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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니 Feb 20. 2024

프롤로그, 한국을 떠나다.

나이 60, 미국 한 달 살기 #1

새벽에 집을 나섰다. 휘영청 밝은 섣달 보름달이 풍선처럼 나무에 걸려 있다. 내내 환한 빛을 비추며 한강물길을 따라오더니 인천대교를 넘을 때까지도 미련을 버리지 못한 헤어진 애인이나 된 듯 줄곧 쫓아왔다.

이제 보름이 지나면 설명절이 시작된다. 설준비에  어머니들의 마음이 조급해질 때다. 수 십 년간 계속된 명절의무에서 벗어난 것이 4-5년 전이었고 이제 명절과 상관없이 마음 편히 여행을 떠난다. 여행이 일상이 되어버려 더 이상 설레거나 흥분되진 않지만 이번 미국여행은 한 달 살기라는 새로운 도전이라 친정집 가는 것처럼 은근한 기쁨이 차오른다.


이번 여행에 동행하지 않는 남편은 공항에 데려다 주기 위해 집을 나설 때부터 폭풍잔소리다. 여권, 운전면허증, 국제운전면허증, 지갑 챙겼냐고 수없이 묻는다. 혼자 보내려니 못내 안심이 되지 않는 건지  본인 없이도 잘 견딜까 봐 우려하는 건지 모르겠다.


남편을 두고 아들 곁으로 살러간다. 내 나이 여자들이 아들에게 올인하지 말라고 질색한다. 아들에게 주는 사랑은 '외로운 짝사랑'이라  넘치는 사랑이 화살로 돌아올 것이 확실한데 왜 가냐고들 하지만 아들을 위해 가는 것이 아니다.  


잠시 다녀가는 여행으로는 그 나라의 날씨도 정확히 잘 모르게된다. 겨울에 이상고온일 때 한국에 온 외국인은 생각보다 겨울이 춥지 않았다고 말할 것이고 혹독한 영하의 날씨에 일주일 정도 다녀갔다면 견딜 수 없이 추웠다고 말할 것이다. 늘 외국에서 관광객보다 거주민으로 두어 달 정도  살아보고 싶었지만  선뜻 실행을 하지 못했다.


그러던 차에 미혼인 아들이 미국발령이 난 바람에 얼른 따라붙었다. 결혼한 아들은 앞으로 동포취급을 해야 서로 원만한 관계를 유지한다고 친구들이 충고한다. 외국에 나가있는 딸을 방문한 부모는 딸의 집에 기거하게 되지만 아들부모는 며느리 눈치 보느라 호텔에 묵는 걸 주위사람들의 많은 사례로 보아왔다. 아들이 장가가면 더 이상 아들 집에서 묵을 일은 없을 것이니 아직 내 피붙이 일 때 붙어있어야 한다. 엄마잔소리가 두려운 아들은 서로 간섭하기 없기, 식사도 따로 하기 등등의 조건을 붙였다.


탑승장 앞에 그렇게 많은 사람을 보기는 처음이다. 이 많은 사람이 저 비행기 안에 다 들어간다고? 의심될 정도였다. 백인, 흑인, 동아시아, 남아시아, 히스패닉 등 미국이 인종의 멜팅팟이라 하더니 비행기가 축소판이다. 점보여객기가 가득 찼다. 델타와 대한항공이 조인트벤처를 하는 바람에 한국을 경유해서 미국으로 들어가는 전 세계 사람들로 애틀랜타 비행 편은 늘 미어터진다.


비행기가 9시 40분 출발했고 기장이 13시간 반이 걸린다고 말하는 기내방송을 어렴풋이 들으며 잠이 들었다. 옆의 외국인 아주머니가 나와 눈이 마주칠 때마다 자꾸 웃으면서 말을 붙이고 싶어 했으나 잠이 쏟아지는 바람에  말 한마디 못했다. 한 달 살기 위해 무엇을 가져가야 하고 무엇을 빼야 하는지 고민하면서 밤을 꼬박 새운 것은 비행기 안에서 숙면을 취하기 위한 빅피처이기도 했다.

덕분에 비행기 안에서 진짜 푹 잤다. 자다가 일어나 세끼 주는 밥을 꼬박 받아먹고 자고 또 자고 영화 한 편 보지 않고 화장실 한번 가지 않고 내내 잘 잤다. 사육당하는 가축이 이런 기분일까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엔딩만 없다면 나쁘지 않을 텐데 잠깐 생각이 들었지만 이내 다시 잠 속으로 깊이 빠져들었다.


