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에 항상 5~6시쯤 하는 만화 영화를 보고, 잠이 많음에도 일요일 아침에 하는 디즈니 만화 동산을 보기 위해 눈을 비비고 일어났던 저는 조금 더 자라서 만화책을 보게 되었습니다. 워낙 만화를 좋아하고 화면보다는 내가 읽는 속도를 조절할 수 있는 책을 더 좋아했기 때문에 중고등학교 시절 읽은 만화책은 엄청나게 많았다고 자부합니다. 당시 유행하던 대여점에서 주로 빌려서 봤었는데, 대부분의 만화 소비자들이 만화책을 사지 않고 빌려봄으로 해서 만화가들이 어렵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그 많은 만화책을 사서 보기에는 너무 돈이 많이 들었고, 합법적으로 책을 빌릴 수 있는 도서관이 존재한다는 점에서 나름 합리화를 하며 만화를 보고자 하는 저의 욕망을 채우고 있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만화 업계의 문제를 해결한 것은 무료 만화, 웹툰의 시대가 오면서입니다. 당시 만화계는 대여점보다 스캔본이라는 더 큰 문제에 처해 있었습니다.
몇 년 사이에 만화계는 웹툰이 대세가 돼버린 것 같습니다. 많은 규제와 대여점 때문에 만화 업계가 어려웠던 것을 알고 있고, 이후에 스캔본 만화가 퍼지면서 차라리 대여점을 가라고 할 정도로 더 어려워진 만화계에 좋은 해결책이 된 것이라고 개인적으로 평가합니다. 만화책을 발매하던 때에는 만화가가 되기 위해서는 엄격한 심사를 통과해야 했고 어느 이상 인기를 얻지 못하면 발매를 하지 못하였지만, 웹툰의 시대에는 누구나 그릴 수 있고 독자들이 좋아하기만 한다면 누구라도 만화가가 될 수 있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객관적으로 수준이 너무 낮은 작품들이 많다고 비판할 수도 있지만, 훨씬 다양하고 참신한 소재와 표현 방식의 작품이 많아진 것은 부인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많은 웹툰을 보아왔지만 저에게 원탑은 기성 작가인 양영순이 그린 덴마입니다. 이미 누들누드, 아색기가로 독특한 야한 장르 만화에 압도적인 선구자인 그는 이미 덴마 세계관과 비슷한 만화를 그리다가 감당을 하지 못하고 연재 중단을 한 적이 있습니다. 절치부심하여 연재한 작품인 덴마는 10여 년을 연재하여 완결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잦은 지각 연재와 연재 중단, 그리고 그간의 찬사를 모두 묻어버리는 졸속 마무리 등 정말 아쉬움이 많은 만화이지만, 그럼에도 원탑 웹툰인 이유가 있습니다.
우선 덴마 하면 빠질 수 없는 차원이 다른 반전이 있습니다. 에피소드를 보다 보면 반전에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고, 항상 예상치 못하게 앞서 나온 많은 복선과 맞아떨어지며 환상적인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해 준 것이 여러 번입니다. 덴마의 마무리를 많은 사람들이 비난한 것은, 이렇게 점점 올라가는 재미와 반전이 합쳐져서 마지막에 모든 떡밥을 회수하며 아무도 예상 못한 결말을 지을 것이라는 기대감이 있었는데, 이를 무참히 짓밟아버린 배신감이 컷을 것입니다. 사실 유명한 일본 만화 중에도 인기가 있어서 무리하게 연재를 늘리다가 이상한 결말을 맞았음에도 명작으로 인정받는 작품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덴마는 특히 떡밥과 복선이 엄청난 작품이기에 이런 결말을 받아들이기는 힘들었습니다.
헌터X헌터는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계속 확장되는 세계관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덴마의 세계관은 클레이 모어나 헌터X헌터 같은 만화와 비슷하게 점점 범위를 넓혀가며 어마어마한 세계관으로 확장되는 스타일입니다. 미래의 우주 택배 업체에서 일하는 특수 능력을 가진 배달원들의 이야기에서 시작하여 점점 세계관이 커지게 되며, 이에 맞게 한 챕터의 분량도 점점 많아지게 됩니다. 전 우주 규모의 스토리가 나옴에도 그 중심에는 택배회사의 하찮아 보이는 퀑(QUANX, 우주의 오류로 특수 능력을 가지게 된 사람) 한 명이 자리 잡고 있다는 면에서, 양영순 작가의 뛰어난 구성력을 볼 수 있습니다.
미묘한 선의 변화로 감정을 나타낸 컷입니다.매우 심플한 선으로 아주 디테일한 심리를 나타내고 컷을 배치하는 연출 또한 백미입니다. 이런 건 요즘 잘 나가는 웹툰 작가들에게서도 보기 힘듭니다. 그림을 매우 잘 그리는 작가들이 많지만, 이런 그림은 수많은 연습과 실전을 통해서 경지에 이르러야만 가능한 것 같습니다. 95년 데뷔하여 20년 넘게 그림을 그려온 양영순이기에 가능하다 생각하고, 그동안 불성실한 연재로 많은 비난을 받아오기도 했지만 계속 노력하고 작업해왔다는 것을 이러한 완성도에서 볼 수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덴마의 세계관은 많은 과학적 지식과 현대 철학이 들어 있습니다. 지대넓얕 방송 초기에 양영순 작가가 지대넓얕 팬이라는 언급이 나옵니다. 그리고 제가 받은 영향과 마찬가지로 덴마에는 지대넓얕에 나오는 다양한 지식을 기반으로 하는 내용이 많이 나오게 됩니다. 인공지능의 발달, 다중 우주 등 많은 지식들이 결합하여 21세기 스페이스 오디세이 라 불릴만한 대작이 탄생할 뻔했다고 생각합니다. 누차 이야기되는 아쉬운 마무리만 아니었다면.
천재의 아이콘 모차르트는 수많은 히트곡을 남겼습니다. 영화 아마데우스를 보면 그는 그냥 발로 곡을 써도 히트를 치는 말 그대로 천재로 등장합니다. 하지만 대학시절 교양으로 음악 감상을 들으면서 모차르트가 엄청나게 많은 곡을 썼으며, 그중에 일부가 대박이 났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재능이 뛰어났기에 많은 곡을 쓸 수 있었고, 그럼에도 많은 실패를 경험했으며, 일부가 대작으로 남게 된 것입니다. 누들누드 같은 새로운 장르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양영순 작가 역시 늘 재미있는 작품을 만드는 재능이 있지만 게을러서 지각 연재를 하는 듯한 모습이 보이지만 실제로는 끊임없이 고민하고 작품을 그려왔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브런치에 글을 쓰기 전까지 저는 거의 글을 써본 적이 없었습니다. 초등학교 때 일기 쓰는 게 너무 싫어서 정말 무미건조하게 형식적인 일기를 썼었고, 디시 인사이드를 그렇게 많이 눈팅하면서도 댓글조차 한번 남긴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다 갑자기 글을 써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습작을 시작하였습니다. 보통 직장인과 비교해보아도 상대적으로 업무량이 많은 편이다 보니 많이 쓰지는 못하지만 꾸준히 쓰려고 마음을 먹고 있습니다. 턱없이 부족한 시간일 수도 있지만, 일주일에 적은 시간이라도 들여서 계속 글을 쓰다 보면 어느 날 덴마 같은 대작을 쓸 수 있는 날이 올 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가져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