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60, 미국 한 달 살기 #3
밤새 부는 바람에 잠을 설쳤다. 위이잉~ 휘이잉 회오리를 그리며 뭉쳤다 흩어지는 바람이 눈에 보이듯 생생하다. 국어시간 배웠던 '청각의 시각화'라는 표현이 이런 것이었구나.
경찰사이렌 소리 역시 끊임없이 창을 두드린다. 우리나라 고속도로변에 세워둔 마네킹경찰처럼 예방효과를 노리고 저렇게 사이렌소리를 울리며 다니는 걸까. 아침에 일어나 한국일보 애틀랜타 온라인기사를 보니 둘루쓰라는 한인들 밀집 지역에서 총기사고가 일어나 17세 소년이 죽었단다. 무서운 동네에 와있다.
아침식사를 거르는 습관은 30년 전부터 유지되고 있는데 오늘 아침에 왜 이렇게 배가 고픈지 모르겠다. 토요일에 쉬지도 못하고 엄마 마중 나오느라 피곤했던 아들은 휴일인 오늘 아침 깊이 잠들어있고 먹을 거라곤 냉장고에 냉동피자뿐. 오븐은 있지만 오븐 안에 철판이 없다. 김치와 명란젓은 있지만 밥이 없다. 햇반이 있다 해도 전자레인지가 없다. 있는 건 몇 개 안 되고 없는 건 수도 없이 많다. 없는 것에 익숙해지기 위해 떠나온 여행임에도 배가 고픈 건 어쩔 수가 없다. 어제저녁 홀푸드마켓에 들렀을 때 빵이라도 사 올걸. 아들이 동네 푸드마켓 비싸다고 내일 다른 마켓 가자는 바람에 커피와 물, 꽃화분만 사가지고 나왔더니 후회가 막심하다.
아들은 아직 소셜시큐리티 넘버를 받지 못해 통장으로 월급이 들어오지 않아 한국에서 가져온 돈을 다 쓰고 빈털터리가 되었는지 비싸다는 말만 수 백번을 한다.
배고픔을 참다 참다 아들을 깨워서 엄마 배고프다 했더니 벌떡 일어나 피자라도 사 올까요 한다. 뭔가 거꾸로 된 것 같아 마음이 쓰였다. 결코 자식에게 의존하는 엄마가 아닌데. 일단 나가보자 했다. 한인들 마켓이 많다고 하는 둘루쓰지역으로 가기로 하고 집을 나섰다.
한인마트 여러 개 중 아씨플라자가 가장 가까운 곳에 있어서 그곳부터 들렀는데 아무리 찾아도 간판이 보이질 않는다. 뭔가 잘못 찾아간 듯하다. 일단 배가 고픈 우리는 눈앞에 보이는 해산물 뷔페에 들어가 주린 배를 채웠다. 슈퍼히바치 뷔페.
히바치라는 말은 화로라는 뜻의 일본어로 이 표현이 미국으로 넘어오면서 철판요리를 통칭하는 말로 굳어졌다. 재료를 담아서 요리사에게 갖다 주면 철판에 볶아서 내어준다. 샤부샤부를 즉석에서 만들어주는 코너도 있다. 애틀랜타가 내륙이라 해산물값이 비쌀 텐데도 큰 새우, 작은 새우, 칵테일새우, 흰 다리새우, 타이거새우 등 각종 새우가 요리방법도 다채롭게 가득가득 담겨있다. 매콤한 양념을 넣어 튀긴 소프트쉘크랩도 맛있고 고기요리도 종류별로 푸짐하고 야채도 신선했으며 디저트로 준비된 체리, 멜론, 파인애플도 달고 맛있었다. 어제 푸드코트에서 먹은 짜디 짠 닭고기 튀김이 12불이었던 것과 비교해 보면 이곳은 1인분에 세금포함 18불 정도니 아주 가성비가 좋다. 중국인 여종업원 둘이 팁을 남긴 계산서를 확인한 후 불만인 듯 한 표정을 짓는다. 뷔페식당이라 15% 정도 줬는데. 나중에 확인한 구글 식당 리뷰에 의하면 노골적으로 팁을 요구한단다. 그러거나 말거나 배불리 먹은 우리 모자는 일주일에 한 번은 여길 오자 했다.