하츠필드잭슨 애틀랜타 공항에 내리니 입국심사대에 줄이 길게 서있다. 대답 잘못했다가 세컨더리룸으로 끌려가서 다시 한국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괴담을 많이 들은 터라 귀국목적을 물으면 뭐라 답해야 하나 잠시 고민하고 있었지만 입국심사관은 딱 한마디만 물었다. 비즈니스목적이냐 관광이냐. 관광이라 했더니 지문 찍고 바로 보내주었다.

짐을 찾아 나오니 추적추적 내리는 비와  아들이 동시에 날 기다리고 있다. 집에서 입는 반팔운동복과 떡진 머리의 꼬질한 모습만 보다가 멀끔한 옷차림의 아들을 보니 내 아들이 맞나 싶을 정도로 눈이 번쩍 뜨인다. 집 떠난 지 한 달이 된 아들이 잘 적응하고 있었나 보다. 서울에서 출발할 때 영하 3도였는데 이곳은 17도다. 추울까 봐 스웨터만 잔뜩 가져왔는데 어쩌나.


렌터카 사무실에 가려면 3번 승차장에서 국내선청사까지 가는 셔틀을 타야 한다. 오래 기다린 끝에 셔틀을 타고 10분 정도 이동한 후 짐을 모두 내려서 다시 스카이트레인을 탔다. 트레인을 타고 두 정거장 가서 내리면 렌털 카 서비스 센터가 나온다. 아들이 없었다면 23킬로그램짜리 짐 두 개를 끌고 도저히 움직이지 못했을 테지만 듬직한 아들덕에 잘 옮겼다.'여행과 지도'에서 렌터카를 신청했고 작년에 비해 렌트비가 많이 내려서 안심이 되었다. 작년가격이라면 렌트를 못하고 지하철을 탔을지 모르겠다. 퇴직자는 한 푼에 민감하다.  


난 HERTZ 골드회원이라서  바로 차를 내주었다. 렌터카를 많이 이용해서 골드회원이 되었냐고? 5분의 시간만 들이면 공짜로 바로 가입이 가능하다. 골드회원이면 20% 할인도 되는 데다가 임차계약서를 요구한다거나 하는 여러 과정을 생략할 수 있다. 골드전용 카운터에 가서 내 성을 대니까 나가서 FIVE STAR ZONE에 있는 어떤 차라도 맘에 드는 차를 가지고 나가란다. 이렇게 쉽게? 차 열쇠는 안에 있어서 시동 걸고 운전해서 나가면 된다. 물론 도로에 나서기 직전 요금정산소 같은 곳에서 운전면허증과 국제운전면허증, 여권을 확인하니까 미리 꺼내두어야 하지만 말이다. 두 번째 이용부터는 카운터를 들를 필요도 없이 주차장으로 직행하면 캐노피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다고 한다. 보름간 빌렸으니 보름 후에 캐노피서비스라는 것도 이용해 봐야겠다. 한때 내 차였던 혼다 시빅으로 골랐다. 잔고장이 없어서 좋아했던 차였고 익숙해서 골랐는데 나중에 문제가 생겼다.


아들이 중고차라도 샀다면 무거운 짐을 낑낑 거리며 셔틀 타고 트레인 타고 고생할 필요가 없었겠지만 아들은 장롱면허다. 직장까지는 지하철을 타거나 직장상사의 차를 얻어 타고 다닌다. 별로 차가 필요하지 않아서 아직 구하지 않고 있다. 운전이 서투니 운전할 마음도 별로 없고.


내가 운전할 수밖에 없다. 구글맵을 보고 공항을 빠져나오는데 도로도 넓고 운전하는 기분이 무척 좋다.  10년 전 아들이 대학졸업할 때 같이 미 서부를 자동차 타고 돌아다닌 경험이 나의 세포 어딘가에 남아있었던가. 낯선 나라에서 운전하는 것이 전혀 두렵지 않다. 경험해 봤다는 것이 이렇게 중요하다. 젊은 나이엔 정열이 자산이고 우리 나이엔 경험이 자산이다.


고위층 남편을 둔  친구는 외국에 나가면 현지직원이 나와 맛집이나 좋은 곳에 모시고 다니며 대접받는 사모님 여행을 한다. 그런 여행도 나쁘지 않겠지만 이렇게 직접 운전하며 가고 싶은 곳을 마음껏 휘젓고 다니는 여행을 하면 즐거움을 오감으로 느낄 수 있어 경험이 풍부해진다. 공항에서부터 20분가량 운전해 아들집에 도착했다. 서울에서 운전할 수 있으면 전 세계 어디서든 운전이 가능하다더니 유튜브로 배운 미국교통법규로 60대 아줌마도 충분히 운전이 가능했다. 서울에서 붙인 짐은 아직 도착전이고 집이 휑뎅그렁하다.

아들집에 짐을 풀고 밥을 먹으러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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