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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평범한 직장인 Dec 24. 2023

모성애와 부성애

부모가 헌신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

인간은 왜 그렇게 헌신적인 부모가 되는 걸까? 모성애와 부성애는 왜 생기는 걸까? 어린 시절부터 가져오던 질문 중 하나다.




물론 이런 질문을 주변 사람들에게 할 수는 없다. "그럼 자신의 아이인데, 당연한 거 아니냐?"라는 반응이 올 것이기 때문이다. 때때로 질문을 과잉 해석해서 "넌 사람도 아니냐?" 라며 경멸의 눈빛이 돌아올 수도 있을 것 같다. 맞다.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모든 인류가, 아주 예외적인 사람들을 제외하면 모든 아이를 가진 부모들이 아이에게 헌신적이게 되는 것은 설명이 필요하다.




과학을 좀 아는 사람이라면 DNA가 각인이 되어 있어 시켰다고도 말할지도 모르겠다. 그러고 보면 요즘 행동을 설명할 때, DNA를 말하면 모든 것이 해결되는 느낌이 있다. 과학을 잘 모르는 일반인들에게조차 그만큼 DNA는 친숙한 개념이 된 것 같다. 그런데 내가 알기로 DNA에 새겨진 4개의 코드(AGCT)는, 우리 몸의 각 부위에서 만들 단백질의 종류를 지정해 준다. DNA는 생물의 몸에 단백질을 배치하고 구성하기 위한 일종의 설계도인 셈이다. 단백질 설계도가 사람에게 무엇을 하라고 시킨다는 것은 좀 이상하다. 물론 특정 행동을 하는 생물의 DNA를 분석해 보니 다른 생물에서 발견되지 않는 DNA 구조가 발견될 수 있고, 그 DNA를 특정 행동을 하는 DNA라고 이름을 붙일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DNA가 어떤 행동을 하도록 시킨다는 것은 무언가 좀 이상하다. 근거가 좀 부족한 느낌이다. ‘DNA가 그렇데~’라고 말하는 사람 중에 어떤 DNA가 어떤 이유로 그런 행동을 만들었다고 설명할 수 있을까?


자신과 배우자의 유전자를 반반씩 가진 가장 가까운 생명체이기 때문에 헌신적이 될 수 있다고 설명할 수도 있다. 오래전에 출간된 ‘이기적 유전자’라는 책에서 생물은 유전자를 전달하는 개체일 뿐이라는 식의 설명을 했다고 한다. 자신의 대를 이으려는 욕구가 가장 강하게 본능에 박혀 있고 때문에 자신의 유전자를 가장 많이 가지고 있는 자신의 자식에게 헌신적이 되는 것이 당연하다는 설명이다. 상당히 과학적이다. 그런데, 그렇게 치면 지금 요즘 인간은 좀 위험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저출산 문제가 심각하다고 하니 말이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아직 전 세계 인구는 증가하고 있으니 우리나라 한정으로 심각하다 할 수 있다. 종의 생존을 위해 가장 필요한 능력이 점점 옅어지는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하다.


좀 더 생각해 보니 꼭 그런 것도 아닐지 모르겠다. 많은 아버지들이 자식보다는 자신의 성공을 위해 집을 내팽개쳤다가 자식들이 성장하고 나서야 후회하는 스토리가 적어도 제 아버지 시대에는 수두룩하게 많이 있었다. 예전에 자식을 챙기는 몫은 거의 어머니였다. 왜 아버지는 자신과 가장 가까운 유전자인 존재를 그렇게 대했을까? 이는 또 시대 마다도 다르다. 몇백 년 전 유럽만 해도, 어린이는 사람으로 취급도 하지 않았다고 하니 말이다. 영화 ‘오펜하이머’에서 오펜하이머가 자신의 아이가 계속 울고 있는데도 신경도 쓰지 않는 장면이 나왔는데, 그 시대 남자들의 기본 인식이 아이는 여자가 돌보는 것임을 보여주는 장면이라 한다.




부성애와 모성애는 달라서 그런 인식이 생긴 것일까? 경험해 보니 전반적으로 다른 특징이 있는 것 같다. 아기는 엄마 뱃속에서 10개월 있다는 점이 커 보인다. 남자는 절대 경험할 수 없기 때문에 알 수는 없지만, 아이가 자신과 한 몸으로 붙어, 자신의 영양분을 먹으며 자랐다는 경험은 아빠와는 다른 형태의 애정을 가지게 만들기는 충분해 보인다. 하지만 그것이 차이의 전부일까?


