘으로 따지면 리쿠야마 회 사건陸山会事件 때 언론에 오른 오자와 이치로小沢一郎와 주위의 관계가 그에 가깝다고 할까요.

 그 오자와 씨가 마쓰시타 정경숙松下政経塾과 같은 당외 인텔리파와 짜고 93년도에 호소카와 연립 정권, 09년도에는 민주당 정권을 만들었습니다만 13년도에는 결국 자민당 정권이 중・참의원의 뒤틀림도 해소하며 ‘일본을 되돌렸습니다’. 이 정치혁명의 이십 년은 오타쿠계 지식인들이 어떻게든 인텔리적인 방향으로 일본을 끌어당기려 한 기간이기도 했다고 생각합니다만, 마지막에 당연한 듯 자민당이 돌아왔을 때 사회 평론들도 ‘오타쿠를 주목하면 일본을 알 수 있다’에서 ‘양키를 주목하면 일본을 알 수 있다’로 표변한 사실은 눈여겨볼만 합니다.

사이토  그렇지요. 오타쿠는 자기 분석을 좋아하고 이야기하길 좋아하니까요. 미디어에서는 활기찬 듯 보이지만 결국 비주류입니다. 뻔한 마케팅 논리로 말하자면 오타쿠에게 먹히는 걸 만들어도 잘해야 십만 부가 겨우 팔리지만 양키에게 먹히면 백만 부는 거뜬하다는 사실도 명확해졌고요. 그런 의미에서는 양키는 한번 사라지려 해봤자 몇 번이고 돌아온다는 느낌이 들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요나하  마루야마 마사오丸山眞男 식으로 말하면 일본의 연속 패턴執拗低音ostinato은 사실 요코하마 긴바에横浜銀蝿였다든지. (웃음)

사이토  원래는 턱도 없는 이야기입니다만 일단 그 부분은 인식해 두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걸 받아들이고 거기서부터 어떻게 할지는 개개인의 판단에 달렸습니다만.


신자유주의조차도 아닌 무언가


요나하  고이즈미 정권 도중에는 신자유주의에 따른 격차 확대를 비판하는 게 인텔리들의 자기증명처럼 되었습니다만 저는 그런 논조는 본질을 벗어난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것은 타케나카 씨 식으로 이치로서의 부분밖에 보지 못하는 겁니다.

사이토  격차의 확대 자체는 고이즈미 내각 이전부터 있었으니 거기서부터 그만큼이나 변화했다고는 생각이 안 되지요. 그보다 배짱을 내세우는 면이나 이익유도형의 정치 같은 데 ‘노no’를 들이민 점에서 좋게 평가할 여지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아베 정권 하에서 그런 부분조차 역행backlash하여 돌아갈 듯 한 기색이 농후합니다.

요나하  고이즈미 개혁에는 여러 가지 문제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만 신자유주의라서 문제라 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실은 신자유주의조차 아닌 무언가가 문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습니다. 실제로 그 아베 정권도 신자유주의적인 규제 완화는 밀어 둔 채 경제적으로는 불합리한 야스쿠니靖国신사 참배를 계승하고 있지요.

사이토  신자유주의‘조차’ 아니지요. 과연 ‘일본의 자본주의瑞穂の国の資本主義’란 미혹하는 말迷言을 입에 올릴만하지요. 역시 양키적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는 체질이다 보니 사상적인 일관성은 그다지 중시하지 않습니다. 논리가 없고 운문만 있지요.

요나하  신자유주의의 선행 사례로서 거론되는 건 영미英美 양국입니다만 미국의 경우 원래 자유 경쟁을 무기로 ‘거기서 한탕 벌어 보라’며 전세계에서 이민자가 모여 만든 나라입니다. 그래서 레이거노믹스의 시장자유화엔 일종의 ‘원점회귀’의 의미가 있었습니다. 거꾸로 영국은 제 2차 세계 대전 이후 너무 철저하게 복지 국가를 만들어서 ‘한번쯤 리셋하지 않으면 안된다’ 는 발로가 대처리즘이고요.

 즉 어느 쪽도 그 나라의 역사를 파고들면 신자유주의의 출현을 이해할 여지가 있었습니다. 그에 반해 마치 문맥이 결여된 것 같은 이 일본판 신자유주의는 뭘까요? 이런 의문에 처음으로 대답해 준 사람이 사이토 씨였다고 생각합니다.

사이토  조금 과대평가된 것 같지만 감사합니다. (웃음) 『양키 경제소비의 주역・신보수층의 정체ヤンキー経済消費の主役・新保守層の正体』같은 책도 나왔습니다만 신자유주의와의 가장 큰 차이는, 양키 문화에는 개인주의가 완전히 결여되었다는 점이겠습니다.

요나하  말씀대로입니다. 진짜 문제는 신자유주의의 속성이 아니라 양키의 속성이지요. 고이즈미 정권 시절엔 아직 타케나카 씨도 국민들에게 ‘글로벌 경제는 이런 구조입니다’ 라며 인텔리적인 설명으로 납득시키려 했습니다. 하시모토 도루橋下徹에 이르자 양키도가 훨씬 올라갔지요. (웃음)

사이토  그야 올라가겠지요. 점점 알기 쉬운 진심ホンネ주의나 기합주의로 편향되어가는 겁니다. 그의 친구인 오사카부 지사 마쓰이松井만 해도 도시 구상을 반대하는 부의회에 대고 “마 대답해 봐라!” 하며 무서운 얼굴로 닦달하고 말이죠. 그런 알기 쉽다는 면모가 인기의 비결이겠지요. (웃음)

요나하  고이즈미 개혁의 경우 ‘양키 = 6 / 인텔리 = 4’ 정도로 운용되었습니다만 하시모토 유신은 ‘양키 = 9 / 인텔리 = 1’ 정도가 된 듯합니다.

사이토  그렇습니다. 양키에게 지성이 있으면 안 되는 이유는 없습니다만 양키적인 사람들이란 감성을 긍정하기 위해 지성을 비판하지요. ‘생각하지 마, 느껴라’ 밖에 말하지 않고요. 제가 이시하라 신타로를 양키와 엮지 않은 건 그에게는 교양주의적인 것에 대해 고개를 숙이는 면이 있기 때문입니다. 한때 제 이야기도 재미있어하며 들어주었지요, 그런 공정함은 있는 사람입니다.

요나하  확실히 이시하라 씨에겐 지금도 문학자라는 자의식이 있지요.

사이토  그쪽에 한 발을 걸치고 있으니 완전히 반지성이 되지 않는 거지요. 미시마 유키오三島由紀夫를 두고도 그의 신체 콤플렉스는 바보 취급하면서도 그의 지성에는 고개를 숙입니다. 오에 겐자부로大江健三郎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라고 봅니다. 오컬트스런 기합이네 하는 말도 그다지 안 하고요.


