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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니 Feb 09. 2024

꽃과 과일이 있다면 살만해진다.

나이 60, 미국 한 달 살기 #4

어디서든 집같이 편안한 기분을 느끼기 위해서 꽃을 산다.

고려인을 취재하러 러시아 볼고그라드에 갔을 때 혼자 아파트를 쓴 적이 있었다. 남자동료들은 차로 5분 거리의 다른 아파트를 얻었고 나만 외따로 떨어진 곳에 현지코디가 방을 얻어주었다. 중세시대 감옥이 이렇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음침한 곳이었다. 건물로 들어가려면 녹슬고 육중한 큰 철문을 통과해야 한다. 간수가 꾸러미로 들고 다닐 것 같은 놋쇠로 만든 열쇠로 철컹 열고 들어가 창문하나 없는 컴컴하고 좁다란 철제계단을 3층까지 올라가야 내 방이 나온다. 아파트 호실의 문들 역시 빛하나 새어 나오지 않는 녹슨 철문이라서 올라가는 도중 누가 나를 끌고 들어가도 소리하나 새어 나오지 않을 것 같았다.  계단에서 누구라도 마주치면 나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겠지만 머무는 동안 사람을 만난 적은 없었다. (더 무서운 거 아닌가). 집상태도 예상과 조금도 벗어나지 않았다. 더러운 소파가 있는 거실이 딸린 원베드룸이었다. 욕실에 더운물이 나오지 않아 진저리를 치면서 샤워를 해야 했고 샤워커튼 너머 칼을 높이 쳐든 남자의 실루엣이 보이는 히치콕의 영화장면이 떠올라 빛의 속도로 샤워를 마쳐야 했다. 자다가 발치 쪽의 침대다리가 꺾어지는 바람에 미끄럼틀이 되어서 45도로 비스듬히 서서 자야 했던 일도 있었다. 취재일정대로 잘 마무리될까를 걱정해야 할 판에 매일 안전을 걱정해야 했다.


 취재를 마치고 집에 들어가기가 두렵던 어느 날 주먹만큼 큰 장미를 파는 꽃가게를 발견하고 장미 3송이를 샀다. 세 송이 장미를 강아지라도 되는 양 품에 안고 집에 돌아와 음료수병에 꽂아두고 보니까 신산스러운 장소가 더 이상 낯설지 않았다. 그때의 위안으로 낯선 장소에 가면 꽃부터 사다 꽂아둔다.


아들이 사는 애틀랜타의 아파트는 볼고그라드의 아파트에 비하면 대궐이다. 1 Bed, 1 Bath 750sqft로 우리나라 25평 정도 되는 면적에 공용수영장과 헬스장도 있고 로비에 공짜커피머신도 있다. 무엇보다 미국 내 9번째로 큰 도시 한복판에 있는 아파트 아닌가. 하지만 총기사건이 심심찮게 터져서 안전에 대한 걱정은 볼고그라드 못지않다.  

도착한 첫날 홀푸드 마켓에서 노란 수선화화분을 하나 사다 창가에 두자 공간이 화사해지면서 내 집 같아졌다. 불안했던 마음이 편안해졌다. 2주일 동안 내내 새로운 꽃을 피우다가 말라버린 후 꽃을 잘라내고 푸른 잎만 남겨두었다. 수선화화분은 더 이상 팔지 않고 이제는 튤립화분을 판다. 또 하나 데려다 놨다.

어떤 일본작가는 만두와 사우나만 있으면 그런대로 살만하다 했는데 나는 꽃과 과일만 있으면 어느 정도 살만해진다.      






유튜브로 짧게 편집된 드라마 좀 보고 있자니 한국에서 로밍해 간 12기가의 데이터를 반 넘어 사용했다고 경고가 뜬다. 이 집에서 입주민에게 제공하는 와이파이는 전자 기기 두 개만 사용할 수 있다. 아들의 폰과 컴퓨터를 와이파이로 연결해야 하니까 나는 와이파이를 사용할 수가 없게 되었다. 아들이 있을 때는 데이터 공유가 가능했는데 회사를 가고 난 후부터 난 데이터난민이 되었다.


1층 관리실에 가서 떠듬떠듬 유료와이파이 연결에 대해 물어봤지만 도와주려는 노력도 하지 않고 단칼에 유료와이파이 연결을 할 수 없다고 말한다. 아니 뭐 여지를 주어야 이것저것 번역기를 돌려서라도 물어보지. 알겠다고 물러나왔다. 저녁때 돌아온 아들에게 며칠 전 메가마트에서 사 온 삼겹살을 구워주며 어떻게든 와이파이문제를 해결하라 했다. 그리고 근처 조지아텍에서 근무하던 연구원이 한국으로 귀국하면서 팔려고 내놓은 이케아 식탁 겸 책상이 조지아텍 중고거래장터에 올라왔던데 그것도 알아보라 했더니만 와이파이 연결이나 중고거래 둘 중 하나만 하겠단다. 이 눔이.

그래서 와이파이 문제만 해결하라 했다. Xfinity라는 회사에 들어가 이것저것 앱을 깔고 하더니 이용료 10달러를 결제한 다음 이용이 가능하게 되었다.

그거라도 한 게 어디야. 자신은 책상이 필요 없단다. 필요하면 엄마가 해결하란다.


구형 컴퓨터 용량밖에 안 되는 머리로 빠르게 돌려봐야 신통찮지만 로밍폰이라도 현지 통화는 가능할 것 같았다. 폰을 열고 SK텔레콤 ‘T전화 앱을 켜자 미국전화번호로 통화와 문자가 가능하다. 판매자에게 바로 문자를 보냈다. 판매자는 180센티미터 정도 되는 큰 테이블인데 짐칸에 실릴지를 걱정한다. 하나 해결하면 또 다른 고민거리가 파도처럼 밀려든다. 첫날 빌렸던 작은 승용차로는 엄두도 못 냈겠지만 고장 나는 바람에 업그레이드 해준 SUV로는 실릴 것 같았다.

 '원했던 것도 아닌데 SUV를 렌트하게 된 건 저 테이블을 가지라는 하늘의 뜻이야. 이미 계획은 시작되었고 난 방법만 찾아내면 돼.'

짐칸을 잴 줄자가 없다. 머리를 한참 굴리다 보면 어떻게든 방법이 떠오른다.  ROSS몰에서 사 온 요가매트가 생각나서 포장지를 확인했더니 딱 72인치다. 182센티정도. 들고나가서 짐칸을 재어보면 되겠다 싶었다. 시대의 흐름에 뒤처지지 않으려고 용을 쓰고 살고 있지만 세월의 물살은 빠르기만 하고 거슬러 오르는 힘은 점점 빠져간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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