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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화
나를 괴롭게 한 당신도 괴로웠군요
당신이 괴로웠다는 사실이 날 괴롭게 한 것의 면죄부가 될 순 없지만
by
여유
Nov 25.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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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당신이 예전만큼 원망스럽지 않습니다.
지나치게 개인적인 이야기를 어디까지 적어도 될까. 그래도 오늘 나의 기분이 적고 싶으니 적어보기로 한다.
여느 딸들이 그렇듯, 나 또한 아빠보다는 엄마와의 관계가 깊은 편이었다.
그래서 내가 가진 엄마에 대한 감정은 참으로 복잡하다. 정말 많이 사랑하지만 그만큼 밉기도 하고, 엄마의 삶이 너무나 불쌍하다가도 그래서 더더욱 엄마로부터 벗어나고 싶기도 했다.
반대로 아빠에 대한 감정은 얄팍하다. 솔직히 말하자면 아는 것이 없다. 그리고 그 얄팍한 감정의 대부분은 '원망'이었다.
'왜 욕심을 부렸어요?'
'왜 가정을 돌보지 않았어요?'
'왜 이렇게 나를 괴롭게 자라게 만들었어요?'
'왜?'
대답을 바라지 않는, 질문을 가장한 원망의 문장들은 어렸을 때부터 차곡차곡 내 안에 쌓여 갔다.
그렇게 쌓인 문장은 아빠가 어떤 행동을 하던지, 어떤 말을 하던지 비뚤어진 창틀로 바라보게 만들었다.
비뚤어진 창틀로 바라본 아빠는, 당신이 아무리 곧게 서려 노력해도 언제나 나에게는 기울어져 보였다.
나의 당돌한(?) 연 끊기로 충격을 받으신 우리 부모님. 결혼생활 약 30년 만에 드디어 부부상담을 받으시게 되셨다.
그리고 그 결과 놀랍게도, 상담사님께서는 이런 말을 하셨다고 한다.
"아버님 상태는 상담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에요. 이건 정신의학과로 가셔야 돼요."
"예약 가능 날짜가 한 달 뒤부터라고요? 너무 늦어요. 일단 병원 가시면, 대기 시간이 좀 많이 필요하긴 하지만 그래도 기다리다 보면 당일 진료받으실 수 있거든요."
"그냥 지금 최대한 빨리 가세요."
-동생에게 들은 얘기를 각색했습니다.-
온 가족이 정신과 진료를 받는 초유의 사태가 일어난 우리 가정. 그중 아빠가 가장 먼저 치료를 시작하게 되었다.
(나머지 가족들은 예약일을 기다리는 중이다.)
하지만 그것으로 인해 약 30년간 우리 가족을 괴롭힌 문제들을 아주 조금이라도 해결할 수 있다면, 안 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한다.
참 감사하다. 우리 가족들이 그래도 진짜 막장 인생들이 아니어서, 다들 그래도 나아지고자 노력을 하는 사람들이어서 정말로 너무나 감사하다.
정신병이 있는 사람은 본인의 정신병을 모르고, 그 주변에 있는 사람이 그 사람 때문에 정신병에 걸려 정신과에 가게 되는 상황은 흔한 이야기다.
그 흔한 이야기가 우리 가족 이야기였을 줄은 몰랐지만 말이다.
엄마의 정신적인 문제는 어렸을 때부터 익히 알고 있었다. 그 문제의 대부분의 원인은 아빠라는 것도 귀에 딱지가 생기도록 들었다.
아빠에게도 어느 정도 문제가 있을 거라고는 예상하고 있었다. 아빠의 언행으로 인해 우리 가족이 너무나 힘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빠가 가진 문제는 내가 생각했던 문제랑은 사뭇 달랐다.
이 이상 자세한 이야기를 적는 것은 아빠의 너무 개인적인 영역인 것 같아 적지는 않으려 한다. 물론 이 글을 보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내가 누군지 모르고, 나의 아빠가 누군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그것이 아빠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한다.
현재 부모님과 연락을 안 하고 있기 때문에 아빠의 정확한 병명과 증상은 알 수 없었지만, 동생을 통해 들은 몇 가지 정보를 인터넷에 검색해 보았다.
그렇게 여러 글들을 찾아서 읽어보았고
그동안의 아빠의 행동이 조금은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살아오면서 아빠와 좋은 기억이 있었냐고 묻는다면 사실 나는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하지만 아빠에게 감사한 기억이 있었냐고 묻는다면 그것은 바로 대답할 수 있는 것들이 많다.
감사하고 원망스러운 나의 아빠.
엄마가 아무리 안 좋은 얘기를 해도, 그래도 아빠는 나의 아빠라서, 나는 아빠를 사랑하고 싶었는데
내가 사랑하는 엄마를 아프게 하는 아빠가 미웠다.
나의 세상(가정)을 위태롭게 만드는 아빠가 미웠다.
나의 마음을 괴롭게 만드는 아빠가 미웠다.
밉고, 밉고, 미워서
원망스러웠다.
하지만 이제는 예전만큼 아빠가 원망스럽지는 않다.
아빠가 엄마를 아프게 했고, 가장으로서의 의무를 다하지 않았고, 그렇게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나를 이렇게 괴롭게 만든 것은 변함없는, 지울 수 없는 사실이지만
그동안 아빠도 괴로웠구나.
그 사실을 알고 나니까,
이유를 알 수 없지만 원망이 조금은 누그러졌다.
온 가족이 정신과 치료를 받는다고 해서 '그렇게 우리 가족은 화목하고 행복하게 변했답니다!' 하는 엔딩은 오지 않을 것이라는 걸 안다. 어쩌면 그저 가족들 개개인이 본인이 지닌 문제와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 최선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과정을 통해서 나만큼 저 사람도 힘들었음을 깨닫고,
사랑하며 살기에도 짧은 인생, 서로를 조금은 덜 원망하며 지낼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이 시간들은 충분히 의미가 있지 않을까.
아직 완벽하게 아빠에 대한 원망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날 위해서 그 원망을 이제 보내주기로 했다.
나는 진심으로 아빠가
행복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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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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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아웃극복기
02
번아웃을 통해 알게 된 무기력과 게으름의 차이점
03
아무리 힘들어도 죽지 않을게
04
나를 괴롭게 한 당신도 괴로웠군요
05
내가 힘들면 힘든 거야~!
06
스트레스성 식욕부진이 나아지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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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힘들어도 죽지 않을게
내가 힘들면 힘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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