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60, 미국에서 한 달 살기 #5
어제 테이블을 팔겠다고 한 이후 연락이 없던 조지아텍 연구원에게서 문자가 왔다. 내일 오후 5시쯤 물건을 가지러 올 수 있느냐고 물어서 아들이 퇴근 전이라서 어렵다고 하자 자신이 차에 싣는 걸 도와주겠단다. 그러마고 약속하고 남아있는 의자도 같이 하나 사기로 했다.
차 뒷좌석을 폴딩 해둬야 가구를 실을 텐데 어떤 방법을 써도 뒷좌석의자가 접히지 않았다. 설명서가 허술하고 눈이 침침해 잘 보이지 않아 속상했다. 젊은 날과 비교해 건강이나 활력이 약해진 건 없지만 눈에 관한 한은 자신감이 뚝 떨어진다.
SUV는 몰아본 적 없어서 어찌해야 하는지 정보가 전혀 없고 폴딩 하는 손잡이로 보이는 걸 아무리 당겨봐야 꿈쩍도 하지 않았다. 뒷 트렁크를 열고 들어가 꼼꼼히 살펴봐도 뭔가 손을 댈만한 부분이 없다. 이렇게 만들어도 차가 굴러가는구나 싶게 엉성하게 만들었는데 찍찍이로 붙여놓은 곳을 떼어보니 바로 기계와 전자부속품이 드러났다. 속살을 본 것처럼 민망해져 얼른 다시 찍찍이를 붙였다. 볼수록 버튼하나로 쉽게 폴딩 되는 차가 아닌 것 같았다. 폴딩장치는 고급옵션사양이라 돈을 더 내야 장착할 수 있는 차로 보였다. 혹시 드라이버로 나사 같은 걸 풀어야 하나? 한참을 트렁크 속에 앉아 머리를 굴리다가 번뜩 떠오른 기막힌 생각.
유튜브에 2023 NISSAN ROUGE로 검색을 해봤다. 어떤 미국인유튜버가 차 소개를 하며 헤드램프가 어떻고 깜빡이는 무슨 색깔이고 어쩌고 저쩌고 하길래 뒤로 한참 돌려 트렁크를 확장하는 방법을 찾아봤다. 아르키메데스가 '유레카' 소리치듯 '아싸' 소리가 저절로 나왔다. 이제까지 내가 씨름했던 그 손잡이가 정답이었다. 무슨 방법을 써도 안되었는데.
정답을 알고 손잡이를 당겨보아도 되지 않았다. 이거 망가지는 거 아냐 싶을 정도로 세게 당겼더니 그제야 좌석이 고개를 푹 숙인다. 너무 기쁘기도 했고 허망하기도 했다. 내 힘에 대해 과하게 평가를 한 것이었다. 내가 힘을 더 주면 망가질 것 같았지만 어림도 없었다. 훨씬 훨씬 더 세게 당겨야 했던 거다.
젊은 사람들이 듣기에는 실소를 금치 못할 에피소드지만 나에게는 응전과 도전의 연속이다.
땅바닥으로 자신감이 뚝 떨어져 한숨만 내쉬고 있다가 감사의 기도를 올리며 다시 회복하기를 반복한다.
큰 문제 하나를 해결해 놓고 가까운 월마트로 향했다. 구글맵이 가르쳐 준 대로 갔더니 근처 여러 몰들이 있는데 월마트만 없다. 계속 뱅뱅 돌다가 너무 배가 고파서 Kroger 마트에서 식료품과 도시락을 사서 먹고 기운을 차린 다음 월마트를 다시 구글로 검색하니 이런!!! 그제제야
‘폐업한 장소일 수도 있습니다’. 이런다. 진작 이리 말했다면 헤맬 일도 없었을 텐데. 석 달 전에 폐업했는데 여전히 구글지도에는 나온다고 시정해 달라는 댓글이 있음에도 바뀌지 않고 이렇게 사람을 낚고 있다. ‘미국여행하기’가 맛있는 것 먹고 경치를 즐기고 호텔에서 묵는 경험이라면 차원이 다른 경험인 ‘미국에서 한 달 살기’는 난이도가 업그레이드된 일상이다.
직장 생활할 때도 일이 꼬였다 풀어지기를 지금처럼 반복했고 꼬일 때마다 내가 운이 없다고 한탄하고 절망했다. 헤맬 수 있고 넘어질 수 있다. 구덩이에 빠질 수 있다.
정신 차리고 일어나 헤쳐 나오면 된다. 그러면서 경험이 쌓이고 또다시 그런 일을 겪었을 때 쉽게 극복한다. 고비를 겪을수록 단단해지는 이치다. 불운이 행운으로 바뀌는 순간도 있다. 첫날 시빅이 고장 난 것은 불운이었지만 SUV로 업그레이드하지 않았다면 미국생활에 필요한 가구들을 실어오지 못해서 좋은 물건을 놓치거나 훨씬 비싸게 운송비를 지불했을 것이다.
무엇보다 유튜브라는 보물창고가 우리 곁에 있어서 문제해결이 한결 수월해졌다. 홍익인간사상으로 무장한 전문가들이 자신이 아는 지식들을 아낌없이 털어놓는다.
그동안은 별로 음식찌꺼기를 버릴 일이 없어서 몰랐는데 싱크대에 디스포저가 설치되어 있었다. 우리나라가정에서도 많이 사용하다가 수질오염의 우려 때문에 지금은 거의 사용하지 않지만 미국주방에는 대부분 있는, 음식물쓰레기를 갈아서 하수도로 흘려보내는 전자기구다.
싱크대 아래 수납장을 열고 샅샅이 찾아봐도 작동스위치가 보이지 않았다. 재택근무하던 아들이 와 싱크대아래 부착된 제품명을 찍어서 나에게 보내주고는 자신은 일해야 한다며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제품명 Whirlaway 191 garbage disposal.
유 선생께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고치는 법, 부속품 갈아 끼우는 법을 알리는 영상 속에 수리를 마무리한 후 작동하는 방법이 나왔다. 싱크대 아래가 아니라 옆에 있는, 전등스위치와 똑같이 생긴 스위치가 디스포저 작동스위치였다. 집을 지을 때부터 벽안에 전선을 매입했을 거라는 생각을 못했으니 찾기가 힘들었다.
이런 사소한 것들로 매일 머리를 쓰고 있어서 4월 총선은 어찌 될지 , 반도체 기업의 주가는 어떨지, 앞으로 남은 생을 어찌 살아야 죽을 때 후회하지 않을지 이런 고민들이 말짱 사라졌다.
여러 가지 이슈로 시끄러운 단톡방도 열어보지 않아 마음 부대낄 일이 없고 감정소모도 줄어들었다.
불필요한 관계와 고민에서 떨어져 나와 매일의 해답을 찾는 것에 집중하다 보면 퍼즐 맞추기나 보물 찾기를 하는 것처럼 단순한 기쁨을 얻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