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으로의 초대
일상으로의 초대는 그때그때 생각을 적어보는 글입니다. 특별한 체계도 없고 형식도 없고 발행 주기도 없습니다. 분량도 제멋대로이고 다소 완성도가 떨어질 수 있지만, 정돈되지 않았더라도 날것의 저를 표현해 보고 싶은 마음에 시작해봅니다.
뉴스를 보면 어떤 사건이 일어났을 때 "이에 전문가는.."이라는 내용을 많이 보게 됩니다. 전문가의 말이 첨가되면 신뢰성이 올라가게 되죠. 물론 가끔 부동산 전문가, 코인 전문가가 등장하는 것을 보면 무슨 기준으로 전문가라 하는지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 최근 HDC 붕괴사고를 안타깝게 지켜보다 저도 관련 업계 전문가라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제목을 한번 써보았습니다.
사실 저는 해외 사업만 해오다 보니 중대재해 처벌법에 대해 잘 알지 못하고 관심도 없다가 작년 말 즈음에 온라인 교육을 들으라고 해서 들은 정도의 지식밖에 없습니다. 회사에서는 매년 컴플라이언스, 부정 방지 등등의 교육을 실시하기에, 뭔가 하나 더 늘었다는 정도밖에 인식하지 못하였는데, 신설된 교육임에도 대수롭지 않게 넘긴 이유는 너무 당연한 이야기를 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런 기준이 원래 없었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가끔 길을 걷다 리모델링 중이거나 건물을 짓는 현장을 지나가다 보면 경악할 때가 많았습니다. 해외 현장에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 벌어지기 때문입니다. 안전 장비를 제대로 안차고 다니는 사람은 수시로 볼 수 있고, 하네스를 걸고 고소 작업을 하는 사람을 보기 힘들며, 고소 작업을 할 때 아래에 바리케이드를 치지 않고 작업하는 것은 당연해 보입니다. 해외에서는 바로 지적이 나오게 되고 상황에 따라 전체 작업 중지가 될 만큼 중대한 위반행위이다 보니 익숙지 않은 저로서는 늘 놀라운 광경이었습니다. 이런 광경을 떠올려보면 정말 국내에 안전 관련 법규가 허술하겠다 싶기도 합니다.
보통 해외현장은 하인리히의 법칙에 따라 Near Miss, First Aid 등과 같이 사고의 등급을 나눠서 관리하고 있습니다. 현장에 따라 조금씩 다르지만 보통 작업자가 치료를 받아 당일 복귀할 수 없는 정도의 부상을 입으면 당장 전 현장 작업 중지는 물론이고, 추후에 조사 및 재발방지 대책 등으로 프로젝트 인원은 최소 한 달 이상 고통받게 됩니다. 안전 인력은 노동자 수에 비례에서 충원해야 하기 때문에 많을 뿐만 아니라, 작업 시작 전에 Work Permit을 받아야 하고, 현장의 전 직원은 의무적으로 안전 지적 사항을 입력해야 하는 등 크고 작은 시스템과 제도도 상당히 많습니다.
사실 늘 공기에 쫓기는 입장에서 이러한 과도한 안전 제도가 달갑지 않은 것이 사실입니다. 모든 제도가 효과가 있는지도 모르겠고, 실제로 비효율도 많이 증가시킵니다. 해외 작업자들의 생산성은 한국 대비하여 극도로 낮은 이유 중에는 강한 안전 규정이 꼽히기도 합니다. 효율을 강조하고 원가 절감에 목을 매는 한국 회사에서 비효율적인 안전 규정을 충실히 따를 수밖에 없는 것은 발주처가 그렇게 요구하고 있고, 사고가 날 경우 큰 책임이 돌아오기 때문입니다.
안전 제도가 비효율적이라고 투덜대도 따를 수밖에 없는 이유는 수치로 드러나는 결과 때문입니다. 십여 년의 기간 동안에 회사 전체에서 발생한 큰 사고는 손에 꼽히고, 사망 사고는 한두건 정도만 기억이 날 정도입니다. 현장에서 체감하기는 늘 발목을 잡는 것 같고, 효과도 없는 것 같은 제도로 느껴지지만, 결과적으로 나타나는 효과를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국내 사고 사례들과 비교해보면 이는 더욱 분명해집니다.
중대재해 처벌법 논란을 보면 여러 가지 포인트가 있는 것처럼 위장하고 있지만 핵심은 오너를 처벌할 수 있다는 것에서 불거지는 것 같습니다. 기업을 책임지기 위해 많은 돈을 받고 많은 사람을 부릴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 처벌의 책임에서 지금까지 회피되어왔다는 사실에 오히려 놀랐습니다. 오너의 책임이 없는데 어떤 오너가 비용이 많이 들고 비효율이 증가하는 안전에 투자를 할지도 의문입니다.
제가 전문가인 척했지만, 국내 현업 사정을 모르는 제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도 있을 것입니다. 국내에서 일하시는 분들께 이런 이야기를 하면 일머리도 모르는 무식한 소리라고 할지도 모르니까요. 실제로 국내 프로젝트만 하시던 분이 해외 프로젝트를 처음 하시면서 발주처 측에서 주기적으로 Evacuation Drill을 해야 한다고 하자 "내 30년 동안 그런 걸 해본 적이 없다"라고 말했습니다. 발주처는 "내 30년 동안 그런 걸 안 해본 적이 없다"라고 답하였고요. 이렇게 생각의 프레임이 다를 수도 있고, 제가 잘 안다고 생각했지만 제가 모르는 사항이 있을 수도 있기 때문에 많은 토론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아 보입니다. 기업으로부터 광고를 유치해야 하는 기자들은 연일 CEO를 걱정하는 기사를 만들어냅니다. 댓글에도 이런 환경에서 누가 건설사 CEO를 하겠냐는 글도 심심찮게 보입니다. 이런 식이면 건설사들이 해외로 옮길지도 모른다는 쓸데없는 걱정도 기업 관련 이슈의 단골 댓글입니다. HDC의 재해는 안전보다는 품질 문제라고 볼 수 있는데, 심지어 중국 노동자를 데려와서 이 사태가 발생했다는 댓글도 있습니다. 모두가 각자 자신의 프레임에 맞춰서 마음대로 상상하고 해석합니다. 하지만 누구도 알려고 하지 않고, 토론에 귀 기울이지 않습니다. 영화 돈 룩 업(Don't Look Up)은 이러한 패턴을 잘 보여주죠.
사실 저는 업계에 있기는 하지만 해외 사업을 하고 있고, 품질/안전 부서 사람이 아니니 전문가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진짜 전문가들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을 것이며, 그런 사람들의 생각을 보고 싶기도 합니다. 하지만 연일 쏟아지는 기사는 빈약한 근거로 자신의 위치와 이익에 따라 정치적인 내용들이 대부분입니다. 등장하는 전문가들 역시 이익에 따라 움직이는 어용 전문가들이 많죠. 혜성이 떨어져 인류의 종말이 오는 상황에서 벌어지는 터무니없는 영화적 에피소드들이, 일부 사람들의 죽음을 예방하는 논의에서 그대로 드러납니다. 스케일이 다를 뿐 어떤 것이 영화이고 어떤 것이 현실인지 모를 정도로 흡사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