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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미 Oct 13. 2021

스펙이 되지 못하는 아픔들에게

역경을 극복한 경험이 있나요?


자기소개서의 단골 질문이다. 어떤 역경을 써야 할지 모르는 사람들도 있다. 반대로 어떤 상처들은 극복으로써 스펙이 되기도 한다. 이러이러한 어려움을 겪었지만 이렇게 성장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어떤 역경이 오더라도 이만치 클 수 있는 인간입니다. 이렇게 어필할 수 있는 자양분이 되는 것들이 있다. 축하할만한 일이다. 한 인간이 자신을 둘러싼 아픔을 뚫고 나아가는 일은 언제나 경이롭다.


그러나 어떤 상처들은 스펙이 되기에는 너무나 위험하다. 편견에 둘러싸여 있기 때문이다. 가령 가정폭력, 성폭력, 학교폭력과 같은 것들. 이런 상처들은 꺼내게 되면 극복이 아니라 상처 자체에 집중하게 된다. 그러므로 한순간에 당사자를 '극복한 사람'이 아니라 '피해자'로 보게 만든다. 그리고 사람들은 피해자를 좋아하지 않는다. 불편하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아마 그가 겪은 일이 일상적이지 않게 느껴지기 때문일 것이다. 그가 느꼈을 괴로움이 얼핏 느껴지고, 그 감정과 거리를 두고 싶으므로 그 사람에 대해서도 거리를 두는 것이다. 서로 잘 모르는 상태로 누군가를 뽑는 면접장에서, 폭력을 경험했던 이야기는 쉽사리 꺼내기 어렵다.


친구가 하나 있다. 믿었던 사람으로부터 폭력적인 피해를 겪고, 법정 싸움을 거치고, 응급실과 정신병동을 지나 몇년간 이어진 법정 싸움에서 쾌거를 이루었다. 이후 다시 살아갈 힘이 생겨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 친구다. 그러나 그 과정동안 학업에 집중하지 못했고, 많은 시간을 아파하며 보내왔다. 그동안 챙기지 못했던 학점을 채우고 성적을 복구하기 위해 다시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취준생인 친구는 속상해하고 조급해하고 있다. 그가 보내왔던 시간들은 면접장에서 말하기 어려우니까.


그런 상황을 보면 너무나도 속상하다. 헤아릴 수 없는 시간들 속에서 여기까지 오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는지 알기 때문이다. 내가 아는 것보다도 훨씬 더 치열한 시간들을 보내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잘 모르는 사람들은 그 애의 현재만 보고 치열하지 않다고 하기도 했다. 그런 사람들 때문에 속상해하는 친구에게 나도 같이 속상해하며 화를 냈다. 자기들이 뭘 안다고. 너가 얼마나 고생했는데.


또다른 친구가 있다. 수많은 폭력적 경험으로부터 트라우마를 얻었지만, 좋아하는 일을 하고 싶어서 일찍 직업을 가졌다. 고통스러워하고, 두려워하고, 때문에 내게 상처를 주려 하기도 했지만, 그 웅크림 속에 너무나 사랑스러운 진심이 보였던 친구다. 그의 공격은 지난 시간들로부터 형성되었던 방어본능이었을 뿐, 그런 마음이 아니라는 걸 너무나 느낄 수 있었다. 오랜 설득 끝에 정신병원에 다니기 시작한 이후, 친구는 놀랄만큼 빠르게 안정을 되찾았다. 그리고 자신을 괴롭히는 상황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그 과정 속에서 얼마나 힘들었는지, 얼마나 노력해왔는지 오랜 시간을 지켜보았다.


그러나 또 어떤 사람들은 친구가 대학을 나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직업이 육체노동이라는 이유로 폄하하기도 했다. 그게 또 너무 속상했다. 정말 죽고 싶었는데, 죽지 못해 살아왔는데, 그 와중에 살고 싶어서 가졌던 좋아하는 일인데. 얘가 살려고 얼마나 노력했는데. 얼마나 괜찮은 사람인지, 얼마나 잠재력을 가지고 있는지. 그런 것도 모르면서, 외양만 보고 판단하는 것이 너무나 속상했다. 