미국은 ‘부성’인가 ‘모성’인가


요나하  자기가 지성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는 쪽은 양키를 두고 곧잘 ‘반지성주의’라며 매도하는 경향이 있습니다만, 반지성주의란 단순한 바보와는 다른 것이지요.

사이토  분명히 다릅니다. 제가 자주 말하는데 양키 중 성공한 사람은 ‘선천적으로 머리가 좋습니다.’ 선천적으로 머리가 좋은 양키가 일본에서는 제일 존경받습니다. 그래서 최근 심심찮게 거론되는 인물이 시라스 지로白洲次郎입니다. 그 정도의 사람이 히어로 상像으로선 가장 인상적이구나 싶습니다. 반反지성이라기보단 ‘반反교양주의’에 가까울지도 모르겠습니다.

요나하  반지성주의를 단순히 ‘너희들 지성 없잖아’ 라고 공격하면 안 됩니다. ‘그들은 어째서 선천적으로 머리가 좋으면서 인텔리적인 것을 혐오하는가?’ 라는 측면에서 질문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거기서 사이토 씨가 저서에서 명시한 단서가 ‘양키는 산문적écriture이지 않다’는 지적과 ‘강경한 양키는 일견 마초macho같고 부성적으로 보여도 실은 모성적이다’는 논의, 이 두 가지였다고 생각합니다.

사이토  그렇지요. 신자유주의란 기본적으로 좋든 나쁘든 부성적인 사고방식이라고 생각합니다만 양키의 경우 ‘엄격한 모성’이지요. 보호적이지만 스파르타식이기도 합니다. 모성적이기 때문에야말로 기합이나 기분파 성향 같은 신체성에 의존하는 겁니다. 그들에게 진실을 담보해 주는 건 언제나 행동이며, 행동을 가능하게 하는 ‘꿈꾸는 신체’입니다.

요나하  알 것 같습니다. 부성적이란 건 마지막에는 자신에게서 독립시켜 떨어뜨리는 것이지요. ‘너와는 이제 남이니까 한 사람의 개인으로서 자신이 판단하여 살아가라’는 것이고요.

사이토  그렇습니다. 절단적인 건 부성이지요. 그래서 연속적, 포섭적인 것을 모성이라 생각하면 ‘엄격한 모성 = 양키’가 성립이 됩니다.

요나하  자기 머리로 생각하고픈 인텔리로선 가장 살기 힘든 방식입니다…

사이토  살기 힘들죠! 그리고 일본의 대중에게는 가장 마음이 편안한 방식이지요.

요나하  엄격하게 할 바에는 ‘내버려달라’ 고 하고 싶은데 ‘하지만 나에게 맞추면 받아들여주마’ 라며 쫒아오는 격이죠. 체벌 교사의 학생 지도같은 이야기군요.

사이토  바로 그겁니다! 체벌의 배경에 있는 건 모성입니다. 규칙 없이 자기 임의의 폭력으로 끌어안으려 하지요. 결코 내버려 두지 않아요. 규칙의 엄격한 적용이란 면에선 부성적이라 할 수 있겠지만요.

요나하  일본이 모성 사회란 점은 카와이 하야오河合隼雄 씨부터 이어진 테제입니다. 한편 에토 쥰은 ‘전후 일본 비판’의 문맥에서 ‘외압을 가해 일본을 근대화시키려 하는 미국’을 아버지라 하고, ‘그에 따라 무너져가는 일본의 전통’을 어머니라 비유했습니다. 하지만 사이토 씨의 진단에서는 일본인은 그 미국조차도 ‘모든 것을 끌어안아주는 무구한 개척자’로 모성화해 받아들였고, 그래서 양키는 강경하게 굴면서도 디즈니를 정말 좋아하지요. (웃음) 이 점이 종래의 일본문화론을 크게 진전시켰다고 저는 받아들였습니다.


언어 체계와 현실의 괴리


요나하  사이토 씨의 양키론을 일본문화론으로서 읽으면 ‘모성 지향에 따른 눈속임fake의 성질’ 외에 또 하나의 축을 형성하는 게 ‘언어를 근본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성질’입니다.

사이토  언어적인 부분의 영향이 큰 듯합니다. 최근에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에 가서 방대한 양의 각국의 책들을 보고 왔습니다만 일본과 유럽에선 책이란 것의 지위가 다르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일본의 서적 문화는 잡지적인 뉘앙스가 강하달까요, 아카이브화되지 않고 줄곧 표층을 흐르는 느낌이 있습니다.

요나하  축적stock이 아니라 흐름flow이란 말씀이시군요.

사이토  딱 그런 느낌입니다. 그래서 어째서인지 생각해보았습니다만… 동경여자의과대학東京女子医大에서 유전학을 연구하셨던 카마타니 나오유키鎌谷直之 선생님이 ‘일본인은 통계학과 유전학이 서투르고 순수수학을 잘 한다’ 는 말씀을 하셨는데 거기서 재미있는 가설을 세우시길, ‘일본인은 닫힌 세계의 시스템을 현실과 잇는 데는 서투르지만, 닫힌 세계 속에서 이것저것을 조작하는 건 잘 한다’ 는 게 골자입니다.

요나하  그건 양키보다는 인텔리 내지 오타쿠의 특징이 아닌지요.

사이토  물론 일본의 인텔리들이 그렇지요. 하지만 이 원리는 꽤 다양한 영역에 적용되지 않나 생각했습니다. 순수수학은 잘 하는데 응용수학이 서투니까 통계처럼 현실과 대응하지 않으면 안되는 학문은 일본인에게 맞지 않는다는 식으로요.

요나하  지금의 일본 대학들이 처한 문제군요. 인텔리가 순수하게 학문을 하자니 ‘그런 거 현실에 응용 못하잖아’ 라는 정치가의 클레임이 걸리지요. 자민당의 문부성(한국의 교육인적자원부) 관련 족의원文教族은 모리 씨부터 ‘양키 선생’까지 다들 양키도가 높으니까요.

사이토  일본어로 쓰인 인문계 이론서가 해외서는 거의 번역되지 않은 이유가 뭔지도 생각해보았습니다만 이 역시 일본의 언어체계와 현실이 괴리되어 있는 게 뿌리깊은 이유가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야마모토 타로山本太郎만이 남았다


요나하  만약 인문계에서 말씀하신 수학과 닮은 상태의 사례를 찾는다면 마르크스학이겠지요. 문헌학적인 마르크스 연구의 수준은 세계 굴지이지만 실천에 연결하는 마르크스주의의 측면에선 굉장히 약합니다.

사이토  실천 같은 거 가능할 리가 없다고 학자들 자신이 단정지어버리는 면이 있지 않을까요? 일종의 니힐리즘이 만연한 탓에 말입니다.

요나하  전후에 서구형의 사회민주주의 정당이 잘 성장하지 않은 것과도 관련이 있을 것 같군요. 일본사회당에는 브레인 집단인 학자들이 있었습니다만 그들의 세계관은 마르크스 고전학의 세계에 갇혀 있어 실제로 당을 움직인 건 양키 계열의 노동자 계급의 사람들이었다고 합니다.