사회적으로 그래야만 한다는 인식도 한몫을 하지 않을까 싶다. 부모가 자식을 기르고 자식이 효도하는 컨셉은 아주 오래전부터 유지되어 왔다. 우리는 사회화 과정에서 이를 반복하여 배우고, 그러다 보니 당연히 그래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일 수도 있다. 남의 아이가 그 부모에게 부당한 취급을 받는 것을 접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분노를 느낀다. 내 유전자와 전혀 상관없는 사람에게 벌어진 일에 느끼는 분노는 사회화된 공감 능력 때문이 아닌가 싶다. 과거 아버지들이 어린이를 사람 취급도 하지 않았던 것 역시 사회적 분위기 탓이 크지 않을까 싶다. 물론 그렇다고 사회적인 분위기만이 부모가 아이에게 헌신하는 근본 원인은 아닐 것이다.


조금 더 현실적인 이유를 생각해 보면 귀여움이 있을 것 같다. 아기는 귀엽다. 못생긴 아기도 귀엽다. 내 새끼니까 더 귀엽다는 말도 맞다. 예전 친구들이 자기 아기 사진을 보여줄 때면 그냥 ‘귀여운 아기구나'라고 생각했는데, 진짜 내 아기를 보니 말도 안 되게 귀엽다. ‘귀여움이 세상을 구원하리라'라는 책도 있는 걸 본 적이 있는데, 이 귀여움이 종족 유지에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하지만 귀여움은 분명 강한 요소지만 무언가 조금 부족하다. 사실 지금은 저세상으로 간 내 동생 ‘뚜비'도 만만치 않게 귀여웠다. 지나가는 고양이는 또 어떤가. 귀엽기로 따지면 세상에는 귀여움 투성이다. 좀 더 강한 요인이 있을 것 같았다.




막상 아이를 실제 경험해 보니 내가 추상적으로 생각하던 것과는 많이 달랐다. 물론 아이는 나를 닮았고, 너무나도 귀여우며, 나는 꽤 사회화가 잘된 축에 속하기 때문에 아이를 열심히 키우는 면도 있다. 하지만 아이가 출산하자마자 “아버지, 반갑슴다.”라고 인사를 하며 자기 할 일을 척척 해낸다면 오히려 애정이 줄어들 것 같다. 오로지 세 가지 능력만 간신히 갖추어, 혼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약하디 약한 몸을 보며, 자신이 원하는 것을 몰라주는 부모에게 서럽게 울면서 있는 힘을 다해 우는 표현 밖이 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며 마음이 가고 애정이 커진다. 왜, 주변에도 뭐든지 잘하는 친구는 좀 정 없어 보이지만, 착한데 좀 허술해 보이는 친구를 더 챙겨주고 싶고 가깝게 느끼지 않나? 내가 아니면 누구도 케어해 줄 수 없을 것 같은 기분이 나를 아이에게로 끌려가게 만든다. 아기의 행동이 내 예측 범위에 있어 제시간에 착착 챙겨주기만 하면 아무 투정이 없다고 한다면, 챙겨주는 시간 외에 아기는 방치되고, 자칫 위험할 수 있을 것이다. 그걸 아는지 아기는 언제나 내 예측범위를 벗어나게 울고 행동함으로써 언제나 신경을 쓸 수밖에 없게 만든다. 그러고 보면 아기의 생존을 위한 능력은 3가지만 있는 게 아니었다. 아기가 가진 강력한 4번째 능력은, 3가지 능력 이외에 아무것도 할 수 없어서 전적으로 부모에게 모든 것을 의존할 수 있는 능력, 이 능력이 인류를 멸종하지 않게 만든 어쩌면 가장 중요한 능력이 아닌가 싶다.




저는 집에서 육아 전담도 아닌 서포터라 할 수 있으며, 글의 내용은 과학적으로 전혀 검증이 되지 않은 사견입니다. 아이를 관찰하며 드는 갖가지 상념을 여과 없이 적은 일기를 공개한 것뿐이니 오해 없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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