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뜬금없이 웬 과학?

516 토론의 기준

by 평범한 직장인

방송에서 토론을 처음 본 건 공중파 TV에 방영한 100분 토론이었습니다. 공부 빼고는 모든 것이 재미있는 수험생 신분일 때 봐서 그런지는 몰라도 크게 자극적이고 재미있지 않은 방송임에도 상당히 즐겁게 시청하였는데, 어린 시각으로 봐도 토론 내용은 엉망진창인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때는 워낙 토론이 어려운 것이라 그런 거겠지라고 넘어갔는데 나중에 돌아보면서 생각해 보니 그들은 토론이 아니라 논쟁을 하고 있었습니다. 논리적으로 상대방의 말을 반박하지 못할 경우 말을 돌리던지, 화를 내는 등의 행위로 끝끝내 서로 평행선을 달리려고만 했습니다. 토론을 잘한다고 소문난 사람들은 대부분 빠른 말로 상대방 조롱을 잘하는 경우가 많았고, 속 시원한 말로 잘 터트려 카타르시스를 줄 뿐 문제 해결이나 합의를 도출하는 경우는 못 보았습니다. 이미 토론에 참여하기 전부터 밀리면 끝이다는 마음가짐을 가지고 치르는 전쟁을 보는 듯했습니다.


토론은 이기고 지는 싸움이 아니라 합의에 이르는 과정이어야 합니다. 상대방의 말을 듣고 잘못된 부분을 논리적으로 지적하고 반박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하며, 화를 낸다고 해서 이기는 싸움이 아닙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학습이 있어야 하고, 토론 연습을 많이 해야겠죠. 많은 사람들이 우리나라 교육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는데 저는 개인적으로 우리나라 환경에서 더 좋은 방식의 교육 방식을 찾는 것이 쉽지는 않다는 입장이기는 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토론을 위한 연습이 좀 더 있었으면 하는 마음은 있습니다. 본인의 생각과 다른 의견을 받아들이는 것에 익숙지 않은 사람들이 많고, 누군가가 자신의 생각을 부정하면 분노를 하는 것을 자주 보게 되는 것이 아쉽습니다. 게다가 나이나 직급의 격차가 크면 클수록 이러한 경향이 더욱 심해지는 것도 사실입니다.


뿐만 아니라 토론은 스킬만 단련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토론을 시작하는 기준점이 없으면 서로 창의적인 의견만 마구잡이로 남발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과거처럼 비교적 일관된 가치관을 공유하고 있지 않고 각자의 세계에 갇혀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 현대 사회에서 차이를 좁히기 위한 토론은 토론을 잘하는 사람들만 있다고 하더라도 쉽지 않습니다. 누군가가 지구가 평평하다고 주장하며 창의적인 내용을 남발한다고 했을 때, 애초에 생각의 틀자체가 다른 사람이기 때문에 설득을 해보려 한다면 생각보다 훨씬 막막해진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과학은 어떤 사실도 100%라고 말하지는 않지만, 해당 시점까지 가장 많이 검증된 이론을 정상 과학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모든 이론은 정상 과학의 범위 내에서 발전되어나가고 있으며, 여기에 위배되는 결론이 나올 경우 실험의 잘못을 찾거나, 이론을 잘못 적용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정상과학을 완전히 신봉하지는 않습니다. 단 하나의 반례가 이론 전체를 바꿀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현대 물리학의 모든 연구는 상대성 이론과 양자역학의 틀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상대성 이론은 수도 없이 많은 증명을 했지만 지금도 끊임없이 여러 실험을 통해서 맞는지 확인을 하고 있습니다. 2016년 중력파 검출로 세상이 떠들썩했는데, 수도 없이 검증된 상대성 이론을 더 확실하게 검증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원자 역시 존재하는 것이 여러 차례 증명되었음에도 고해상도 전자 현미경을 통해 직접 관측을 하는 노력을 기울이며 검증을 하고 있습니다. 과학은 모든 반론을 받아들이고 반박합니다.


삼성디스플레이 뉴스룸 '테크 트렌드'에서 발췌

우리 사회에도 정상 과학이라고 할 만한 내용이 있습니다. 특히 현대는 모든 분야가 세분화되어서 거의 대부분의 분야에 전문가가 존재하고 이론이 성립되어 있습니다. 정상 이론은 현재 법이 될 수도 있고, 관례가 될 수도 있고, 각 분야 전문가의 주류 이론이 될 수도 있습니다. 각종 사회 문제에 대해서도 많은 사회학자들이 연구하여 대세가 된 이론이 있을 것입니다. 토론에 끼기 위해서는 해당 문제에 대한 정상 이론을 학습해야 합니다. 학습 없이 무조건적인 반론을 하는 사람은 자격이 없습니다. 과거에는 불가능했지만 현대는 거의 모든 분야의 지식을 습득하기에 용이하게 정보가 개방되어 있으므로 가능합니다. 정상적인 반론에 대해서 정상 이론을 가지고 있는 쪽에서는 반드시 답변을 해야 합니다. 논리적으로 많은 반론을 방어할수록 그 이론은 위상이 높아질 것입니다.




과거의 기술로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관심 있고 필요한 분야를 학습하여 의견을 제시하고 반박하는 분위기는 불가능했습니다. 하지만 모든 지식이 오픈되어 있고 심지어 쉽게 설명해 주는 플랫폼이 많습니다. 누구라도 말할 수 있는 인프라가 갖추어진 현대 사회라면 약간의 시스템 정비만으로도 충분히 가능합니다. 지금 익명으로 댓글이나 달며 자위하는 활용 방식에서 벗어나서 실명으로 지킬 것을 지키며 자신의 의견을 게재하되, 검열과 불이익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 분위기가 되면 진정한 자유에 한 발자국 더 다가갔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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