사이토  실천에 이르는 건 말단 양키고, 브레인은 현실을 믿지 않기에 그런 괴리가 좀처럼 해소되지 않습니다.

요나하  인텔리와 양키의 공동 투쟁共鬪에 실패한 사례가 사회당이란 말이죠…

사이토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겠지요.

요나하  그런 의미에서 자민당 쪽이 어느 시기까지는 잘 융합hybrid하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소위 요시다 학교吉田学校부터 코우치 회宏池会에 이르는 한때의 보수 본류 말이지요.

사이토  그렇지요. 하지만 거기서 자민당의 지성적 한계가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가령 슬라보예 지젝Slavoj Zizek이 ‘월 가를 점령하라Occupy Wall Street)’ 시위에서 강연할 땐 확성기가 금지된지라 인간 확성기가 등장했다고 합니다만 그런 광경은 원자력발전소 반대 시위에선 있을 수 없다는 느낌이었습니다. 거슬러 올라가면 70년대 후반 이래 지식인이 현실과 공조하기를 진작 단념하는 구도가 계속해서 있었던 것 같습니다.

요나하  저는 다만 원자력발전소 반대 시위의 경우 오히려 달려든 지식인들이 너무 양키화되어버렸다는 점이 문제였다고 생각합니다. 확실히 일본에선 양키와 괴리되어 있는 한 인텔리는 영향력을 갖지 못합니다만 ‘양키 자체’가 되어버리면 그건 그것대로 안될 일입니다. 그야말로 인텔리적인 탈원전론을 바라는 사람들도 많았는데 그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어요. 전력은 기합으로 공급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요. (웃음)

사이토  그 결과가 야마모토 타로입니다.

요나하  ‘이런 식으로 원자력 발전소를 줄여나가면 몇 년 후에는 0이 될 겁니다’ 같은 비젼을 원했는데 그건 안 내놓고 ‘아무튼 모두가 막아야 해’ 로 흐르고 있습니다. 전력이 부족하면 어떡하냐고 하자 “기합으로 버텨” 라는 식이죠. 인텔리마저 양키화한 탈원전론을 외치고 있자니 야마모토 타로만 남고 실질적인 움직임은 사라졌고, 한때 인텔리 정치가의 희망이었던 호소카와 모리히로細川譲熙 씨마저 뒤따라 ‘즉시 원자력발전을 0으로’론을 들고 나온 도지사 선거에서 낙선했고요.

사이토  그 후에는 ‘야마모토 타로는 양키인가 아닌가’ 같은 쓸데없는 논쟁도 일어났지만요. (웃음) 저는 그를 보고 ‘뉴에이지 양키’라는 새로운 개념을 제창합니다. 뭐 폐로廢爐에 걸리는 약 반 세기의 기간은 양키의 기합주의와는 굉장히 상성이 나쁘다고 생각합니다만.


운문적 화자poemer와 페이스북


요나하  “모성적인 양키는 말이나 글로 생각하지 않는다. 언어는 부성적인 것이니까” 라는 사이토 씨의 테제는 역시 전문이신 라캉 이론에서 따오신 겁니까?

사이토  라캉 이론만은 아닙니다만, ‘인간은 아버지의 이름으로 거세당해 「이야기하는 존재」 즉 인간이 된다’ 는 발상을 기본으로 두고 있으니 언어적인 것을 파고들면 부성에 다다른다는 이야기가 되겠습니다.

요나하  (말씀대로라면) 확실히 오타쿠들은 거세되었다 볼 수 있겠군요. 자신의 감정조차도 만화의 명대사 등 기성 용어écriture를 인용하지 않으면 이야기하지 못할 정도니 말입니다.

사이토   그렇지요. 그렇기 때문에 그를 부인하고 미소녀 캐릭터에 모에萌え하는 등 어떤 의미에서 도착倒錯적인 방면으로 흘러가 버리는 거고요.

요나하  거꾸로 양키들의 경우 말이나 글이 없는 현실만으로 (이야기)해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이토  그렇지요. 그와 관련된 이야기입니다만 최근 오다지마 타카시小田嶋隆 씨가 낸 『운문 만세!ポエムに万歳』를 시작으로 ‘운문화하는 일본’이 여기저기서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아까 예를 든 이자카야 고시엔부터 J-POP의 가사에 이르기까지 말입니다.

요나하  ‘나 자신의 내면에서 솟아나왔다’ 칭하는 그야말로 말로 풀어낼 수 없는 언어 말이군요.

사이토  그렇습니다. 그거야말로 눈속임입니다. 그래서 시인poet이 아니라 운문 화자poemer라 부릅니다. (웃음) 겉치레뿐이고 내용이 없어도 거창하게 시적인 문구를 맨션 광고나 여관 광고에 써붙인다든지 골목 살리기 운동 표어로 쓴다든지 해서 낭비하는 사람들이죠.

요나하  한때 야나기다 쿠니오가 ‘낫 놓고 기역 자도 모르는 사람目に一丁字なき人’을 상사람常民이라 불렀듯 ‘운문밖에 모르는 사람目にポエムしかなき人’들이 현대판 상사람에 해당하는 양키라 할 수 있겠습니다. 단 그들은 마루야마 마사오를 재차 인용하자면 ‘탈脫인텔리’ 계 양키지요. 어중간하게나마 말이나 글에 끌려가고 있으니까요.

사이토  그렇습니다. 아이다 미츠오相田みつを 계 양키라고도 말할 수 있겠습니다만. 운문적인 말이나 글을 좋아하니 말이지요. 정서적인 분위기, 감성적인 공기를 돋우는 치유계癒し系의 말이나 글 같은 것 말입니다. 절단적인 사용 방식을 취하지 않고 포섭적인 사용 방식을 취하는 의미에서 운문을 매개로 하여 양키끼리 연대하는 면이 있습니다.

 그림을 곁들인 편지로 마음 전하기絵手紙 같은 건 그 전형이지요. 개성적인 듯 보이지만 실은 익명성의 작용입니다. 누가 써도 마찬가지로 따끈따끈한 정감이 있다는 점에서 말이지요. (웃음)

요나하  그렇다면 일견 상류 식자의 사회High Society 같은 페이스북도 실은 양키화된 매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내용은 운문으로도 상관없고 되돌려줄 말도 ‘좋아요’ 하나로 끝이니까요.

사이토  지극히 사적인 이야기를 쓰는데도 어째선지 모든 글이 똑같아 보이고, 상대에게는 ‘좋아요’ 외엔 바라지 않는다지요. 최근에는 불행한 근황에 대해 ‘좋아요’를 누르는 건 위화감이 있어서 ‘공감’ 버튼을 만드는 게 좋겠다는 이야기도 나오고 있답니다. 정말이지 쓸데없는 이야기입니다.

