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자유는 공짜가 아니다
작년부터 회사에 익명 게시판이 생겼습니다. 초기에 눈치 보며 하나둘 글이 올라오더니, 조금 시간이 지나자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합리적인 불만 개선 요청을 하여 회사로부터 공식 답변을 받고 개선되는 순작용이 생기기 시작하였고, 다양한 종류의 VOC*가 쌓이기 시작하였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동의하지 않는 특이한 VOC가 등록되면 비난의 댓글이 줄을 이었고, 여타 커뮤니티와 같이 싸움이 벌어지는 일도 빈번히 발생하기 시작했습니다. 욕이 들어간 댓글은 신고당하여 삭제됨에도, 욕에 준하는 눈살이 찌푸려지는 댓글도 상당히 많이 달리기 시작합니다. 시간이 더 지나자 초기에 VOC가 주를 이루던 게시판은 다양한 방면으로 내용이 등록되기 시작하였습니다. 각종 정보를 공유하는 내용에 유용한 댓글들이 달리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기도 하였지만, 동료 임직원을 비난하는 글과 비난받을 짓을 한 임직원이 누구인지 찾아내려는 탐정들의 댓글은 어김없이 등장하였습니다. 현재는 잠잠해졌다가 소위 뻘글들이 난립하다 또 잠잠해지기를 반복하는 게시판이 되었습니다.
대부분의 익명성의 문제점이 회사 익명 게시판에서 그대로 드러나고 있었습니다. 회사라는 분위기와 심한 문제 댓글은 삭제되는 등의 차이 때문에 사설 게시판처럼 아주 극단으로 치닫지는 않지만 일정한 패턴을 따르는 것은 공통적인 특성인 듯싶습니다. 회사라는 상하가 분명한 조직에서 자신이 하고픈 말을 할 수 있다는 것이 가장 큰 장점이겠지만, 익명 뒤에 숨어서 대다수 사람들의 짜증을 불러일으키는 글을 쓰는 사람은 꼭 있기 마련입니다. 물론 이런 판단의 기준도 자의적입니다. 대다수의 사람이 불편해해도 뭐가 문제냐는 식의 반응을 날리며 설전을 벌이는 경우도 많이 보게 됩니다. 이러한 모습에 상처와 충격을 받는 사람도 다수 보이며, 자신의 옆에 있는 동료 중 누군가가 가지고 있는 본성을 처음 접하고 환멸을 느끼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VOC에는 공식 답변이 달리지만 민감한 주제나 회사에서 답하기 어려운 내용에는 공식 답변이 달리지 않는데, 워낙에 이상한 요청도 많기 때문에 답변을 해주는 기준을 잡을 수 없는 것이 현실이기도 합니다.
익명성의 보장을 마치 표현의 자유의 보장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자신의 이름을 내걸고 표현을 해도 문제가 되지 않는 사회가 진정하게 자유로운 사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표현을 하는 사람이 자신의 생각과 논리를 끊임없이 갈고닦아야 할 것입니다. 이슈에 대해 공부하고 논리를 개발하여 질문해야 합니다. 그 사람의 표현이 바로 그 사람을 나타내는 정도의 무게감이 가지고 말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런 합리적인 질문에 사회는 답을 해주어야 합니다. 그 질문이 설사 답하는 위치에서 난감하거나 외면하고 싶더라도 반드시 답을 해야 하며, 질문한 사람에게 불이익이 가해져서는 안 됩니다. 회사를 예를 들어 생각해 본다면 누구든 실명으로 회사의 제도나 방침에 의문을 제기할 수 있어야 하며, 회사는 합리적인 답변을 내놓아야 합니다. 각종 권력 기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법원은 내용을 알기 어려운 용어로 가득 찬 판결문을 단순히 읽고 끝내서는 안 됩니다. 판결에 대해 쉽게 설명을 해주어야 하고, 각종 쏟아지는 질문에 답변을 해주어야 합니다. 국회의원은 지속된 토론을 통해 자신의 주장의 설득력을 강화해야 하며, 이 과정을 잘 처리해 온 사람의 당선 가능성이 높아져야 합니다. 대통령 역시 큰 정책에 대해서 나오는 주요 질문에는 합리적인 답변을 해야 합니다. 권력 기관이 그 정당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이 과정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여야 합니다.
그렇다면 기존의 익명 게시판에서 자신의 본능을 표출하는 행위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는 굳이 없앨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게다가 없애기도 힘들어 보입니다. 본능의 배설용으로 생긴 매체는 옐로페이퍼**를 비롯하여 항상 존재해 왔으며, 이러한 욕구를 통제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또한 이런 게시판을 없앤다고 없어지지도 않습니다. 단지 그건 스트레스 해소를 위한 배설만으로 이용하고, 결정을 하는 데는 영향을 주지 말아야 합니다. 공신력 있는 게시판을 만들고 거기서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이름을 걸어야 합니다. 몇 줄 내용만 보고 우르르 몰려가서 마녀사냥을 하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자신의 이름을 걸고 하는 합리적인 질문에 각 기관들은 역시 합리적인 답변을 해야 합니다. 언론 역시 실명의 글만을 보도하고 분석해야 하며, 익명게시판의 추세는 가십거리를 다루는 황색 언론에서나 기사를 써야 할 것입니다. 그런 것을 다루는 언론을 황색 언론으로 취급해야겠죠. 세상은 끊임없는 대화를 통해 발전할 수 있으며, 대화는 합리적으로 진행되어야 합니다.
* VOC : Voice Of Client, 고객의 소리
** 옐로페이퍼 : 저속하고 선정적인 기사만을 주로 보도하는 저급한 신문을 말한다. 1830년대 미국에서 시작된 것으로, 노골적인 사진과 흥미 있는 기사 등을 게재해서 독자들의 감정을 자극하여 발행부수 확장을 노린다. [매경시사용어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