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도의 일상과 비일상, 비상
졸업을 3학기 남기고 나는 여의도로 갔다. 마침 휴학생을 찾는다며, 선배가 아르바이트 자리를 소개했다. 연구보조원은 취업 준비를 하면서도 경험을 쌓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연구원은 여의도 역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오래된 흰 건물 안은 어둑했고 엘리베이터는 움직일 때마다 둔탁한 소리가 났다. 연구위원들의 방은 복도를 따라 이어졌는데 문 밖으로 아무 소리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테라조 바닥에선 차가운 냉기가 올라왔다.
두어 달 동안 나는 설문지를 들고 서울 곳곳의 연구 대상자들을 만나 면접조사를 했다. 그리고 연구원으로 돌아와 응답 결과를 입력하는 일을 반복했다. 대개 오후 6시 전에 일을 마쳤지만, 어쩌다 시간을 넘기면 만원 지하철을 각오해야 했다. 퇴근 시간이면 직장인들은 밀물처럼 지하철역으로 들이쳤다.
반대로 직장인들이 썰물처럼 건물 사이로 스며들면 여의도는 대체로 나른했다. 오후 거리엔 행인이 드물었다. 나는 저 많은 건물 어딘가에 내 책상이 있을지 알고 싶었다. 2000년 가을이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들어간 첫 직장은 종로에 있었다. 미로 같은 골목에서 오래된 식당을 찾아가는 데 익숙해질 무렵, 회사가 경영난에 휘청였다. 월급이 밀리기 시작했고 나는 다시 취업 전선으로 돌아갔다. 직장이 어디에 있느냐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었다. 어딘가를 동경하는 것도 사치였다.
다시 기자가 되기 위해 신문, 방송, 통신사에 가리지 않고 지원했다. 당시 언론사들은 주로 도심과 여의도 일대에 있었다. 도심에 있는 경제지 사주들은 내게 관심이 없어 보였다. 여의도 증권가 한복판에 있는 경제 통신사엔 채용됐지만, 가지 않았다. 서여의도에는 세계 최대 규모의 신도 수를 자랑하는 대형 교회와 그 교회가 설립한 신문사가 인접해 있다. 면접을 대기하는 동안 인사 담당자는 ‘저희는 하나님께서 월급을 내려주신다’고 농반진반의 말로 긴장을 풀어줬지만 나는 낙방했다.
방송사들은 여의도 공원을 가운데 두고 대각선으로 마주하고 있었다. 지상파 방송사들은 최종 합격자가 경쟁사로 이탈하는 걸 막기 위해 신입 공채 최종 면접을 관행적으로 같은 날 치렀다. 두 곳 모두 최종 면접에 오른 지원자들은 당일 어느 곳으로 가야 할지 고심해야 했지만, 나는 동쪽 방송사는 1차 면접에서 떨어진 상태였다. 선택의 여지없이 서여의도로 향했고 마지막 관문을 통과했다. 여의도 직장 생활의 시작이었다.
... 그게 벌써 20년 전이라니!
서여의도는 여의도에서도 유독 변화가 느린 곳이다. 1975년 준공된 국회의사당은 올해 쉰 살이 되었고, 이듬해 남산에서 이전한 KBS는 여의도 업무지구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 중 하나다. 시간이 느리게 흘러가는 쪽에서는 여의도 공원 건너 편의 변화가 더 극적으로 보인다. 휴학생 시절 내 책상이 어디 있을지 공상하며 오가던 한국노총 회관은 일찌감치 재건축됐다. 면접을 봤던 언론사 중 상당수는 여의도를 떠났고, 방송사가 떠난 자리엔 주상복합이 들어섰다. 부도로 방치된 흉물이었던 파크원은 어느새 MZ의 성지로 탈바꿈했다.
여의도는 섬이지만, 흘러가는 강물을 보며 윤슬의 낭만을 즐길 여유는 직장인에게 없다. 콘크리트 둔치로 둘러싸인 이 섬에서 흐름을 느끼게 하는 건 사람들의 이동이다. 벚꽃이 흐드러진 봄이면 국회 뒤편 윤중로를 따라 상춘객들이 흘러든다. 하지만 직장인들은 매년 보는 벚꽃에 별 감흥이 일지 않는다. 그보다 직장인들은 여의도 공원에 점심시간마다 반시계 방향으로 회전하는 타원의 동선을 그린다. 반시계 방향은 직장인들의 암묵적인 약속이다. 그렇지 않으면 마주 오는 회사 사람들을 끝없이 맞닥뜨리는 사태가 빚어진다. 여름에는 피크닉을 즐기거나 치맥을 하는 젊은이들이 한강 공원을 차지하기 시작한다. 서울세계불꽃축제가 열리는 가을날에는 인파에 휩쓸리지 않으려면 강변 근처는 얼씬대지 않는 게 상책이다.
계절마다 찾아오는 행락 인파에 더해, 여의도에는 태풍 같은 인파가 들이닥치기도 한다. 대개 국회에 입법을 요구하는 이해 집단의 대규모 집회다. 이들은 상임위나 본회의 개회 직전 전국에서 버스를 대절해 올라오기도 하고, 한강다리를 걸어 여의도로 행진하며 세를 과시하기도 한다. 주기적이든 일회성이든 여의도 직장인들은 인파를 헤치고 자신의 일상을 살아간다. 더욱이 집회 취재 경험이 많은 기자들은 소음을 견디며 일하거나 인파를 거슬러 이동하는데 익숙하다. 감정의 동요 없이 분주하게 인파를 통과한다.
그런데 지난해 12월은 그렇지 못했다. 국회대로와 의사당대로를 메운 인파를 거슬러 출퇴근하며, 동료들은 모종의 불편한 감정을 느꼈다고 했다. 사람들의 흐름과 거슬러 나아가는 감각이 낯설고 어색했다고 했다. 그렇다고 선뜻 발길이 국회로 가는 것도 아니었다. 나는 당시 경기도 담당이라 본사로 출퇴근하지 않았지만, 집에서 여의도는 마음이 동하면 퇴근 후나 주말에도 쉽게 가는 거리다. 하지만 8년 전과는 달리, 우리는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통과되는 순간을 국회 앞에서 함께 하지 않았다.
우리를 당혹스럽게 만든 이 생경함과 주저함의 정체는 무엇일까. 국회를 향한 인파는 국회대로와 의사당대로를 삼키고 여의도 공원까지 흘러넘쳤다. 범람하듯 일렁이는 인파에 여의도의 무감한 일상은 떠내려갔다. 비일상적인 광경이 펼쳐졌지만 그것을 일탈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오히려 비상 상황은 그 장소의 맥락을 일깨웠다. 나와 상관없는 일이라고 외면해 버릴 수도, 시간이 지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잊힐 거라고 제쳐둘 수도 없는 일이, 필연적으로 그곳이라서 벌어진 일들이 전개되고 있었다.
12월 7일, 윤석열 대통령의 1차 탄핵소추안이 국회 본회의에 상정된 날이었다. 중계 화면을 보던 나는 휴대폰을 켜고 마음속에 떠오른 의문을 적기 시작했다.
국회는 정말 여의도를 떠나도 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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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단 사진 Ⓒ서울연구데이터서비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