요나하  선택지가 두 개가 되어봤자 기능은 동일한 채군요. (웃음) ‘좋아요’ 의 원어가 Like였던가요. ‘미국의 원조 양키(역자 주 : 주커버그)의 발명품이 원래부터 눈속임을 좋아하는 일본판 양키에게 수용되었다’는 구도로 볼 수도 있겠습니다.

사이토  그것도 나름대로 고찰하면서 수용된 거겠지요. 미국산 유행을 개조하고 변형해 받아들이는 움직임도 지극히 양키적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요나하  페이스북이든 트위터든 사이버 공간을 양키 식으로 변형함으로써 일본에서도 성공한 매체라 말할 수 있겠군요. 거꾸로 인터넷 시대 초기에 있던 하이 레벨의 블로그 논단을 만들자던 주장은 없어졌고요. 즉 일본 사회가 요구하는 커뮤니케이션은 언어 이전의 다른 무엇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가령 수업에서 애니메이션 작품의 독해법을 가르쳐주지요. 하지만 TV에서 그 작품이 방영될 때 학생이 해설자가 되어 이야기를 하려 들자 같이 보던 부모에게 혼났다고 합니다. (웃음) 작품에 몰입하고픈 사람에게 그를 가로막는 분석적 내지 절단적인 언어는 방해란 겁니다.

사이토  깊이 생각하는 건 촌스러운 짓이라고 여기는 면도 있습니다. 스쿨 카스트에서도 이게 반영돼서, 이치를 따지는 녀석이나 깊이 생각하는 녀석은 ‘재수 없다’ 는 소릴 듣고 카스트의 중간 이하로 떨어져버립니다. 그런 데서 요구되는 대인 기술은 무엇인가 하면, 논리적인 능력도, 토론하는 능력도 아닙니다. 단지 분위기를 파악할 수 있는지, 웃음 포인트를 잡아낼 수 있는지, 그것뿐입니다.


일본교日本敎는 인간교人間敎


요나하  아마 요즘이라면 LINE식의 커뮤니케이션 스킬이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구미歐美산 SNS에는 아직 남아 있던 인텔리 정서를 완전히 배제시켰으니 가장 들어맞는 비유겠지요.

사이토  재귀적인 친밀함을 주력으로 하는 상호확인 미디어지요. 전 그걸 ‘그루밍grooming하는 의사소통’ 이라 부르고 있습니다만, 아무래도 기업 같은 곳에서 도입했다간 써먹지 못하지요?

요나하  아닙니다, 오히려 신입사원에게 요구되는 건 그 수준의 스킬뿐입니다. 그 뒤는 언어화 이전의 암묵적인 지식이 장기고용에 따라 조직에 축적되어 있으니, 그룹 업무를 통해 신체에 각인시키는 게 일본식 경영이 아닙니까. 주변에 맞추는 협조성만 지니면 다른 요소는 입사 후 얼마든지 주입시킬 수 있다는… 즉 인간이란 대상을 지극히 균질적으로 보고 있죠.

 『분위기의 연구「空気」の研究』로 알려진 야마모토 시치헤이山本七平는, 일본인은 ‘일본교 교도’이며 그 내실은 ‘인간교’라 말하고 있습니다. 인간교란 ‘인간은 모두 알몸 상태에선 다들 똑같으니 서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는 발상입니다. 일본인은 그렇게 믿고 있어서 자신과 타인의 ‘차이’를 명확히 하는 것과 같은 절단적인 언어를 사용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사이토  ‘일본교’의 밑바닥에는 역시 신토神道가 있는 듯 합니다. 교의敎義고 교조敎祖고 아무것도 없는 속이 텅 빈 구조만으로 온갖 신앙을 포섭해버리는 메타 종교적인 위치지요. 작년 시키넨선궁式年遷宮이 있던 이세신궁伊勢神宮에 가 봤더니 정월 첫 참배初詣로 착각할 정도로 사람이 북적거려서 ‘저게 어디가 무종교냐!’ 싶은 기분이었습니다.

 신토에선 그야말로 알몸이 되면 신과 사람의 구별이 없습니다. ‘알몸이 되면 인간은 다 똑같다’ 는 환상은 곧 비뚤어진 본심주의ホンネ主義와 통합니다. 본심으로 부딪치면 마음은 반드시 통한다는 발상도 지극히 양키스럽습니다. 바로 그것이 하시모토 도루가 오키나와의 미군 기지에 갔을 때 사령관에게…

요나하  ‘성범죄를 억제하려면 퇴폐업소를 활용하라’ 고 말해 문제가 된 사건이군요.

사이토  가감없이 말해서 ‘너희들도 퇴폐업소 좋아하잖아?’ 같은 말을 내뱉은 셈입니다.

요나하  연속성의 말이나 글로 ‘우리들 모두 퇴폐업소 좋아하니까 말이야. 속으로는 너희들도 좋아하는 거 맞잖아?’ 라 포용하려 들자 ‘너희들과 똑같이 취급하지 마라’ 는 반응과 함께 나가떨어졌죠.

사이토  하시모토 도루는 본심주의로 인기를 얻은 사람이니까요. 미국인도 본심주의가 통용할 거라 생각했는데 전혀 통용되지 않고 좌절되었죠. 역시 이상을 이야기할 곳과 본심을 이야기할 곳의 구분이 되지 않는다는 게 양키주의의 한계인가 싶습니다. 그런 점이야말로 말이나 글을 중시하지 않는 사조의 폐해라 할 수 있겠지요.


“아베 신조 군” “네엣” 하는 민주주의


요나하  말씀하신 측면에서 지금 가장 걱정되는 실정이 보수 회귀라 일컬어지는 아베 자민당입니다. 말의 사용이 굉장히 치졸하다는 인상이 있습니다. 개헌론에서도 예를 들어 전문에 있는 “평화를 사랑하는 모든 국민의 공정과 신의를 신뢰하여”라는 문어에 대고 “네, 틀렸고요. 북한은 평화를 사랑하지 않지요.” 같은 말을 하는 정치가가 있으니 말입니다. 이상을 말할 부분과 현실을 말할 부분의 차이도, 그런 식의 발언으로 국제사회로의 복귀(UN 가맹)를 성취했다는 역사적 문맥도 읽지 않고, 문장만을 따와서 “내 마음에 쏙 들어오지 않으니까 바꿔야지” 수준의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옛날에 넷우익이 의기양양한 태도로 “집단적 자위권이 없는 일본은 이상합니다. 즉 자위관은 일본 국민이란 집단이 아니라 자기 개인밖에 지킬 수 없습니다.” 라 쓴 걸 보고 엄청난 충격을 받았습니다만(웃음) 나라의 중추마저 그와 다를 바 없는 수준이 된 게 아닌가, 그런 두려움을 느낍니다. ‘실제로 나는 이렇게 읽었다’ 는 제멋대로의 해석을 한번이라도 음미하지 않고 각자가 ‘내외에 통용되는 해석’이라고 믿어버립니다.