누가 봐도 베트남마트로 보이는 시티파머스마켓에 시장조사차 들렀다. 한국식 재료도 팔고 있었지만 애틀랜타 한국일간지에 올라오는 한인마트의 세일정보와 비교해 보면 무척 비쌌다. 한쪽에 가설무대가 만들어져 지독하게 노래 못하는 가수가 사람들 모아놓고 우리나라 장날처럼 흥을 돋우고 있다. 작년에 갔던 베트남에서도 설에 노란 꽃으로 장식을 하는 풍습에 따라 시장에서 꽃을 잔뜩 팔고 있었다. 돈 많이 벌라는 덕담을 나누듯 베트남사람들은 황금을 의미하는 노란색 꽃을 집에 장식하고 서로 선물로 주고받는다. 이곳 마트에도 설을 앞두고 노란 국화를 잔뜩 팔고 있다. 설에 먹을 것보다 꽃을 주고받는 베트남의 풍습이 아주 마음에 든다. 노란 꽃이 황금의 메타포라 하더라도.
메가마트라는 한인마트로 향했다. 서울에 있는 마트에 들어온 듯 한국식품들로만 가득 차 있는 곳이다. 종업원도 한국아줌마. 고객들도 다들 한국사람뿐이다. 햇반과 라면, 파와 달걀, 매운 고추, 삼겹살과 생활용품을 샀다. 한국에서 5천 원이 넘는 파 한 단을 사두고 먹지 않고 떠나와서 그런가 이곳에 와서 당장 필요도 없는 파부터 샀다. 벌써부터 칼칼한 맛이 그리워 청양고추를 찾았지만 그건 없고 파란색 베트남 고추만 있어서 바구니에 담았다. 한국에서 보낸 짐이 도착하고 좀 더 지내봐야 꼭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을 테니 대충 장을 봤다.
피곤기 가득한 아들을 집에 내려주고 나 혼자 이케아에 가려 했으나 아들이 혼자 못 보내겠다면서 따라왔다. 이케아 가구가 한국보다 대체로 2배는 비싼 것 같다. 사고 싶은 테이블이 한국사이트에선 13만 원이지만 이곳에서는 180달러, 세금포함 25만 원정도다. 아들회사에서 이삿짐을 항공으로 보내준다 해서 아들이 사용하던 매트리스를 보냈는데 그때 한국 이케아에서 필요한 가구를 사놓았다가 같이 부쳤으면 좋았을 텐데 싶었다. 아들은 어차피 일 년 있다 갈 것이고 가구가 전혀 필요 없다고 말하지만 난 창가에서 책을 읽거나 노트북을 놓을만한 책상이 있으면 좋겠다. 집이 너무 어두워 조명등도 필요하고 식탁도 있어야겠고 소파도 있으면 편하겠고 공간을 아늑하게 할 러그도 있으면 좋겠지만 딱 한 가지만 가져야 한다면 난 책상이다.
오후 6시 어스름 무렵 한국보다 기온은 분명 5-6도가량 더 높은데 비도 오락가락하고 으슬으슬해서 영 기분이 좋지 않다. 아들은 피곤한지 쓰러져 누웠고 인터넷이 연결이 되지 않아서 아무것도 못하고 있다. 조명이 어두워 책도 못 읽고 컴퓨터도 못하니 할 것이 없어 멍하니 앉았다.
건너다 보이는 건물이 우리 집보다 최근에 지어졌고 비싸 보이는 레지던스인데 커튼을 치지 않아서 서로 훤하게 들여다 보인다. 어떤 남자가 샤워를 하고 나와서는 덜렁덜렁 온몸을 다 드러낸 채 물기를 닦아내고 있다. 한국에서라면 깜짝 놀랐겠지만 그것조차도 심드렁하게 바라본다.
책도 보지 못하고 폰도 볼 수 없다면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다. 황반변성으로 앞이 보이지 않게 된 엄마의 막막한 노년을 떠올려 본다.
이래저래 스산하던 저녁 무렵이 다시 밝아진 건 아들이 잠에서 깨어난 후부터다.
자식은 항상 부모에게 빛이다.
아들의 데이터를 공유하는 방식으로 와이파이연결은 되었으나 내일 아들이 출근하고 나면 다시 와이파이는 되지 않고 막막해진다. 데이터를 사용하지 않고 영상을 보려면 미리 다운로드해 두면 된다 싶어 유튜브 영어 배우기 영상을 다운로드하려 하니 프리미엄기간이 끝났다고 다운로드가 되지 않는다. 어제부터 유튜브 측에서 광고 없이 보는 프리미엄가격을 급격하게 올리는 바람에 더 이상 프리미엄 이용하지 않기로 결심하자마자 이런 일이 생겨버렸다. 할 수 없이 프리미엄을 다시 신청하려니까 미국에서 신청하면 15달러. 한국보다 더 비싼 가격이다. 에효 뭐 이렇게 하는 일마다 막히냐. 할 수 없이 울며 겨자 먹기로 신청을 했다. 아끼려다 더 비싸게 이용하게 된 꼴이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