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 번째 떠드는 글
여름 지나 막 들어선 가을, 늦은 밤. 퇴근하고 버스 정거장까지 타박타박 걸어가 집으로 향하는 버스를 탄다. 막히지도 않는 열몇 정거장을 썰렁하게 달려 여의나루역 정거장에 내린다. 여의나루역에서 집까지 가려면 한강을 끼고 10분 남짓을 걸어야 한다. 다시 타박타박 몇 걸음 옮기는데, 훅 차가운 바람에 오늘따라 유달리 한강이 서럽다. 걷다가 멈춰 강물 흐르는 걸 보니 서러움을 넘어 한스럽다는 생각까지 든다. 아무래도 한강은 한스러워서 한강인가 봐.
더위에 몹시 취약한 나는 너무 더울 때는 정신이 거의 나가고 없다. 그런 이유로 여름에 밖을 걸을 때는 '덥다. 너무 덥다', '습하다. 너무 습하다' 정도의 감정을 느낄 뿐이다. 그러다 이렇게 갑자기 바람이 훅 차가워지면 압축돼 있던 감정들이 해제돼 쏟아져 나오는 것인지 뭔지, 맥락도 없이 너무 우울해진다.
수능 본 게 벌써 얼마나 과거의 일인데, 수험생 시절, 여름 지나 가을 아침 바람이 훅 찰 때 느꼈던 '아……' 하는 감정도 살아나고, 10월 초 입대 앞두고 맞았던 찬바람의 기억도 살아나고, 제일 마음 편하게 연애했던 사람과 시골 마을로 마지막 여행을 떠났던 20대 중반 9월의 쌀랑한 추억도 살아나고. 내 삶에 쓸쓸했던 기억은 이맘때 다 소환되는 것 같다. 올해 여름은 그리 덥게 느껴지지도 않았는데, 그런데도 갑자기 불어오는 가을바람은 여지없이 쓸쓸함을 주는구나.
돌아갈 수 없는 과거는
미화되어 마냥 그립기만 하다.
고작 서른몇밖에 안 됐는데,
앞으로 만나게 될 것들에 설레기보다는
앞으로 이별해야 할 것들에 슬퍼진다.
지겹게 더운 여름 지나 가을이 성큼 찾아왔을 때 우울한 이유는 올해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 때문일 것이다. 한강 따라 걸으며 내년에 내가 될 나이를 생각해보니 정말 한스럽기가 짝이 없다. 왜 이럴까. 사는 데 대단한 미련이 없는데, 오히려 해치우듯 살고 잘 정리해 떠나고 싶은 마음인데, 끝에 가까워지는 나이 듦은 왜 기쁘지 않고 서러운 걸까.
돌아갈 수 없는 과거는 미화되어 마냥 그립기만 하다. 고작 서른몇밖에 안 됐는데, 앞으로 만나게 될 것들에 설레기보다는 앞으로 이별해야 할 것들에 슬퍼진다. 마포대교 난관 붙잡고 흐르는 한강에 "앍!" 소리라도 지르며 절규하면 이런 감정이 좀 해소되려나 싶지만, 주변에 선량한 시민들 놀라게 만들고 싶지 않고, 그런 생각을 행동으로 옮길만한 배짱도 없기 때문에 와일드한 생각과는 다르게 그저 다소곳해져 걸을 뿐이다.
퇴근길 한강을 끼고 걷는 10분도 안 되는 시간에 지나면 그뿐인 감정을 앓으며 이리 괴로울 일인가 싶다. 한 단어로 표준국어대사전에 올라도 될 듯이 굳어져 흔히 쓰이는 '가을 타다'는 말도 있는 터에, 이맘때쯤 타는 감정이 나만 타는 감정도 아닐 것이다. 그러니 괜한 허무에 빠지지 말아야지 생각해보지만, 그게 내 마음대로 될 리는 없다. 친구들에게 "바람이 차가우니 너네도 분명 외롭지!?"라고 카톡을 보내 외로움을 강요해볼까, "나도 외롭다"는 대답을 받아 위안을 얻어볼까 싶지만, 그마저도 그냥 말기로 한다.
매해 반복되는 그러려니 해야 하는 이런 감정들. 잠깐 타고 지나가 버릴 마음들. 한 살 한 살 더해질수록 내가 내 마음을 잘 다스릴 수 있으면 좋겠는데, 한 살 한 살 더해질수록 마음은 더 약해지는 느낌이라 큰일이다 싶다. 행복은 바라지 않지만, 사는 동안 고요하게 평화로웠으면 하는데 아무래도 쉽지 않겠다 싶다.
좋은 일이 조금 있었으면 좋겠다. 내가 애써서 얻는 좋은 일 말고, 노력해서 얻는 좋은 결과 말고, 애쓰고 노력하지 않았는데 그냥 툭 하니 던져지는 좋은 일이 조금 있었으면 좋겠다. 딱히 큰 기대는 하지 않지만, 그랬으면 좋겠다. 좋으려면 좋은 것들 이미 내 주변에 많은데, 내가 그런 걸 너무 모르고 사는 건가 싶기도 하다. 끝도 없다. 이 마음들.
맨정신으로 침대에 누워 생각이 꼬리를 물지 않게, 홀짝홀짝 마시고 잠이나 빨리 자야지 하는 생각으로 흑맥주 한 캔을 사서 집에 들어간다. 마시고, 자고 일어나면 이런 현상에 불과한 감정들이 조금 사그라들어 있을 것 같기도 하다.
흑맥주 한 캔을 비우고, 씻고 눕는다. 창문 조금 열어 두고 침대에 누우니 이제 정말 춥다. 여름내, 아예 안 덮기는 허전해서 무릎까지만 덮어뒀던 이불을 목 아래까지 끌어 올린다. 정말 계절이 변했구나. 한 해가 또 가려고 하는구나. 너무 쓸쓸하다. 자고 일어나도 이런 현상에 불과한 감정들이 조금도 사그라들어 있지 않을 것 같다. 그래도 뭐, 그러려니. 그러려니 해야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