사이토  양키가 중시하는 건 개인이 아니라 가족이나 고향을 출발점으로 삼는 동료 집단입니다. 그에 동반하는 서로간의 호흡이란 말이 필요 없는 그들의 세계이겠지요. 그 안에서 말이나 글을 중시하면 촌스럽다든지 성가시다고 인식되기 십상이니 개인이라는 발상 역시 누락됩니다. 자민당의 개헌안을 보아도 ‘공공公共’이란 어휘를 굉장히 남발하고 있습니다만 결국 이 ‘공공’은 세간이나 동료집단이란 의미로밖에 생각되지 않습니다. public이란 개념이 없는 게 아닌가 하는 인상이 강합니다.

요나하  민주당 정권기의 인텔리는 ‘새로운 공공’이라 하며 그에 대항하려 했습니다만 결국 잘 되지 않았던 겁니다.

사이토  뭐 그러니까 민주주의란 것에 대한 이해가 어디까지나 ‘다수결의 민주주의’ 더 나아가 ‘동료 집단 민주주의’가 된 겁니다. 또 하나 민주주의의 중요한 바탕인 ‘개인주의’의 면모가 완전히 누락된 상태가 계속되고 있다는 느낌입니다.

요나하  제가 보기엔 다수결주의는 고사하고 국회에서 총리대신을 포함해 하나같이 ‘~군君’이라 불리는 게 일본인의 민주주의구나, 싶습니다.

사이토  언제부터 그런 일이 있었죠?

요나하  확실히 알아본 적은 없습니다만 제국의회의 속기록을 보면 아무래도 초창기부터, 예를 들어 예산위원장이 “총리대신 마츠카타松方正義 군이 예산에 대해 설명하겠습니다…” 이런 식으로 해왔던 듯합니다. 개인적으로 지금까지도 인상적이던 장면은 93년도의 비자민・비공산연립정권 당시 도이 타카코土井たか子 씨가 여성 최초로 중의원 의장이 되어 “호소카와 모리히로 씨를 내각총리대신에 임명하는…” 하며 “~씨”라 한 대목입니다. 당시 아직 중학생이었지만 ‘일본은 이제 시작이구나’ 느꼈던 게 지금도 생생합니다.

사이토  ‘한 발짝 진보했구나’ 같은?

요나하  소리로서 열린 느낌이었습니다. 의장이 바뀌고 곧바로 되돌아가버렸지만 말입니다. 일본인의 민주주의란 ‘정권은 기본적으로 계속 자민당에게 내맡기지만 그 잘나신 자민당의 총리대신님도 국회에선 ’~군‘이다’입니다. “아베 신조 군” “네엣” 할 때 그 얼핏 평등하게 보이는 감각이 양키에게 가장 부합하는 민주주의관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궁극의 무책임체계


사이토  양키 문화는 일견 상하 관계를 중시하는 사회처럼 보이지만 한편으론 하극상도 있고 해서 이중규범double standard의 면모도 보입니다.

요나하  야마모토 시치헤이는 인간교를 비판하는 반면 그 ‘알몸이 되면 다 똑같다’가 일종의 평등주의라며 호의적으로 평가했습니다. 하극상에 대해서도 그는 재미있는 말을 했습니다만, ‘딱히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죽여 버리는 게 하극상은 아니다’고 합니다. 오히려 위의 놈을 신사에 봉헌하고 참배하며, 그를 지탱한다는 명목으로 아랫놈이 실권을 쥐는 게 하극상이라고 합니다.

실은 마루야마 마사오도 말년의 ‘정사의 구조政事の構造’라는 강연에서 정사まつりごと가 제사祭事에서 유래됐다는 건 틀렸고, 올바른 유래는 봉사일奉仕事이라는 모토오리 노리나가本居宜長의 견해를 따르고 있습니다. 즉 천황과 같은 일본의 정점top에겐 통치에 정통성을 부여할 뿐 실질적인 의사 결정은 그들에게 사역하는奉っている 아랫사람들이 하는 것이 일본에서는 통상적인 양태라는 겁니다.

사이토  가마를 받든다お神輿는 건 한 명 정도 끌어내려져도 관계없다고 한 무책임의 체계의 완성형 같은 거라 ‘중심이 공허해도 상관없다’ 는 식으로 나오기 마련입니다. 한도 카즈토시半藤一利 씨의 『일본형 리더는 어째서 실패하는가日本型リーダーはなぜ失敗するのか』 에도 같은 이야기가 쓰여 있었습니다. ‘참모 중시’의 일본형 리더십 즉 ‘받들어지는 데 전전긍긍할’ 뿐인 무능한 리더와 그 권세의 우산 아래서 권한을 휘두르는 참모의 조합입니다. 권한과 책임이 괴리된 이 권력 구조가 삼백만 명의 희생자를 낸 태평양 전쟁의 참상을 불렀습니다.

 지금은 무모한 작전의 대명사로도 각인된 임팔 작전インパール作戦을 발안・지휘한 무타구치 렌야牟田口廉也는 칠만 명이 아사餓死하는 와중에 온몸에 물을 맞으며 신에게 기원하여水垢離 기합을 넣었다고 합니다만, 양키스런 중간관리직의 폭주 후 남은 시체의 산이라는 광경은 작금의 블랙 기업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요나하  그러한 전쟁 전부터의 무책임의 체계를 마루야마를 비롯한 진보파는 당초부터 민주주의를 통해 극복하려 했지만, 해보고 나서 알게 된 사실은 ‘민주주의는 궁극의 무책임 체계가 되기도 한다’는 것이었지요. 정치가는 ‘너희들이 뽑았으니 난 받들어질 뿐이야’ 라고 말하면 그만이니까요. 하시모토 씨는 그걸 아니까 ‘싫으면 낙선시키면 되잖아’ 라 말하는 거고요.

사이토  그건 일본식으로 해석한 터무니없는 민주주의의 발상이 아닙니까. 개인주의가 빠진 민주주의는 결국 무책임한 중간 집단의 경합으로 전락합니다. 국익 이전에 부처의 이익에 급급하는 일본 정부 산하 부처들이 좋은 사례입니다. 본래 그런 입장이 된 사람이 결단을 하고 책임을 진다는 규칙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본심주의에 전복 당했다는 데에 일본 민주주의의 한계가 있습니다.

요나하  ‘인터넷 민주주의’에 국한되지 않고 애당초 일본에는 민주주의 자체가 양키도 조작할 수 있게 변형된 형태로밖에 정착되지 않았다는 말씀이시군요.

사이토  안타깝지만 그렇군요. 양키에게 애니메이션을 보여주려면 지브리スタジオジブリ스런 마케팅을 취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과도 같은 맥락입니다.