어느 날은 죽기 위해 창문에 걸터앉았을 것이다. 뛰어내릴지 말지 수천번을 고민했을 것이다. 살고싶은 마음, 이대로 끝내고 싶은 마음. 어느 날은 수없이 상처주었던 말들에 못이겨 환각이 보이기도 했을 것이다. 자면서도 마음 편히 잠들지 못했을 것이다. 눈을 뜨고 싶지 않았을 것이고, 그럼에도 다음날은 와버리고, 썩어들어가는 마음을 외면했을 것이다. 그 일을 겪지 않은 사람인 척하기 위해, 매 시간 매 분 매초를 두 눈 크게 뜨고 버텼을 것이다. 그럼에도 어느 날은 칼을 들고, 어느 날은 주먹으로 머리를 갈겼을 것이다.


알 수 없는 헛소문과, 작정한 듯이 자신을 괴롭히는 이들을.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뻔뻔하게 나오는 이들을 진심으로 죽이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 막을 도리가 없어서, 떠나보낼 도리도 없어서 그저 하염없이 괴로웠을 것이다. 대처해보려고 이렇게도 저렇게도 해보았겠지만 소용돌이처럼 몰아치는 현실에 탈진하기도 했을 것이다. 


자신을 붙드는 친구들의, 사랑하는 사람들의 격려를 외면하고 싶었을 것이다. 나로 인해 힘들어할 것을 알면서도, 너무나 삶을 저버리고 싶었을 것이다. 그들이 밉기도 했을 것이다. 결국 그 고통을 대신 나누어가 줄 수는 없었을테니까. 미워하는 자신이 또 싫어서, 죄책감을 느끼고, 눈물로 밤을 새웠을 것이다. 또는 울지도 못했을 것이다. 눈물 흘릴 방법조차 몰라서.




그럼에도 이들은 살았다. 살아남았다. 타인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은 용기다. 조금씩 용기를 내어서, 자신을 붙드는 사람들의 손을 잡아내고, 자신을 돕는 의사와 간호사와 상담사의 도움을 받아서, 기어이 자신을 사랑해냈다. 완전하게는 아니더라도, 죽음으로부터 조금씩 극복해나갔다. 상처를 주었던 사람을 용서하고, 또는 자신의 삶에서 떠나보내고. 혼란스럽게 윙윙거리던 내면의 목소리를 안아주고. 모든 것이 자기 잘못은 아니라는 걸 어렵게 인정해내고. 어떤 것은 내가 할 수 있었고, 어떤 것은 내가 할 수 없었다는 것을 받아들여내고. 


이들은 삶의 재난을 뚫고 살아남기 위해 치열하게 살아온 '생존자'들이다. 피해자를 '피해생존자'라고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외양으로 무엇이 드러나든, 그들이 겪어온 내면의 모든 과정들은 하나하나가 결코 쉽지 않았다. 상처가 완전히 사라질 수는 없다. 그러나 흉터를 어루어만지고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찾아내었다. 



지금 이들은 내게 힘이 되어주는 사랑스러운 친구들이다. 아파보았기에, 나의 어려움들도 금세 이해한다. 현명하게 판단하고, 대처 방안을 제시한다. 어려운 시간을 함께 지나왔던 만큼 끈끈한 동지애가 형성되었다. 어떤 일이 있든 간에 허물없이 털어놓는 사이가 되었다. 그런 이들이 내게는 너무도 소중하다. 그렇게 좋은 사람이라는 걸, 마찬가지로 면접장에서는 발휘할 수 없겠지만. 분명히 좋은 기회가 생긴다면, 폭발적인 잠재력을 발휘할 것임을 안다. 실제로 후자의 친구는 좋은 기회를 찾아내 좋은 회사에 취직하게 되었다.


그러니, 잠깐은 당신이 사랑스럽지 않더라도. 스펙이 되지 못하는 아픔들 탓에 현재가 고통스럽더라도. 당신이 진심으로 경외롭고 멋있는 사람이라는 것만은 알아주었으면 좋겠다. 이미 큰 산을 한 번 넘어본 사람이라는 것은 알아주었으면 좋겠다. 다시 주저앉더라도 괜찮다. 당신이 삶을 붙들었던 마음의 근육은 결코 손실되지 않았을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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