보조 바퀴를 달고 있던 전후 민주주의


요나하  양키는 절단을 가장 싫어하는 것과 대조적으로 일본의 인텔리는 ‘우선 절단하라’ 고 말하는 사람이 많았다고 생각합니다. 전전戰前에는 공산당에서 한때 에이스였던 후쿠모토 카즈오福本和夫가 ‘분리결합론’ 이라 해서 혁명 의식이 높은 전위당을 우선은 대중에게서 분리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했습니다. 전후에는 마루야마 마사오가 ‘일본은 8월 15일을 계기로 전전과 절단되어 민주 국가가 되었다’ 고 논했습니다.

사이토  ‘민주 국가가 된 것으로 칩시다’ 는 거겠지요. 모리 오가이森鴎外의 ‘그런 척하는かのように’ 논리지요. 의식된 거짓말 위에서밖에 가치가 성립하지 않는 것 말입니다. ‘절단되어 민주 국가가 되었다’ 는 거짓말을 다 같이 연기해 나가자는 거겠지요.

요나하  한번은 절단하자, 내지는 절단된 ‘셈 치자’고 말하지만 무엇보다도 일반 국민 모두가 잠재적으로 양키여서는 애당초 분리할 수 없다는 걸 깨닫고 고뇌한다든지 전향하는 것이겠습니다. 가장 온건한 전향은 인텔리로서의 이상을 버리지 않고 양키라도 조작 가능한 형태로 변형하는 것이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55년 체제(*1955년에 자민당이 제1여당, 일본사회당이 제1야당을 차지하던 때)란 기적적으로 그것이 어느 정도 실현된 시기였습니다. 가령 9조평화주의九条平和主義는 좌익판 양키 사상이었기에 정착할 수 있던 면이 있습니다.

사이토  9조평화주의가 좌익판 양키였나요?

요나하  한때 ‘자위대 위헌론’ 이 뿌리깊던 시절 “‘전력戰力의 경우 이를 보지保持하지 않는다’고 쓰여 있으니 위헌이잖아. 논파 끝.” 식의 논리가 성행했지요. 현재 자민당 개헌파의 헌법 해독방식도 유치합니다만 그걸 좌파가 뒤집어 사용한 수준으로 전후 좌익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 정도로 양키에 비견할 심플한 감각으로 호소했기 때문에 사회당은 오랫동안 국회 의식 삼분의 일을 고수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55년 체제는 양키가 플레이해도 대실패하지 않도록 예행 연습된 게임이었던 듯 합니다. 말하자면 초심자도 조작할 수 있는 ‘보조바퀴를 단 민주주의’였던 것을 좌파 인텔리들이 ‘역시 보조바퀴를 떼지 않으면 진정한 민주주의가 아니야’ 라 생각하며 시도한 게 93년도 이후 이십 년간이었습니다. 그들이 말하는 보조 바퀴란 자민당 1당 지배였습니다만 그것이 실패하고 이번엔 아베 씨를 비롯한 우파 양키가 미국에 대한 군사적 의존이라는 다른 보조바퀴를 떼려고 합니다. 요컨대 미국의 방위 체계에 엮여 머리를 눌리고 있는 게 마음에 들지 않으니 그를 떼버리고 야스쿠니靖國(참배) 정도는 자유롭게 할 수 있다, 전쟁도 임의에 따라 할 수 있는 나라가 되자는 겁니다.

사이토  9조에 대해서는 고민되는 면도 있습니다만 저는 헌법과 군비의 예산을 줄곧 고심하는 내성성內省性이라는 ‘제정신’이 중요하다고 당장은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애매모호한 건 사실입니다. 가라타니 고진柄谷行人 씨 등은 군비 방책을 두고 보다 과격하게 증여할 것을 제안하고 있습니다만 그건 이성적 판단이라기보단 ‘증여라는 이름의 광기’를 옹호하는 듯 보입니다. 어쨌든 양키에게는 도저히 어필할 수 없는 생각입니다.

 실낱같은 희망을 꼽자면 역시 양키는 국익 같은 건 돌이켜보지 않고, 좋든 나쁘든 관심영역이 자기에게 친밀한 영역에 머물러 있어서 의외로 호전적이지는 않다는 점일까요. 카타야마 모리히데片山杜秀 씨는 『미완의 파시즘未完のファシズム』에서 메이지 헌법이 정한 국가체제가 다원화된 권력분립체제였기에 군의 폭주를 막지 못했다는 문제와 이러한 체제에 따라 일본은 권력이 한 점에 집중되지 않고 미완의 파시즘으로 끝날 수밖에 없었다는 문제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저는 양키의 반지성주의도 사상이나 말이나 글이 감각 가능한 신체성을 뛰어넘는 것을 용납하지 않기에 혁명도 일어나지 않는 대신 파시즘이나 극우와 같은 과격화에도 제동이 걸릴 거라고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안심할 수도 있겠지만 조금이라도 사회를 바꾸려 들면 두터운 양키의 벽에…

요나하  가로막히겠지요. 개인적으로는 이 나라의 그러한 체질 자체를 어떻게든 해보고 싶습니다만 패전으로도 바꿀 수 없던 걸 그렇게 만만히 바꿀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고, 말씀하셨듯 ‘보다 나쁘게’ 바뀌어버릴 위기성도 있습니다. 지금보다 개방된 앞으로의 ‘양키가 플레이할 수 있는 민주주의’의 모델을 세세하게 목표하는 것밖에는 달리 없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직社稷 신앙과 좌익판 양키 2.0


사이토  지금부터 非양키적인 캐릭터가 스타가 되는 수밖에 없다고도 생각합니다만 그렇다해도 향후 백 년은 무리일 듯합니다.

요나하  그때도 분명 프로듀서를 양키가 맡지 않으면 무리겠지요. 어쨌든 그들에게 PR할 전략을 세우지 않으면 안 됩니다. 전쟁 전의 양키의 정치활동이라 하면 청년 장교입니다만 5・15 사건의 미카미 타쿠三上卓가 쓴 「쇼와 유신의 노래昭和維新の歌」의 ‘재벌들은 부를 자랑할줄만 알지 사직을 생각하는 마음은 없네財閥富を誇れども、社稷を思ふ心なし’ 라는 가사는 지금도 양키들의 마음을 울릴 겁니다. 일본사에 등장하는, 양키들이 중요히 여기는 가족이라든지 고향이라든지 하는 걸 가리켜 온 용어란 아마 ‘사직’이 아닐까요. 그렇지만 그것은 동시에 일본의 한계이기도 합니다.

 사직은 집안, 마을 이런 식으로 바꿔 말할 수도 있습니다만 가령 부의 재분배를 논의할 때 ‘지금은 불경기니 일이 없는 사람의 생활보호를 증액해주자’ 고 하면 모두의 눈총을 받습니다. ‘어째서 노력이 부족한 열등 그룹에게 세금을 쓰느냐, 나라에 의존하기 전에 가족에 의존해라’ 며 말입니다. 하지만 반면 ‘시장경쟁에서 질 것 같은 지방을 활성화하기 위해 예산을 책정하자’ 고 하면 그에 대해서는 즉시 수긍합니다. 양키의 나라에선 말입니다. 실제로는 나라가 개인을 직접 지원하는 쪽이 적잖은 빈도로 효율이 높은데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요컨대 일본의 정재계란 사실 ‘사직을 생각하는 마음밖에 없고’, 오히려 개인이나 국가에 대한 사고가 부족합니다. 아베 씨를 위시하여 곧잘 ‘일본인으로서의 국가 의식이 부족하다’ 고 말하는 사람들은 소 뒷걸음치다 쥐 잡는 격으로 맞는 말을 하고 있는 셈입니다. 집안과 마을뿐 아니라 나라라는 단위에서도 철이 들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겁니다. 하지만 정작 본인들이 양키의 사고를 하는지라…

사이토  뭐 그건 우연이라 치고요.(웃음) 하지만 아베 씨의 ‘일본의 자본주의瑞穂の国の資本主義’ 운문을 읽고 있자면 이 사람에게 국가라는 개념이 제대로 있는지 의심스럽습니다. 『일본의 기원日本の起源』에서 요나하 씨가 말씀하시듯 ‘70년대 이후의 일본은 도처에서 촌락 사회의 포섭이 일어나 ‘에도江戸막부보다 더 에도같은’ 시대가 되었습니다.’ 이에 전적으로 동감하며 이 과정이 양키화와 평행하여 진행했다고까지 저는 생각합니다. 온갖 변혁이 보수의 구조를 강화하는 지극히 기묘한 체제입니다. 좌익조차 이 체제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요나하  그야말로 그 구조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일부 중도 입장의 사람들이 말하는 ‘국가주의nationalism는 안 되지만 향토애patriotism는 괜찮다’ 같은 이야기를 무엇보다도 용납해선 안 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건 좌익판 양키 2.0 같은 소리입니다. (웃음) PR전략이면 몰라도 동화하는 건 지식인이 할 일이 아니지요. ‘전력부보지戰力不保持라 적혀 있으니 자위대는 위헌!’ 이 좌익판 양키 1.0이라면 ‘국가주의는 야스쿠니 신사로 연계되니 안 되지만 향토애는 괜찮다. 젊은이들은 대기업에 들어가기보다 NPO에서 마을 부흥을 해라! 지역의 인연 만세!’ 가 2.0입니다.

사이토  결국 회귀하는군요.

요나하  진검승부식 사직의 전형이라면 에도 시대의 5인조 같은 연대제도로, 이건 마을에 연례 공물을 내지 못하는 자가 있으면 여유 있는 지주가 대신 내주지 않으면 안 됩니다. 대학원 선배 마츠자와 유우사쿠松沢裕作 씨가 『촌락 합병에서 생겨난 일본 근대町村合併から生まれた日本近代』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습니다. 실은 그게 성가시게 된 사람들이 지지한 게 메이지 유신이라고 말입니다.

사이토  힙합 크루도 아니고(웃음), 자애 넘치는 고장hommy 같은 건 망상입니다. 의무라 마지못해 도와줘 왔다는 걸 촌락 합병의 추진자들은 분명 의식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역시 양키의 나라인 만큼 뒤에서는 다들 지역의 유력자들은 마음 속 깊이 고향의 사정을 봐줬을 거라고 멋대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기합주의의 뿌리


사이토  또 한 가지 부디 여쭙고 싶던 것은 기합주의의 뿌리에 대해서입니다. 카타야마 모리히데 씨가 말하고 있는 건 ‘일본에는 자원이 없던 게 크다… 제 1차 세계 대전 때는 총력전의 양상을 이해한 채 ‘기합’은 총력전이 되지 않기 위한 것이었는데 어느새 ‘총력전을 강행하자’ 는 이야기가 되어버렸다’입니다.

요나하  바보라서 기합주의가 된 게 아니라, ‘기합 말고는 자원이 없는 나라임을 자각하고 있을 정도로는 똑똑했기 때문에’ 그렇게 되지 않을 수 없었다는 분석이지요. 전쟁 전의 군부가 양키도 100%로 보이는 와중에 어중간하게 인텔리의 요소도 있던 게 보다 큰 비극을 낳았다는 이야기고요.

 그런 한편 제가 『중국화하는 일본中国化する日本』에서 주장하는 바는 이른바 기합주의의 뿌리로서 양명학에 주목하는 코지마 츠요시小島毅 선생의 견해에 착안했습니다. 중국에서 송조宋朝 이래 과거科擧라는 인텔리 지배 체제를 지탱한 것은 유교 중 주자학으로 결실을 맺은 사상으로 이는 일종의 지성주의입니다. ‘철저히 고전을 읽으며 수양하고 공부하면 당신도 성인이 될 수 있다’ 는 게 주자학의 발상입니다. 그래서 시험에 합격하면 관리로서 천하를 지배하는 쪽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명조明朝 말기 대두된 양명학은 주자학의 안티테제로 ‘공부 같은 거 하지 않아도 성인이 될 수 있다’ 심지어는 ‘공부하지 않은 사람 쪽이 사실 성인이다’ 는 발상입니다. 공부해서는 고만고만한 공론밖에 안 하는 인텔리는 오히려 그에 따라 세상을 보는 눈이 흐려져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사이토  그거 완전히 양키 아닙니까.(웃음)

요나하  중국사 전문가 키시모토 미오岸本美緒 선생님이 자주 인용하는 사례를 읽어보면 실제로 양키입니다.(웃음) 개조開祖 왕양명王陽明은 대략 ‘자기 마음에 울리지 않으면 공자의 말과 글이라도 틀렸다’ 라고까지 단언하고 있고, 양명학파의 설법에는 이런 이야기도 나옵니다. “아기는 어머니를 그리워해 울지만 이는 유교 경전을 읽고서 부모를 효로 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학습했기 때문인가? 그렇지 않다. 즉 처음부터 누구에게나 각자 그 마음에는 도덕의 이치와 부합하는 성질이 갖춰져 있다. 중요한 것은 그 순결한 ‘갓난아기赤子의 마음’을 되찾는 것이다.” 는 내용입니다.

사이토  본능주의인지, 성선설인지… 그야말로 ‘알몸이 되면 모두 똑같다’, ‘진심과 기합으로 부딪치면 꿈은 반드시 이루어진다’, 그런 양키의 운문과 바로 이어지는군요. 양키 문화는 형식적으로는 유교를 환골탈태한 면이 있다고 생각해보긴 했습니다만… 기합의 뿌리까지 유교에 있었다니.

요나하  전문용어로 ‘심즉리心卽理’라 합니다만, 어머니의 비유가 나오는 걸 보면 사이토 씨의 말씀처럼 유교란 부성인지 모성인지 단정할 수 없는 면이 흥미롭다고 생각합니다. 가령 에토 쥰은 『근대 이전近代以前』이란 평론에서 ‘도쿠가와徳川 초기의 일본 지식인들은 천하의 나라들에 질서를 가져오는 통치자의 언어 즉 부성적인 것으로써 유교를 익혀 왔다’ 고 쓰는 반면 ‘그 일본 유교에는 와카和歌의 정서와 절충하기 용이한 이 양명학계의 성분이 중국 본토보다 농도 짙게 나왔다’ 고도 지적하고 있습니다. 의외로 그것이 양키화하는 인텔리들의 원점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웃음)


역사의식이 없는 일본인


사이토  이번에 대담을 하며 느꼈습니다만 일본의 여러 가지 문제는 양키라는 인종의 역사의식의 결여에서 생겨나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요나하  야마모토 시치헤이와 마루야마 마사오의 또 한 가지 공통점이 바로 ‘일본인의 사고의식에서 역사의식이 결여되어 있다’ 고 생각하는 점입니다. 야마모토 식으로 말하면 ‘일본에는 기독교와 같은 종말론이 없고’ 마루야마 식으로 말하자면 ‘일본인은 세상의 변화를 ‘기세’로밖에 파악하지 않기에 자신의 행위를 먼 장래의 시점에서 돌아보며 역사 속에 위치시키는 감성이 자라지 않습니다.’

 말하고 보니 확실히 종말론 같은 데 빠지는 건 오타쿠 쪽입니다. 그들은 역사를 기저에 두고 자신의 기호를 이야기하지요.  소재의 원 출처元ネタ라든지 인용이라든지 작품 상호 영향 관계라든지 말입니다. 거꾸로 역사가 아닌 ‘영원의 현재’를 산다든지 ‘지금’, ‘이 순간’의 충족감을 추구하고 있는 쪽이 양키일까요.

사이토  오타쿠들 사이에서는 아직 ‘역사를 아는 사람이 존경 받는다’는 면이 있으니까요. 대조적으로 양키의 역사의식의 결여는 정말 문제입니다. 그러니 기합을 운운하고 ‘여기서 기운을 북돋우면 모든 게 이치대로 돌아간다.’ 같은 발상으로 흐르기 쉽습니다. 그야말로 ‘지금, 지금, 지금…’의 연속입니다. 마루야마가 말하는 ‘순서대로 전철을 밟는 기세’ 그 자체입니다. 일본 신화가 그렇듯 기원이 없으면 종말도 없습니다.

 단 양키의 시간의식에 대해서는 조금 생각해 볼 여지가 있습니다. 양키에게는 정신의학에서 말하는 ‘축제 전アンテフェストゥ厶antefestum’ 도 ‘축제 후ポストフェストゥ厶postfestum’ 도 ‘축제 도중イントラフェストゥ厶intrafestum’ 도 아닌 특이한 시간의식이 있다고 사료됩니다. 축제와 축제 사이를 순환하는 시간을 살고 있는, 가칭 interfestum이라 해 두죠. 영원의 개념이 없으니 ‘영겁회귀’ 라곤 못하겠습니다만 계속 ‘축제 사이의 시간’을 산다는 인상입니다. 이 축제祭り엔 실제 축제도 들어가며 관혼상제, 선거, 심지어 천재지변까지도 들어갑니다만 즉 온갖 비일상을 축제처럼 소비하는 촌락사회 중간집단의 시간의식입니다.

요나하  양키는 아마 에도 시대의 농경 사회에 최적화된 기질ethos이라 생각합니다. 민속학자 미야타 노보루宮田登의 가설에 따르면 불교의 미륵彌勒 신앙이란 본래 종말사상이었는데 일본에 들어와 ‘예년과 같은 풍작을 기원하는’ 일상계의 사상으로 변했습니다. 어찌됐든 지금 살고 있는 마을에서 매년 풍작이 반복된다면 그걸로 만족했을 테니 말이지요.

 문제는 근대에 들어서도 그 잔재가 계속되어 원자력 발전처럼 수십 년을 들여 폐로하고 그 폐기물 역시 시간을 들여 처분하는 것과 같은, 초장기적 역사의식이 없이 다룰 수 없는 시설과 공존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원자력 발전 반대 진영도 에도 시대 내지 양키인 채이니 ‘지금 당장 멈춰라’ ‘우리 지역에는 귀찮은 일 떠넘기지 마라’ ‘앞날은 모른다’ 식으로 되는 겁니다.

사이토  오타쿠는 그런 장면에서 행동조차 안 하고 틀어박혀 버리니 양키의 행동주의는 야마모토 타로처럼 되는 것이겠지요.

요나하  양키 취향으로 변모하는 게 역할이었을 터인 인텔리들도 양키 그 자체가 되어 버렸습니다. ‘말이 아니라 행동’ 이라 하며 데모에 뛰어들어 모두에게 둘러싸이는 감각에 그저 만족해버리고 맙니다. 역시 몇 번이고 ‘분리’ 나 절단’을 끊임없이 외치는 게 이 나라의 언론에게 요구되는 역할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이토  일본적인 행동주의는 어째선지 양키주의로 귀결되고 만다, 그것이 문제이군요. 최대의 절단은 ‘공공’ 개념과 병행하여 ‘개인주의’를 재설치하는 것이라고 저는 계속 말해왔습니다만 TPP 도입이나 이민자 수용 같은 ‘아픔’ 없이 어려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다 해도 저는 ‘절단’ 실현을 위해 기합을 빼고 계속 설득하려 합니다.(웃음)


* * * * *


사이토가 지적하는 ‘역사의식 내지 장기적 안목이 없이, 운문과 기세로 점철된 양키’ 는 전반에서 본 반지성주의의 긍정적 전망과 대조되는, ‘지성의 헤게모니가 아닌 지성 자체를 부인하는’ 부정적인 모습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뜻밖에도 바로 이런 면모 때문에 일본은 작금의 한국처럼 극단적인 상황까지 치닫지 않을 수 있었다. 이번 장에서 일본의 반지성주의의 곁가지까지 다소 길게 물고 늘어진 이유는 다음 장에서 ‘어째서 일본에서는 파시즘이 실패했지만 한국에서는 현재진행형인지’ 치열하게 비교하기 위해서이다.

혹자는 이번 장을 읽으며 ‘이것으로 한국인의 정서도 설명할 수 있겠는데?’ 하고 생각할 정도로 기시감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피상적인 모습은 분명 양국 국민이 비슷한 점이 여럿 있다. 그러나 2019년 현재를 기준으로 여러 나라의 석학들이 우려를 표하는 한국의 파시즘적 면모는 보다 세심하게 진단되어야 하는 성질의 것이다. 믿고 싶든, 믿고 싶지 않든 말이다.


참고 문헌


森本あんり 『反知性主義 アメリカが生んだ「熱病」の正体』

斎藤環 『ヤンキー化する日本』

斎藤環 『世界が土曜の夜の夢なら――ヤンキーと精神分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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